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고중전 (3)
강우는 살짝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때 이론물리부에서 최대우와 편을 먹고 결전을 벌였을 때 밉상이었던 두 선배가 바로 김창식과 박호재였다.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그에 반하여 남동훈은 그에게 꽤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 보니 강우는 남동훈을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혼란마저 일었다.
어쨌든 그는 고려 과학고의 일원이어서 고려 과학고를 응원해야 한다. 지금은 개인적인 호불호를 버려야 할 때였다.
“고려! 고려! 잘하자!”
“중앙! 중앙! 힘내라!”
이론물리부 학생들의 함성이 강의실을 흔들었다.
강우와 최대우도 자연스럽게 따라 하면서 응원 열기에 휩싸였다.
양측이 마주 보면서 테이블 하나씩을 점유하고 나란히 앉았다.
“자, 그럼 첫 번째 문제다!”
홍준영이 문제가 적힌 시험지를 양쪽에 하나씩 돌리고 강의실의 모니터 화면에 문제를 띄웠다. 덕분에 강우도 바로 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퀴즈 문제는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는 어렵지 않았다. 고등학교 과정을 살짝 벗어나는 고난도 문제로 올림피아드를 준비한 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풀 수준이다. 다만 더 빨리 풀어야 하기에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해법을 토론하던 각 팀 학생들이 정신없이 머리를 맞대고 풀기 시작했다.
대략 몇 분이 흐른 직후 고려고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라던 김창식이었다.
“28N!”
“정답! 고려 과학고 1승!”
홍준용이 흔쾌하게 김창식의 손을 들어주었고 관중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대우야, 저거 풀었어?”
“응, 별로 안 어렵잖아.”
스크린에 비친 문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최대우도 그 짧은 시간에 문제를 완벽하게 풀었나 보다.
강우의 눈은 자연스럽게 최대우가 끄적이던 낙서장을 훑었다. 역시 완벽하게 수식을 나열하여 정답까지 구해져 있었다.
최대우가 물리 문제풀이 센터를 운영한 지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각종 문제에 단련된 최대우의 능력은 지난 교내 경시대회에서도 드러났듯이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에 필적할 수준이다. 사실상 S급 재능이 서서히 개화한 상태다.
고려 과학고가 먼저 1승을 올리자 중앙고에서 분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중앙고의 한 학생이 문의했다.
“계산기 사용해도 됩니까?”
“물론 된다.”
물리 문제는 복잡한 함수와 계산이 얽히는 경우가 있어서 이공계용 계산기가 필수다. 학생들이 휴대폰에 이공계 계산기 모드를 올렸다.
“자, 그럼 두 번째 문제!”
강우도 모니터에 집중해서 두 번째 문제를 풀었다. 역시 첫 번째 문제와 비슷한 수준이다. 굴절률이 주어진 광섬유 내에서 빛의 경로와 상의 배율을 구하는 문제다. 강우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수식을 전개하면서 해답을 찾아 나갔다.
최대우의 손도 낙서장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1”
남동훈이 손을 들고 먼저 해답을 외쳤다.
“정답! 중앙 과학고 1승!”
홍준용의 선언에 이번에는 중앙고 응원단의 함성이 일었다.
이어서 계속 문제가 출제됐고 그때마다 중앙고의 주장격인 남동훈이 손을 들었다. 강우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중앙고에서는 문제의 절반 이상을 남동훈이 주도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과연 S급의 물리 재능을 가진 학생다웠다.
순식간에 주도권이 중앙고로 넘어갔다.
현재 스코어는 1 대 3. 중앙고의 압승이고 한 문제만 중앙고가 더 이기면 물리 퀴즈는 중앙고의 승리였다.
고려 과학고의 암운이 짙어졌다.
관전하던 학생들의 실망한 한숨과 출전 선수 진영의 암울한 기운이 어우러졌다.
“젠장! 우리가 먼저 할 수 있었는데!”
김창식이 아쉬움을 삼켰고 박호재는 더듬거리면서 의견을 꺼냈다.
“우리가 한 명 부족해서 그런 것 아냐?”
“하! 그 자식이 하필이면 오늘 결석해서…….”
