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고중전 (2)
파리자리라니? 웃긴 데 정말 있을까?
최대우도 녀석의 비웃음을 눈치챘다. 최대우가 주먹을 꽉 쥐고 한바탕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최대우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무척 많다. 천문에서는 최대우가 에이스라고 여기는 학생이 다수다.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최대우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중앙고 에이스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쪽? 정답을 모르니 찍어야 한다.
강우가 물었다.
“혹시 모기자리는 들어봤어?”
“그런 별자리가 있을 리가…….”
무심코 반박하던 최대우가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깜박였다.
“이, 있어. 남반구에.”
“모기?”
“아니, 파리. 남십자성 옆에.”
두 사람이 O로 옮기자 고려고 학생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소신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고 양쪽 학생들이 확 갈라졌다.
정답은 O였다.
“헐!”
살아남은 학생의 환호성과 함께 떨어진 학생들이 구경꾼으로 밀려났다.
최대우는 이 문제로 오늘도 중앙고 에이스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덕분에 살아남은 학생 가운데 고려고 학생이 훨씬 많아졌다.
여전히 손차희에게 딱 붙어 있는 고현성을 본 이민찬이 설렁설렁 다가왔다.
“차희? 둘이 사귀냐?”
“사귀긴 누가?”
“껌딱지 붙어 있잖아?”
“그건…… 정답을 맞히다 보니 그렇지.”
바로 무시하는 손차희의 반응에 피식 웃던 이민찬이 고현성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현성도 웃음을 머금고 손짓으로 응했다.
“다음 문제입니다. 리츠의 결합법칙에 따르면 어떤 원소의 스펙트럼은 두 진동수의 합이나 차로 주어집니다. 즉 수소 원자 에너지 준위에서 라이만 계열의 두 번째 선의 진동수는 첫 번째 선과 발머 계열의 첫 번째 선의 진동수의 합과 같다.”
갑자기 문제가 확 어려워졌다. 이전까지는 어렵다기보다 함정이 있는 말장난식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지식을 물어보는 문제였다.
“리츠의 결합법칙이 뭐야?”
“물리야? 화학이야?”
원자 스펙트럼은 알아도 리츠의 결합법칙은 대부분이 생전 처음 들었다.
하지만 강우에게는 사실상 전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소 원자와 관련된 연구를 다룬 지 벌써 십 년이다.
다른 학생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던 강우는 얼른 결정하라는 호통 소리에 친구들을 이끌고 차도도에게 향했다. O다.
다시 절반이 떨어졌다.
남은 학생은 고려 과학고에서는 고곽천재와 이민찬과 고현성 등이고 중앙 과학고에서는 남동훈과 세 사람이었다. 즉 모두 합쳐 십여 명이 살아남았다.
“다음 문제입니다. 역대 고중전, 중고전에서 우승을 자주 한 학교는 고려 과학고이다.”
수학, 과학이 아닌, 뒤통수를 때리는 결정적인 문제가 나왔다. 솔직히 아는 사람도 없다.
고려고 학생도, 중앙고 학생도 모두 눈치만 봤다.
“그래도 학교를 배신할 수 없지!”
이민찬이 먼저 O로 향했다. 고려고가 더 우승 횟수가 많다는 쪽이다.
남동훈과 중앙고 학생들도 학교를 배신하지 않겠다며 X로 향했다. 정답을 모르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차희야, 우리도 애교심을 발휘하자, 응?”
고현성이 손차희에게 O를 권했다.
손차희도 O쪽으로 움직이고 싶지만 이민찬이 있으니 어쩐지 가기 싫었다. 손차희와 윤수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우를 향했다.
강우는 뾰족한 수가 없어도 확실한 원칙은 있다.
지금 이렇게 두 학교가 애교심이랍시고 딱 갈라져 버리면 지금까지 더 많이 살아남은 고려고가 손해다. 많은 인원수를 이용해서 두 곳으로 나누는 것이 훨씬 낫다.
문제는 누가 X로 가서 배신자라고 욕을 얻어먹느냐다.
“찢어지자!”
