제120화 고중전 (1)
개막전은 축구였다.
고려 과학고에는 학생 자율 동아리 가운데 축구부가 있었고 이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라인업을 구성했다.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화려한 플레이는 아니어도 선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뛰었고 관중들은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두 학교의 경쟁으로 긴장감과 재미가 확 늘었다.
강우도 최대우와 함께 관전하는 무리에 섞였다.
두 사람은 오늘 특별하게 참여하는 경기가 없기에 응원하는 학생들 틈에 끼어 축제를 즐겼다.
“실력이 제법인데?”
강우의 감탄에 최대우가 쓴웃음을 날렸다.
“난 운동에 영 소질이 없어서 그런지 봐도 모르겠다.”
“그래도 머리를 제대로 쓰려면 운동이 필수야.”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오랜 연구원 시절을 보낸 강우는 운동하지 않고 책상에만 앉아있는 삶은 효율이 떨어진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점점 공부 시간이 늘어가는 최대우가 염려되었다.
그 사이 중앙고의 한 선수가 열심히 치고 들어가 슛을 날렸고 공이 아슬아슬하게 골대를 벗어났다. 함성과 탄식이 번갈아 장내를 메웠다.
“물리 퀴즈는 언제 하지?”
“하아! 오후에.”
오전에는 주로 몸을 쓰는 경기를, 오후에는 머리를 쓰는 경기를 배치했다.
저쪽에서는 농구 경기 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출전할 경기는 언제 해?”
“OX와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점심시간 직전에 한다고 들었어.”
“열심히 힘 빼고 밥 먹으라는 이야기네.”
강우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최대우와 여러 경기를 둘러봤다.
어떤 경기는 고려 과학고가, 어떤 경기는 중앙 과학고가 이겼다. 어느 학교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그리고 12시가 다가왔을 때 전체 줄다리기가 열렸다.
학교별로 양쪽으로 나뉘어 굵은 줄을 잡았다. 1, 2학년이 모두 참가하다 보니 꽤 인원이 많다. 강우는 처음 출전하는 경기였으나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차도도가 흰 체육복을 입고 옆에 서서 응원했다.
“쌤! 쌤도 같이 당기시죠?”
“나까지 들어가면 저쪽이 너무 불쌍하잖아?”
아쉽게도 줄다리기는 고려 과학고의 패배였다. 강우네는 줄에 끌려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차도도가 쓰러져 허우적대는 그들에게 핀잔을 날렸다.
“너희들은 아침도 안 먹었니?”
“저것들이 밥만 먹는 돼지라 그래요! 우리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고요.”
“으이그! 말은 잘한다.”
강우의 변명에 주변의 시선이 최대우를 향했다.
괜히 미안해진 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차도도에게 투정을 불렀다.
“밥 언제 줘요?”
“오늘은 도시락이야. 도시락 가지러 몇 사람 같이 가자!”
차도도가 학생들을 일으키며 도움을 청했다.
* * *
운동장 구석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하늘색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 하얀 체육복의 차도도가 끼어있으니 한 마리의 백조 같다.
고곽천재는 자연스럽게 뭉쳤고 차도도는 여학생, 손차희와 윤수아 옆에 앉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강우와도 가깝게 앉게 됐다.
“강우야, 강우야아! 뭐 했어?”
밥을 먹으면서도 윤수아는 입을 쉬지 않는다.
강우도 밥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뭐 하다니? 구경했지.”
“특별 퀴즈는 안 풀고?”
“특별 퀴즈? 그게 뭔데?”
강우와 최대우의 눈이 동그래지자 윤수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난 지금까지 그거 풀었는데.”
이어서 윤수아가 퀴즈를 설명했다. 강우와 최대우가 아침에 자리를 비운 순간에 퀴즈가 나왔나 보다.
“그래서 차희랑 고민하다가…… 우리는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기로 했어. 운동장에 천문대 돔 그림자가 생기잖아? 그 지점에 서서 천문대를 보면 태양이 천문대에 딱 걸리니까. 그때의 각도와 그림자 길이, 천문대까지의 거리를 알면…….”
