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영웅의 탄생 (1)
강우는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나?”
강우는 자신을 가리키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학생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수학연구반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중앙 과학고 학생들은 누군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사전에 출전 선수를 제출하는 대회는 아니어서 선수 교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갑작스러운 교체는 모두를 황당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박일현이 그에게 다가왔다.
“강우야, 아무래도 네가 나서야겠다. 이대로면 우리 고려 과학고의 치욕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서서 막아라!”
“제가요?”
“너라면 충분하지. 내가 아는 강우라면 절대 저 녀석에게 지지 않을 거다.”
어떻게 그런 확신이 가능한지 몰라도 강우는 황당 그 자체였다. 고중전을 단지 즐기려고 왔다가 졸지에 출전하게 생겼다.
손차희가 그를 응원했다.
“강우야! 복수전 해야지!”
자신의 패배를 복수해달라는 뜻이다.
강우는 주변 학생들의 압력을 실감했다. 고려고 학생은 모두 그에게 기대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강우는 중앙고에 지고 싶지 않다는 학생들의 열망을 읽었다.
안찬엽이 강자라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두려움은 없다.
“교내 수학 경시 일등이 출전하지 않으면 누가 나가?”
박일현이 그를 일으켰다.
‘선수 뽑을 때는 수학연구반에서 알아서 한다고 부르지도 않더니…….’
학생들의 눈빛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다. 엉거주춤 일어났더니 학술부장이라던 학생이 다가와서 손을 잡았다.
“부탁한다!”
그때 수학연구반의 일로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녀석인데 학교의 위기 앞에서 개인감정은 무의미하다.
강우는 앞으로 나가 정명욱 선생님에게 인사했다.
“드디어 에이스가 나오는군.”
정명욱의 환영에 옆에 있던 중앙고 선생님이 물었다.
“저 학생이 누군데?”
“우리 학교 교내 경시 1등.”
“일현이 아니고?”
“일현이가 밟혔지.”
“호오, 그래?”
중앙고 선생님이 관심이 높아진 듯 강우를 주의 깊게 살폈다.
다섯 명 출전 선수 가운데 마지막 주자. 그가 지면 바로 패배가 결정되는 상황. 승리하려면 상대방 선수 다섯을 연달아 이겨야 한다. 즉 역올킬이 가능한, 최악의 순간이자 최고의 순간이다.
지금 고려고 학생들은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았다. 단지 올킬의 수모만은 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난 안찬엽. 국가대표이자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 넌?”
안찬엽이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녀석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넘쳐났다.
“난 강우. KMO 1차 탈락했다.”
강우의 소개에 안찬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지막 주자를 바꾼다길래 특별한 녀석이 나올 줄 알았더니 1차도 떨어진 녀석이다.
지금 안찬엽 실력이라면 KMO 1차 시험은 발로 풀어도 통과할 수 있었다.
“고곽은 완전히 포기했구나?”
“아니, 상대 수준에 맞춰서 내보낸 거야.”
어차피 질 것 같아 실력 없는 자신이 나왔다는 뜻인지 아니면 상대 실력이 변변찮아 나왔다는 뜻인지 혼란스러운 대답이었기에 안찬엽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반갑다. 승부를 가려보자!”
“굿 게임!”
마치 게임을 치르듯 대답한 강우는 칠판 앞에서 숨을 골랐다.
문제가 어려우면 지지 않는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문제이거나 스피드 게임식의 단순한 문제라면 문제를 많이 풀어본 안찬엽이 유리하다.
과연 어떤 문제가 나올 것인가?
정명욱이 강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우? 자신 있나?”
“없습니다.”
“응?”
“질 자신이 없습니다!”
“푸하하!”
강우의 실없는 소리에 웃음바다가 된 관중을 정리한 정명욱이 마침내 문제를 꺼냈다.
“문제를 내겠습니다.”
문제지를 받아든 강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 다음 르장드르 함수의 일반 해를 구하시오.