강우의 해결책에 손차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달리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중앙고 우승 횟수가 많다는 쪽에 걸어서 욕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강우는 미소를 머금고 최대우를 끌어당겼다.
“너랑 나랑 역적하자.”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는 최대우를 붙잡고 강우는 X로 넘어갔다. 어쩐지 적진으로 온 것 같은데 그나마 적이 셋뿐이니 견딜 만하다. 최대우의 몸집이 2인분이니까 같다고 봐야지.
건너편에서 손차희와 윤수아가 나라를 잃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이거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 같은데?
“X입니다!”
환호성이 일었다.
고려고 선배들은 중앙고에 패배한 적이 더 많았던가.
순식간에 남은 수가 역전됐다. 고려고는 강우랑 최대우만, 중앙고는 남동훈과 똘마니 둘.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적당히 참가만 하고 끝내겠다는 계획에 비해 대단한 성과였지만 모교의 우승을 생각하니 슬슬 욕심이 났다.
X자 표를 들고 있던 신새벽이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파이팅! 강우야! 우승하면 내가 선물 줄게!”
저 선생님이 주는 선물은 괜히 무섭다.
강우는 다시 중앙으로 넘어와서 다음 문제에 주목했다. 이제는 설렁설렁 들어서는 안 된다.
다시 문제가 출제됐고 이번에는 모두가 몰려다녔다.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고생대 이후 최근이 지구의 평균 온도가 가장 높다.”
쉬운 문제인 것 같은데 혼란스러웠다. 최근 1세기 동안에는 계속 기온이 오르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봤지만, 더 먼 과거는 어떠했는지 기억이 없다. 아득한 옛날에 빙하기가 있었다는 말은 있었는데 그 이전엔? 공룡도 이산화탄소를 과다배출하지는 않았겠지?
강우도 최대우도 지질 전문은 아니다.
“또 찢어질까?”
의기투합했다. 강우는 최대우에게 먼저 고르게 했다.
“난 담임을 선택할래.”
최대우가 O로 향했고 자연스럽게 강우는 신새벽에게 갔다.
“이야, 강우가 나를 선택하는구나!”
“쌤이 더 아름다우시니까요.”
“그, 그렇지?”
햇빛을 받은 신새벽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부성 발언을 하고 중앙고 학생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저 녀석들도 선택이 다르지 않았다. 남동훈 녀석이 강우 쪽으로 왔고 나머지 둘은 최대우에게로 갔다.
“우리 둘이 남았네?”
강우의 말에 남동훈은 씨익 웃어 보였다.
정답은 X였다.
이제 남은 사람은 강우와 남동훈. 두 사람 모두 물리 전문이고 심지어 남동훈은 물리가 S인 학생이다.
단상에서 출제자가 물었다.
“두 학생 전공이 뭐죠?”
“물리요.”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대답했다.
“물리로 할까요? 아니면 다른 것으로?”
“당연히 물리죠.”
진검승부를 마다할 강우가 아니었다.
강우는 남동훈과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쳤다. 투쟁심이 불타오른다.
“물리요? 좋죠! 수학으로 하겠습니다!”
이건 무슨 횡포래? 강우와 남동훈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문제가 이어졌다.
“마지막은 OX가 아닌 단답형입니다. 동시에 크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이어서 문제가 출제됐다.
“포개짐이 전혀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일정한 모양의 도형으로 채우는 것을 테셀레이션이라 합니다. 욕실 바닥 타일에서 흔히 볼 수 있지요. 한 종류의 정다각형으로 테셀레이션을 만들 때 가능한 정다각형은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육각형, 즉 3종류입니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정다각형으로 만들 수 있는 테셀레이션은 모두 몇 가지가 있을까요?”
문제를 듣는 순간 강우와 남동훈을 비롯하여 다른 학생들도 화들짝 놀랐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해서 골치가 아프다. 조건을 잡고 연립방정식을 풀면 될 것 같긴 하지만 시간이…….
남동훈이 운동장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경우의 수를 고민했다.
