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23화 (123/325)

제123화 고중전 (4)

경기 방식을 설명한 정명욱과 중앙고 선생님 한 분이 시합 개시를 알렸다.

양쪽 진영에서 한 명씩 앞으로 나가서 칠판 앞에 섰다.

순간 학생들 사이에 경악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방식의 경기에서는 출전 순서가 대단히 중요하다. 첫 출전 선수는 상대의 기를 꺾어야 하기에 잘하는 사람이 출전한다. 또 마지막 주자는 보통 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의 몫이다. 최후의 보루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고려 과학고는 그런 일반적인 패턴을 따랐다. 팀에서 수학을 가장 잘하는 박일현이 마지막 주자였고, 두 번째로 잘하는 학생이 첫 번째 주자였다.

비록 국가대표 상비군인 권유성이 빠지긴 했지만, 출전 선수의 면면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주장인 박일현은 이대로라면 오늘 중앙고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첫 주자로 나온 상대 팀 선수가 황당했다.

“안찬엽! 저 자식이…….”

박일현이 신음을 내뱉었다.

안찬엽은 중앙 과학고의 에이스다. 지난여름에 박일현과 국가대표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올림피아드에서 함께 금메달을 땄었다. 사실 오늘 경기는 박일현과 안찬엽의 승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강자이니까 당연히 가장 마지막에 출전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가장 처음에 나왔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중앙고 선생님이 정명욱에게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리는 올킬을 노립니다. 이기려면 압도적으로 이겨야죠.”

안찬엽으로 다섯 명을 내리 이겨버리겠다는 뜻이다. 상대를 완전히 박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론 그 작전이 먹히지 않으면 도리어 역으로 당할 수 있지만, 첫 경기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기에 사기가 올라 승리 확률이 낮지 않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출전한 모든 학생에게 경험을 줘야…….”

“승부가 먼저죠.”

중앙고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웅성대는 소음에 강우도 사태를 알아챘다.

“안찬엽이라고?”

물론 그는 그 학생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안찬엽을 떠올리는 순간 출전한 중앙고 학생의 머리에 찬란한 S자가 새겨졌다.

- 안찬엽, 수학 S, 물리 B, 화학 B, 생물 B, 지구과학 B.

수학에 특화된 학생이었다. 역시 금메달리스트다운 재능이었다.

“대단하네.”

“뭐가?”

최대우의 물음에 강우는 딱히 설명할 수 없어 웃음으로 답했다.

소란이 가라앉자 정명욱이 시합 개시를 선언했다.

“두 사람의 승부를 관전하면서 여러분도 함께 풀어보기 바랍니다.”

학생들을 위해 백지와 볼펜을 나눠줬다.

첫 번째 문제가 떴다.

- 파르스발 정리 증명.

기를 죽이려는 듯 첫 문제부터 복잡한 적분 수식 전개 문제가 나왔다.

사인함수와 코사인함수를 이용하면 주기함수를 푸리에 급수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 오일러 공식을 도입한 후 복소 푸리에 급수를 활용하여 급수의 합을 구하는 식을 파르스발 정리라 한다. 이 정리를 증명하는 문제가 나왔다.

당연히 고등학교 과정을 아득히 벗어난 난해한 문제다.

문제를 접한 고려 과학고 선수는 입만 쩍 벌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중앙 과학고 안찬엽은 그런 상대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비웃다가 분필을 들었다.

탁- 탁- 탁-

칠판에 부딪히는 분필 소음이 이어지고 그때마다 수식이 계속 늘어났다.

관전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문제를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 들어보는 적분 문제였기 때문이다.

“강우야, 저 문제 알아?”

강우는 안면을 굳히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에 급수는 이공계 학생이라면 모를 수 없다. 전공 공부에서 수없이 마주치니까. 다만 파르스발 정리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간 지엽적인 문제다. 강우도 처음 보는 수식이었다.

하지만 중간까지 수식을 이해한 강우가 추가로 수식을 전개하여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소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풀 수는 있다.

그런데 상대 팀 안찬엽은 거침이 없다. 하필 공부했던 문제일지라도 대단한 실력자임이 확실했다.

고려 과학고 출전자가 불과 한 줄도 채 적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안찬엽은 이미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웅성대는 소음 속에서 정명욱과 중앙고 선생님이 증명한 수식을 검사했다. 중간에 풀이가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긴 했으나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틀린 부분이 있었다면 답이 나오지 않았을 거니까.

“정답입니다! 안찬엽 1승!”

승부가 가려지고 낙심한 고려 과학고 선수가 교단을 내려왔다.

안찬엽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드리우고 박일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언제 올라오냐고 도발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고려 과학고 출전 선수들은 과하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안찬엽과 압도적인 실력 차를 실감한 것이다.

“다음 선수?”

정명욱의 외침에 손차희가 주섬주섬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기가 죽어 있었다.

“자, 다음 문제를 드립니다.”

두 번째 문제가 떴다.

- 실력이 똑같은 두 사람이 게임을 하여 6번 먼저 이기는 사람이 상금을 모두 가져가기로 했다. 그런데 A가 4회, B가 3회 이겼을 때 게임이 중단됐다. 상금을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단순하면서도 함정이 숨은 문제였다.

칠판 앞에서 손차희는 문제를 노려보며 천천히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 확률을 계산했다.

문제를 본 강우는 출제 소스를 기억해냈다. 15세기 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친구 파치오리가 쓴 책에 나오는 문제다. 확률을 공부한 학생이라면 한 번쯤 풀어봤을 내용이다.

아마 손차희도 풀어봤겠지. 하지만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더구나 지금은 시합이라 빨리 풀어야 한다.

손차희가 절반을 풀기도 전에 안찬엽이 분필을 놓았다.

“11:5입니다.”