강우가 가장 자신 있는 미분 방정식 문제가 나왔다. 그것도 잘 아는 문제다. 르장드르 함수라면 공업수학 과목에서 수도 없이 풀어봤다.
19세기 초, 오일러의 제자였던 프랑스 수학자 르장드르는 미적분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손강우는 대학을 다니면서 이 함수를 수도 없이 공부했고 훗날 조교가 되어 강의를 직접 맡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눈을 감고도 풀 수 있다.
수식이 워낙 복잡해서 처음 보는 사람은 갈피를 잡기 어렵지만 문제의 핵심을 잡고 나면 의외로 단순하다.
강우는 안찬엽을 슬쩍 살폈다.
녀석이 문제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한두 번 본 적은 있겠지만 요즘 올림피아드에서는 이런 형태의 미적분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안찬엽의 표정이 바로 이해된다.
이 문제는 정통 수학이라기보다 미적분이 주가 되는 공대의 응용 수학이니까. 무려 지금부터 2백 년 전에 유행했던, 사실상 연구가 끝난 수학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수학이 미적분 위주가 아니었다면 이런 문제가 출제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안찬엽의 표정에서 여유가 생긴 강우는 관람석을 훑었다.
그에게 출전을 부탁한 박일현과 출전을 포기한 학술부장 녀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손차희와 최대우까지.
강우는 씨익 웃음을 날렸다.
그 의미를 이해한 손차희와 최대우의 얼굴에서 긴장이 싹 사라졌다. 반면 박일현과 학술부장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안색이 한결 어두워졌다.
강우가 풀지 않고 관중석을 쳐다보자 관중도 난리가 났다. 대부분 강우가 풀지 못하여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야! 망했구나! 승리를 확신한 중앙고 학생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이제 저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낼 때가 왔다.
강우는 느릿하게 분필을 손에 쥐고 수식을 쓰기 시작했다.
해를 급수 형태로 정의한 다음 주어진 미분 방정식에 대입했다. 다음에 복잡한 풀이 전개가 이어졌다.
탁- 탁-
요란한 분필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칠판 가득 수식이 존재를 드러냈다.
그 무렵 안찬엽도 그 소리를 들었다.
아직 그는 고민하는 상태. 예전에 얼핏 공부한 적이 있지만 어떻게 풀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옆에서 문제를 쭉쭉 풀어가고 있으니 더 조급해졌다.
이전과 완전히 바뀐 상황이 되자 안찬엽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는 사고를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상 포기한 안찬엽은 강우가 푸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장면에서 관중들은 누가 이겼는지 이미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침내 강우는 주어진 방정식의 해를 나열했다. 방정식의 해는 고등학생에게는 익숙지 않은 급수 형태로 주어졌다.
“끝났습니다.”
검산할 필요도 없었다. 정명욱이 바로 풀이가 정확했다고 선언했다.
“정답입니다. 강우 1승!”
중앙고의 에이스가 드디어 꺾였다. 고려고는 기사회생했다.
“와아!”
고려고 학생들의 함성이 귀를 찔렀다.
풀이 죽은 안찬엽이 어깨를 늘어트리고 돌아갔다.
강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관중을 쳐다봤다.
이제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계속 출전해서 중앙고를 상대로 문제를 풀어야 하나? 아니면 올킬을 막았으니 들어가야 하나?
선수를 바꿀 수는 없으니 그가 들어가면 고려고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들어갈 수도 없다.
“다음 선수 나오세요.”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중앙고에서 두 번째 선수가 나왔다.
- 5개의 문이 있다. 이 문 가운데 오직 한 개의 문 뒤에만 염소가 있다. 게임 참가자는 하나의 문을 열 수 있고 만일 염소가 있으면 상금으로 가져갈 수 있다. 참가자가 문을 선택했을 때 진행자는 선택한 그 문대신 염소가 없는 다른 하나의 문을 열고 보여준다. 이때 참가자가 선택한 문을 고수하는 경우와 다른 문으로 바꾸는 경우 염소를 탈 확률을 구하시오.