강우도 그 옆에 주저앉았다. 물론 강우는 바닥에 낙서하지 않았다. 단지 하는 척만 했을 뿐. 그는 머릿속으로 테셀레이션 무늬를 조합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정삼각형이 모인 테셀레이션, 정사각형이 모인 테셀레이션을 떠올리자 이어서 두 종류 다각형이 엮인 문양이 머릿속에서 조합됐다. 여러 경우의 수와 함께 주어진 조건을 만족하는 연립방정식까지.
답이 나왔다.
“자, 셋 하면 정답을 외치면 됩니다. 하나! 둘!”
강우는 힘차게 답을 외쳤다.
“5!”
남동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끝까지 계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우의 우승이었다.
‘젠장! 우승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일이 풀리다 보니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으나 어쨌든 좋은 일이다.
이것으로 어떤 종목에도 출전하지 않아 학교에 이바지하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냈다.
남동훈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물리 퀴즈에도 출전해?”
“아니.”
“어떻게 네가 빠져? 그럼 어디 출전하는데?”
“아무 데도 안 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남동훈이 돌아가고 강우는 주변의 환호와 축하를 받았다.
신새벽이 들고 있던 팻말로 강우의 머리를 쳤다.
“잘했어! 고생했어!”
“으악! 왜 때려요?”
“귀여우니까.”
강우는 재빨리 손으로 공격을 막으며 차도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차도도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오후에는 본격적으로 수학 과학 퀴즈 경기가 시작됐다.
출전할 경기가 없는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물리 퀴즈를 구경했다.
물리 강의실에는 벌써 양쪽 학교 학생들이 가득했다. 고려고 쪽은 물리실험반 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중앙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양쪽 학생들은 평소에도 교류가 있었는지 서로 안면이 있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출전 선수는 학교당 다섯. 모두 일곱 문제가 출제되며 한 문제씩 누구든 빨리 정확하게 푸는 쪽이 이기는 경기였다. 네 문제를 빨리 풀면 승리다. 당연히 같은 학교 다섯 명은 서로 토론하면서 문제를 풀어도 상관없다.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뒤쪽에 앉아 관전 모드로 들어갔다.
“동훈이가 물리 선수로 나오네.”
남동훈의 머리에서 빛나는 물리 S급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해된다. 정작 고려고의 S급인 최대우는 지금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지만.
“남동훈이랑 친해?”
“아니, 그때 킨텍스에서 본 게 전부야.”
최대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옆에서 떠드는 중앙고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리는 우리가 이기겠지?”
“당연하지. 물리 국가대표가 있잖아?”
“저쪽도 있을걸?”
“국가대표 수는 우리가 많아.”
다섯 명이 연합해서 토론으로 문제를 푸는 경기이므로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특출난 한두 명이 경기를 좌우하는 구조다.
대충 대화로 보아 중앙고에는 물리 국가대표 출신이 많은 모양이다.
강우는 얼마 전에 벌였던 이론물리부 도장 깨기 사건에서 만났던 학생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금메달이라던 김창식과 은메달이라던 박호재가 보였다. 저 둘이라면 제법 잘하리란 예상이 된다. 비록 그날 한참 부족했지만 그래도 기본 가락은 있는 녀석들이니까.
“어? 아무리 봐도 넷인데?”
출전 선수가 다섯이어야 하는데 지금 대기 중인 학생은 넷이다. 저쪽 부서가 아니라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물리 퀴즈 심판을 맡은 양쪽 학교 선생님들이 등장했다. 고려 과학고에서는 물리 실험을 가르치는 홍준영 선생님이다.
숫자를 센 홍준영이 주장인 김창식에게 물었다.
“고려 과학고에서는 한 명이 부족한데 언제 오지?”
“그 한 명이 오늘 집안 사정 때문에 결석했는데요?”
“그러면 충원해야지?”
“그냥 하겠습니다.”
뒤늦게 한 명을 보충하기보다 그냥 네 명으로 경기를 소화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래, 뭐 나중에 충원해도 되니까.”
홍준영이 양쪽 학교 학생들을 불러 경기 방식과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준비가 완료되자 퀴즈 개회가 선언되고 양측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학 다음으로 많은 학생이 관심을 가지는 물리 퀴즈 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