설명을 듣고 보니 사이언스 페스타 출품을 위해 월면에 있는 산 높이를 잰 방법과 같다.
“거리는 어떻게 재고?”
“과학실에서 줄자 빌려왔지. 그런데 달의 산 높이보다 이게 더 힘든 것 같아.”
직각삼각형의 한 변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여서 과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답은 구했어?”
“이제 구해야지. 데이터는 다 모았으니까.”
윤수아의 대답에 손차희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 얼굴에는 자신들의 해법이 최상이라는 자부심이 어려있다.
“다른 학생들은?”
“직접 재겠다는 애들도 있어. 계단 하나의 높이를 자로 재어서 계단 수를 곱하면…….”
방법은 많다.
강우는 차도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자칫 힌트라도 줄까 봐 조심하는 눈치다.
점차 강우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어? 생각나는 방법 있어?”
“아니.”
강우는 바로 말을 끊고 도시락에 집중했다.
이 특별 퀴즈를 듣는 순간 한 과학자가 생각났다. 문제를 낸 교장 선생님이 기압계까지 언급했으니 그 의도를 확실하게 알겠다.
수소 원자 모델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덴마크의 물리학자이자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어는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대학교 입학 면접시험에서 특이한 질문을 만나게 됐다.
- 성능이 좋은 기압계가 하나 있다. 이것을 가지고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어보라.
면접관이 기대한 정답은 건물 아래와 옥상에서 기압을 잰 다음 이를 토대로 높이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때 보어의 유연한 사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보어의 첫 번째 대답은 기압계에 실을 매달아 옥상에서 아래로 늘어트린 다음 실의 길이를 잰다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대답에 면접관은 눈을 찌푸리며 과학적 지식을 사용하라고 요구했다.
보어의 두 번째 대답은 옥상에서 기압계로 자유낙하 실험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줄줄이 기발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림자를 이용한다거나, 계단 높이를 잰다거나, 진자를 이용한다거나.
그때 보어가 생각해낸 가장 기발한 정답을 강우는 기억해냈다.
“이건 사고의 유연성을 알아보는 시험이야.”
강우의 단정에 윤수아가 다시 물었다.
“어? 이게 왜? 답을 알아?”
“이제 생각해봐야지.”
강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해답을 알아냈다는 증거였다.
차도도가 끼어들었다.
“강우야, 눈치챘어?”
“아닌데요. 제가 알 리가 있나요.”
“너, 다른 학생과 공유하면 안 돼. 알지?”
강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식사 후 첫 경기는 OX 퀴즈.
3반 학생들이 한쪽에 뭉쳐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바로 강우와 손차희다.
강우는 수학과 물리에서 탁월했고 손차희는 다양한 과목에서 우수했다. 질문 대부분을 수학과 과학에서 출제한다는 예고가 있었기에 학생들은 이 둘만 따라다니겠다고 작심한 상황이다. 적어도 같은 반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단상에 중앙 과학고의 선생님이 올라와 소개 후 문제를 냈다.
“지금부터 문제를 내겠습니다. 뉴턴은 오늘날 사용하는 미분 기호를 발명했다. O는 오른쪽 X는 왼쪽! 자! 출발!”
O라고 쓰인 표지판을 들고 있는 선생님은 차도도였고 X라고 쓰인 표지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신새벽이었다.
예상치 않은 문제에 학생들이 우왕좌왕했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함정이 보인다. 미분을 발명한 사람은 뉴턴과 라이프니츠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분 기호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우야 맞아? 틀려?”
최대우와 윤수아가 빠른 결정을 요구했다.
학생들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흩어졌고 중간에는 몇 남지 않았다.
“아니지.”
그가 결정하자 고곽천재는 왼쪽으로 옮겼다.
첫 문제에 1/4이 떨어져 나갔다.
“다음 문제입니다. 지구에서 볼 때 우리은하를 제외하면 가장 크게 보이는 은하는 안드로메다은하이다.”
다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강우는 최대우에게 눈짓했다. 최대우가 X로 몸을 틀자 모두가 그쪽으로 달렸다.