이 문제는 몬티 홀 딜레마라고 알려진 흔한 문제다. 다만 원래의 몬티 홀 문제는 문이 3개인데 여기에서는 5개여서 더 복잡하다.
중앙고 학생도 문이 3개인 경우는 풀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에서는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풀어야 한다. 녀석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분필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미 강우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강우는 느긋하게 답을 적었다.
“확률은 1/5, 4/15. 바꾸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정답입니다. 강우 2승!”
중앙고 학생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제 중앙고 학생의 눈에는 강우가 괴물로 보였다. 사실상 강우를 이길 자는 남지 않았기에 의기소침해졌다. 실력 차이가 월등한 수학에서는 운에 기대기도 어려웠다.
이어서 나온 세 학생을 강우는 연달아 격파했다.
역올킬!
위기에 처한 고려고의 마지막 주자로 나와 적군을 모두 섬멸해버린 것이다.
고려고가 받을 뻔했던 굴욕의 역사는 위대한 영광의 역사로 바뀌었다. 중앙고도 고려고를 상대로 넷이나 무찔렀으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다만 아쉽게도 마지막 주자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을 뿐.
“와아!”
“강우! 강우! 강우!”
“올킬! 올킬! 올킬!”
“진작 알아봤어! 강우 저 자식 물건이야!”
“고곽을 살린 강우!”
“강우가 누구지?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야?”
“1학년 말썽꾸러기!”
그를 환호하는 별별 소리가 들려왔다.
강우는 자신에게 달려온 최대우, 손차희를 부둥켜안았다. 예상치 않은 감격이 그에게도 밀려왔다. 군중의 환호를 받자 기분이 들떴다.
박일현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수고했어. 덕분에 체면을 세웠다.”
“뭘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강우는 박일현에게 미소로 답했다.
오늘처럼 주역으로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비정상인 자신이 학생들의 경쟁에 뛰어들면 열심인 학생에게 미안했었다. 그래서 내신 시험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OX 퀴즈와 수학 퀴즈에서 연달아 주목을 받고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오늘 패배한 학생에게 좋은 자극이 될지도 모르기에 그의 승리를 꼭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그가 박일현과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중앙고의 안찬엽이 다가왔다.
“강우라고? 잘 하더라.”
안찬엽이 손을 내밀었다.
강우도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선배도 대단하더군요. 금메달리스트다웠습니다.”
“너 같은 실력자가 어떻게 KMO 1차에서 떨어졌어?”
“그날 사정이 있어서 시험을 못 쳤거든요.”
“아! 아쉽네.”
안찬엽의 표정에는 앞으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함께하지 못한다는 진한 아쉬움이 깔려있었다.
옆에서 박일현이 끼어들었다.
“아쉬워할 필요 없어. 이 녀석은 특별 추천 케이스로 들어올 테니까. 아마 내년 여름에 국가대표로 발탁될 거야.”
“그럼 또 보겠네. 그때는 내가 이길 거다.”
안찬엽이 의욕을 드러냈다.
아직 한참 뒤의 일이기에 강우는 별도로 반응하지 않았다. 국가대표가 되면 좋겠지만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다.
“다음에는 제가 많이 배우겠습니다.”
강우는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몸을 돌렸다.
“수아는 어떻게 됐어?”
윤수아는 해커 대회에 나갔다.
“아직 진행 중일걸?”
“얼른 구경 가야겠네.”
최대우, 손차희와 함께 강의실을 나왔을 때 갑자기 생각난 듯 손차희가 물었다.
“강우야, 특별 퀴즈 풀었어?”
천문대 돔의 높이를 적어내는 문제다.
“아!”
여기저기 대회를 구경하다 보니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다.
“넌?”
“난 했지.”
손차희도 최대우도 어떻게든 대충 답을 작성한 모양이다.
“너희 먼저 수아한테 가 있어. 난 잠시 들릴 데가 있어!”
강우는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내버려 두고 급히 복도를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