“이참에 한 명 더 뽑자.”
김창식이 박호재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중이떠중이 한 명 더 넣는다고 역전되겠냐? 그냥 우리끼리 계속하는 게 더 낫지.”
실제로 그 한 명이 아주 뛰어나지 않다면 도움이 될 리 없다. 이론물리부에서 국내 올림피아드 2차 경시를 통과하고도 출전하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 즉 마땅한 선수가 없는 형국이다.
“뒤로 갈수록 문제가 어렵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넣어봐야 소용없다고.”
자중지란이 이는 가운데 옆에 있던 한 녀석이 관중석을 가리켰다.
“저 녀석 넣으면…….”
김창식과 박호재의 시선이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두 사람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곳에 그날 그들과 한판 붙었던 일학년 두 녀석이 구경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날 이후 꿈에서 저 두 녀석의 얼굴을 만날 정도로 쇼크가 심했었다.
“으으, 저 녀석만은…….”
고개를 저으면서 김창식은 다른 멤버의 의견을 구했다.
이대로 패배할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을 더 넣어 마지막 역전을 노려볼 것인가.
강우만은 절대 출전 멤버에 넣을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 김창식은 불안한 마음으로 관중석을 쳐다봤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관중석의 1학년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강우가 왜 빠졌지?”
“강우? 물리 올림피아드 안 나갔잖아? 교내 경시에도 물리는 안 했고.”
“그래도 물리에서 최강 아니야? 강우가 나갔으면 벌써 이겼을걸?”
출전 선수 명단을 놓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박호재는 점점 불안해졌다.
“창식아, 자칫 우리가 모두 덤터기 쓸 분위기인데?”
“애초에 물리실험반 학생이 주축으로 나가기로 했잖아? 저 자식들은 물리실험반도 이론물리부도 아니거든. 뭘 믿고…….”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게…….”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렸다.
기다리던 홍준용이 다시 물었다.
“고려 과학고는 계속 네 사람으로 할 건가?”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한 사람 더! 한 사람 더!”
작은 목소리가 급기야 모두의 의견으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이 김창식이 강우 쪽을 가리켰다.
“강우! 나와라!”
그럴 줄 알았다. 고려 과학고의 승리를 위해 못 나갈 그가 아니지만, 지금은 그보다 최대우가 더 낫다.
“대우가 교내 경시에서 우수상을 탔는데요?”
김창식은 그날 강우 옆에서 도와주던 최대우를 떠올렸다. 몸집이 워낙 인상적이라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정작 최대우가 깜짝 놀라 강우를 쳐다봤다.
“내가?”
“너라도 충분할 거야.”
어물쩍대는 최대우의 등을 강우가 밀었다.
강우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최대우이기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앞으로 나갔다.
강우가 아니어서 살짝 감정이 상했으나 사면초가에 몰린 물리 팀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최대우가 합류하자 고려 과학고도 5명이 됐다.
“자, 5번째 문제 나갑니다. 중앙고에서 풀면 게임은 끝납니다.”
이어서 문제지가 전달되고 스크린에 문제가 떴다.
계산량이 많아진 이번 문제는 지난 문제와 비교해서 난이도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장내는 긴장이 감돌고 각 학교 선수들은 문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간 남동훈이 손을 들었다.
“0.72A”
고려고 관중석에서 탄식이 일었다. 정답이면 게임이 끝이다.
“아닙니다.”
“아!”
이번에는 중앙고 학생들의 한숨이 새어 나오고 양측 선수들이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때 최대우가 손을 들었다.
“0.71A”
“정답!”
“아아! 계산 실수 때문에…….”
안도하는 고려고 학생들의 시선이 최대우에게 모였다. 한 명을 추가해서 어쨌든 효과를 봤다.
“여섯 번째 문제부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번 문제는…….”
스크린에 여섯 번째 문제가 뜬 순간 강우는 눈을 비볐다. 예상치 못하던 익숙한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이 문제는 최대우가 운영하는 물리 문제풀이 센터에 떴던 문제다. 고등학교 과정을 완전히 벗어난 물리 전공자 문제여서 강우도 눈을 찌푸렸던. 그래서 최대우가 답하지 않고 강우가 대신 풀어서 올렸던 문제다.