“정답입니다. 안찬엽 2승!”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강우야, 4:3 아냐?”

“4:3이면 문제로 출제하겠니?”

강우는 한방에 최대우를 제압하고 손차희를 염려했다. 그녀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상대가 금메달리스트이니 어쩌면 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밀렸다.

풀이 죽은 손차희가 자리로 돌아오고 안찬엽은 주먹을 쥐고 포효했다.

다음 출전자는 이민찬.

이민찬의 안색도 다르지 않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찬엽은 이민찬을 쳐다보지도 않고 박일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세 번째 문제가 출제됐다.

이번에는 기하 문제.

이민찬이 보조선 2개를 그었을 때 안찬엽은 이미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정답입니다. 안찬엽 3승!”

이제 고려 과학고에서는 남은 선수가 두 사람이 전부였다.

“이야! 올킬이 보인다!”

“안찬엽 만세다!”

중앙고 학생들이 흥분해서 술렁였다. 과학고에서 중요한 과목은 수학과 물리이고 그중에서도 학생들은 수학을 최고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수학 대결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으니 학생들이 들뜨지 않을 수 없다.

강우가 볼 때 안찬엽은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비상한 학생이었다. 수학에 특별한 재능도 있고. 거기에 올림피아드를 대비하느라 수많은 문제를 풀어본 경험마저 뒷받침하니 이 경기에서 쉽게 질 학생이 아니었다.

관중석의 동요는 곧바로 선수들에게 전달됐다.

중앙고 선수들은 축제 분위기였고 고려고 학생들은 침울 그 자체였다.

박일현의 심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안찬엽이 1학년 학생 둘을 이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실력도 우세하고 흐름이 이미 그쪽으로 확 쏠려 있었으니까. 그렇게 보면 승부는 첫 경기에서 이미 결정 난 것일지도 모른다.

첫 출전자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밀릴 학생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안찬엽이라는 끝판왕이 나오는 바람에 지나치게 긴장해서 제 실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탓이 크다. 덕분에 이처럼 위기에 몰렸다.

박일현은 네 번째 출전 선수를 돌아봤다.

수학연구반에서 학술부장을 맡은 학생. 수학연구반은 그와 첫 출전자, 그리고 이 학술부장의 삼두체제다. 그만큼 실력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녀석의 안색 역시 하얗게 질려 있다. 패배를 두려워하고 있고 이길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상대에게 치욕의 올킬을 허용하게 된다.

고중전 역사상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적이 있었던가? 선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오늘 참사는 훗날까지 두고두고 굴욕의 역사로 남을 게 뻔했다.

‘해결책은…….’

가장 쉬운 방법은 그가 안찬엽을 꺾으면 된다. 안찬엽은 국가대표 시절에 함께 학습하면서 서로 잘 아는 사이다. 평상시라면 승률은 반반이었다.

다만 지금 분위기라면, 안찬엽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고 그는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상황이어서 승리보다 패배 가능성이 더 크다. 더구나 마지막 주자로 그가 나섰을 때는 올킬의 치욕을 고민하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박일현은 관중석을 돌아봤다. 그의 눈이 번쩍 띄었다.

“고려고 네 번째 선수 나오세요!”

정명욱이 경기를 속개했다.

박일현은 앞으로 나가려는 학술부장을 붙잡았다.

“내가 간다!”

갑작스러운 순서 변경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학술부장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러잖아도 경기에 출전하기 싫은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고 싶었다.

박일현이 나가자 정명욱이 이채를 띄었다.

“네 순번이 확실해?”

“네, 제가 하겠습니다.”

좋은 선택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나 정명욱은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친선 수학 퀴즈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수를 정하고 작전도 짰으니까 선생님이 개입할 근거는 없다.

박일현을 본 안찬엽이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너라도 쉽지 않을걸?”

“내가 네 승리 행진을 끝내주지!”

박일현은 마음을 다지고 투지를 불태웠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의 대결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이자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 경기였다. 숨을 죽이는 긴장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중심이 같은 원과 타원이 그려진 극한 문제가 제시됐다. 원 위를 움직이는 점 P와 타원 위를 움직이는 점 Q, 원점 O가 그리는 삼각형 면적의 극한을 묻는 문제다.

고등학교 과정에 속한 문제이지만 계산이 상당히 복잡하다. 적어도 10여 분은 수식을 전개해야 한다.

박일현과 안찬엽은 거의 동시에 분필을 들고 칠판 앞에서 고민했다.

잠시 후 그들은 풀이 수식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관전하는 학생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고려 과학고로서는 사실상 마지막 승부였다. 남은 한 학생은 안찬엽에 비하면 너무 부족했으니까.

“강우야, 이길 것 같냐?”

“아니.”

강우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왜? 비슷한데?”

“평소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박일현 선배가 안찬엽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

역시 박일현은 문제를 풀면서도 안찬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풀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 잠시의 머뭇거림이 사고의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본인은 느끼지 못할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조금의 차이는 점점 누적되기 마련이다.

칠판이 두 사람이 푼 수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 차이를 점점 명확하게 알아챘다. 안찬엽이 조금 더 빨랐다.

“풀었습니다. k-1입니다.”

안찬엽이 먼저 정답을 말했고 그 순간 박일현의 손에서 분필이 뚝 떨어졌다. 대략 10초 후였다면 박일현도 답을 구했을 것이다.

“으아…….”

낙담한 고려고 학생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남은 주자는 단 한 명. 믿을 수 없는, 올킬의 치욕이 눈앞에 다가왔다.

마지막 주자인 학술부장은 나가기도 전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오던 박일현이 학술부장의 어깨를 붙잡았다.

박일현이 비장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출전했으면 하는데…….”

“누, 누구를?”

“강우!”

박일현이 관중석의 강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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