화학 문제가 나왔을 때는 손차희가 결정했고 컴퓨터 관련 문제는 윤수아를 따라갔다. 덕분에 고곽천재는 탈락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어이 씨스더!”
고현성이 손차희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었다.
“야! 저리 가!”
“싫어! 나도 살아남아야지!”
오늘도 변함없이 꿋꿋하게 구박받는 고현성이 조금 불쌍해 보인다. 그래도 저 녀석 작전이 나쁘지 않다.
운동장의 중앙선을 넘어 오가다가 강우는 익숙한 녀석을 발견했다. 예전에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만났던 중앙 과학고 학생이다. 이름이…… 남동훈이라고 했던가?
남동훈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내는 순간 녀석의 머리 위에 찬란한 S자가 보였다.
- 남동훈, 수학 A, 물리 S, 화학 C, 생물 C, 지구과학 B.
강우가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S 때문이다.
강우가 손을 흔들자 남동훈이 활기차게 웃으며 다가왔다.
“강우, 오랜만이다!”
“너도 잘 지냈어?”
마치 오랜 친구처럼 손을 잡고 악수했다. 적군과 의기투합한 모양새여서 학생들이 어리둥절했다.
“재주껏 잘 살아남았네?”
“나야 친구들 따라다니는 거지.”
“나도 그런데.”
마치 회포를 푸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학생들이 우르르 갈라졌다.
문제를 미처 듣지 못한 두 사람이 당황해서 미적거리고 있을 때 윤수아가 손짓했다.
“강우야! 여기, 여기!”
급히 윤수아 쪽으로 뛰어갔다. 남동훈 또한 그의 뒤를 따라 O로 향했다.
물론 당연히 살아남았다.
옆에서 중앙 과학고 학생이 친구들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거봐! 예쁜 선생님 쪽이라니까.”
“저쪽이 더 내 취향인데?”
“그럼 넌 그쪽으로 가!”
“근데 고곽 선생님들은 왜 이리 예쁘냐? 전학 가고 싶다.”
“나도 그래.”
강우는 안면을 찌푸리며 상대를 찾았다. 저 녀석도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그때 킨텍스에서 관계자가 출현했을 때 질문을 던지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려던 녀석이다.
이 나이 또래의 남학생들이 예쁜 여선생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딱히 이상하진 않지만 차도도라서 괜히 기분이 나빴다.
강우는 건들거리면서 녀석의 앞으로 갔다.
“또 보네?”
“어? 누구? 히익!”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녀석이 기겁하고 뒤로 물러났다.
“동훈아, 네 친구 말이야. 남의 학교라도 선생님은 선생님이거든? 예의 지키라고 해주라.”
“그래, 알았다.”
순순히 남동훈이 그의 말을 들어줬다. 물론 경고가 먹히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안다.
그 사이 또 문제가 출제됐고 강우는 정신없이 최대우를 쫓아다녔다. 그가 문제풀이에 집중하지 않는 바람에 손차희가 대신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몇 번 지나자 남은 사람 수가 확 줄었다.
대략 스무 명가량이고 학교별로는 비슷한 숫자가 남았다.
강우네 반은 강우와 손차희를 따라다니겠다고 작전을 세웠으나 현실에서는 쉽지 않았는지 거의 남지 못했다. 다만 고곽천재는 단합해서 몰려다녔기에 모두 살아남았다. 물론 고현성과 전상철도 꿋꿋했다.
단상에서 남은 학생 수를 세던 선생님이 다시 문제를 냈다.
“하늘에는 모두 88개의 별자리가 있습니다. 이 별자리 중에 파리자리도 있다.”
“억! 파리자리?”
일대 소동이 일었다. 파리자리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최대우도 어리둥절했다. 다만 아무리 최대우이더라도 남천의 별자리까지 모두 꿰고 있을 수는 없다. 당연히 강우도 아는 바가 없다.
최고의 위기가 닥쳤다. 모두 같은 처지가 되어 눈치를 봤다.
그때 눈에 들어온 녀석이 있었다. 어젯밤 천체관측 대결에서 중앙고 에이스로 출전한 녀석이다. 그 녀석이 최대우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당당하게 X로 향했다. 중앙고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