만일 최대우가 그 문제를 다시 공부했다면 지금 풀 수 있을 테지만 강우가 올린 것으로 끝냈다면 절대 풀 수 없다.
너무 어려웠던 때문일까.
양측 출전 선수들이 반 패닉에 빠져 전전긍긍했다. 반면 출제자인 홍준용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문제에 비해 시간이 배로 소요됐다.
강우가 보기에 제대로 문제를 푸는 녀석은 없었다. 모두 준비만 완료한 상태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나마 남동훈은 나았다. 뭔가 계속 연필로 긁적이고 있다.
최대우를 확인한 강우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녀석! 풀 줄 아는구나.’
강우가 올렸던 해답을 놓고 공부했던 모양이다.
한참 후에 최대우가 손을 들고 해답을 외쳤다. 숫자가 아닌 간략한 수식이었다.
“정답! 놀랍군요!”
홍준용이 감탄을 연발했다.
이로써 3 대 3. 동점이 됐다.
“아자, 아자! 고곽 파이팅!”
출전 선수들이 함성을 외쳤고 응원석도 덩달아 시끄러워졌다.
마지막 문제.
이번에도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출제됐다. 강우도 최대우도 처음 보는 문제다.
강우는 최대우가 두고 간 낙서장에 연필로 수식을 적으며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출전 선수들의 태도는 앞 문제와 비슷했다. 어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는 학생이 절반이고 남동훈과 김창식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최대우도 고민에 잠겨 수식을 적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이 수준이면…… 대우도 가능성이 있어.”
강우는 그동안 착실하게 블로그를 운영한 최대우의 잠재력을 믿었다. 수많은 문제를 다루어 보았고 그 재능 또한 최상이니 운이 따른다면 풀 수 있을 것이다.
답이 나왔다.
강우는 이 문제가 어떻게 출제됐는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대학 교재에 나온 문제를 조금 바꾸어 변형한 것이다.
그는 시선을 최대우에게 고정했다. 만일 최대우가 이 문제를 풀면 고려고는 대역전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게다가 그 주역이 바로 최대우다. 무려 마지막 세 문제를 혼자서 연속으로 푸는 거니까.
그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마침내 최대우가 먼저 손을 들었다.
“드브로이파 파장은…… 1.1 곱하기 10의 마이너스 10승 미터입니다.”
“정답!”
“와아!”
영웅이 탄생했다.
강의실이 떠나갈 듯 함성이 일었다. 놀랍게도 최대우를 투입한 후 모든 판을 이겨서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관중석의 학생들이 몰려들어 최대우를 헹가래 쳤다.
“끄악!”
순간 최대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학생들이 깔리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남동훈이 다가와 축하했고 그 뒤로 김창식과 박호재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짓고 있었다.
* * *
수학강의실에서는 고려고와 중앙고 학생들이 대기 중이었다.
마침 들려온 물리 퀴즈 참사에 중앙고의 사기는 팍 꺾였고 고려고의 사기는 올라갔다.
“아자! 아자! 중앙고를 물리치자!”
흥분한 고려고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수학 퀴즈는 물리 퀴즈와 방식이 달랐다.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뤄 출전하는 방식은 동일하지만 일대일 대결로 진행하고 이긴 자가 계속 시합하는 방식이다. 상대 팀의 선수가 남지 않을 때까지 이기면 끝이 난다.
물리 퀴즈를 관전했던 학생들이 수학 퀴즈로 몰려들면서 강의실은 매우 시끄러워졌다.
그 무리에 강우와 최대우가 있었다.
최대우는 친구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대우는 사실상 2관왕이었다. 천체관측 대회와 물리 퀴즈 대회. 두 대회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자!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아라.”
보다 못한 심판관, 정명욱이 경고했다. 그의 벗은 대머리가 위압감을 주어 학생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출전 선수 가운데 강우의 눈에 익은 학생이 몇 있었다. 2학년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인 박일현과 손차희, 이민찬이다. 손차희와 이민찬은 수학경시대회 우수상을 탔고 수학연구반 학생이기에 이 게임에 대표로 출전했다.
반면 중앙고 학생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