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영웅의 탄생 (2)
분주하던 과학고 대항전이 모두 끝났다.
체육대회와 퀴즈를 포함해서 여러 종목을 개최했고 학생들은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 했다.
한 종목이 끝날 때마다 우승자가 탄생했다. 학생들은 그 우승자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모든 종목이 끝나고 학생들은 운동장에 다시 모였다.
평소 찌들었던 얼굴과 달리 지금은 환한, 상기된 표정이다. 이런 식으로 가끔 한 번씩 운동장에서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강우는 다시 고곽천재 친구들과 1학년 3반 줄에 서서 잡담을 나눴다.
축구는 중앙고가 가져갔고 계주는 고려고가 이겼다. 다른 종목들도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특별히 학생들의 관심을 끈 종목은 과학고답게 수학과 물리 퀴즈였다.
이 두 퀴즈에서 모두 고려고가 승리했다.
그 경기 소식은 뒤늦게 학생들을 달궜다. 강우와 최대우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늘 대회에서 윤수아는 입상하지 못했다. 손차희는 비록 수학 퀴즈 우승팀 멤버이긴 했으나 별달리 기여하지 못했다.
반면 최대우는 천체관측대회와 물리 퀴즈를 거머쥐었고 강우는 수학 퀴즈에서 사실상 홀로 활약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군중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모였다.
강우야 예전부터 엉뚱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최대우는 달랐다. 대부분 최대우를 먹을 것을 밝히는, 인심 좋은 녀석 정도로 여겼는데 이번 대회를 계기로 시선이 달라졌다.
“학생 여러분!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고려고 백두섭 교장이 단상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상품을 수여했다. 우승팀에게는 도서상품권이 주어졌다. 적은 금액이지만 학생들은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몇 장이야?”
한 장도 받지 못한 윤수아가 남의 도서상품권에 눈독을 들였다.
“난 1장.”
손차희는 수학 우승팀 멤버로서 받았다. 최대우는 2장이다. 하나는 금액이 큰 것, 하나는 작은 것이다. 금액 큰 상품권은 천체관측 대회 최우수선수였기 때문이다.
“난 두 장.”
“나도.”
강우도 두 장을 받았다. 큰 것은 OX 퀴즈 우승으로 받은 것이다. 올킬의 위업을 달성한 수학은 다른 멤버와 같이 적은 금액을 받았다.
“한 장 나 줄래?”
강우는 금액 큰 것을 넘겼다. 눈이 동그래진 윤수아에게 미소로 대응했다.
이래저래 상품을 수여한 후 마지막 퀴즈가 남았다.
이번에는 중앙고의 과학 선생님이 올라왔다.
강우는 예전에 킨텍스에서 이 선생님을 본 기억이 있었다.
“아아, 여러분! 대략 전체의 절반이 특별 퀴즈에 응모했습니다. 이 가운데 어떤 학생은 매우 고심해서 특별한 방법을 생각해냈고 어떤 학생은 답만 쓰기도 했습니다. 정답에 가까운 응답도 있었으나 대부분 예상보다 오차가 컸습니다. 그런데…….”
특별 퀴즈 현황을 지루하게 설명했다.
흥미를 잃은 강우는 발을 툭툭 차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그때 옆에서 거들먹거리며 한 녀석이 찝쩍댔다. 고현성이었다.
“어이, 브라더!”
“응?”
“특별 퀴즈 풀었어?”
“응.”
“어떻게?”
“그냥 대충.”
성의 없이 대답하는 강우에게 고현성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크크, 그게 말이야, 이 형님은 낙하의 법칙을 사용했지. 5층 옥상에서 돌을 떨어트려서 휴대폰으로 낙하시간을 쟀거든? 그러니까 답이 딱 나오더라.”
전형적인 고전 물리 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피식 비웃어준 강우는 바로 질문했다.
“5층이야 그렇게 쟀다고 치고…… 5층 옥상에서 돔 높이는 어떻게 구했어?”
“그거야 돔은 반구 아니냐? 돔 지름을 재서 절반인 반지름으로 계산했지.”
“잘했네. 그럼 중력 가속도를 얼마로 계산했어?”
“9.8…….”
“9.80, 9.81, 9.82, 한 단계 바뀔 때마다 높이차가 꽤 날걸? 이 동네 중력 가속도가 얼만지 알아? 실험해봤으니 알겠지만, 오차가 의외로 크다?”
“아차!”
고현성이 뒤늦게 머리를 탁 치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손차희가 강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강우야, 넌 퀴즈 답 냈어?”
“응, 정답을 써냈지.”
“어? 정답인지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강우의 태도에 손차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강우의 속셈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럼 도서상품권 하나 더 받겠네?”
“그렇겠지? 그래서 방금 수아 하나 줬잖아.”
특별 퀴즈를 고민하는 강우를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온전히 믿기 어려웠다.
손차희는 윤수아와 함께 태양고도를 이용해서 천문대의 높이를 쟀다. 적어도 낙하법칙을 이용하거나 계단 수를 센 학생보다 정확하리라고 자부했다.
그 사이 선생님이 정답을 외쳤다.
“고려 과학고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천문대 돔 꼭대기입니다. 무려 5층 건물 옥상에 있어요. 망원경 아래에 지지대가 있어서 일반 옥상보다 더 높습니다. 정답은 22.431m입니다.”
“와아!”
“아깝다! 0.4나 빗나갔어.”
“난 완전히 틀렸네.”
여러 반응이 오갔다.
정작 강우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강우야? 넌 얼마 써냈어?”
“22.431.”
“헉! 귀, 귀신이다! 소수점 아래까지 일치하다니!”
옆에서 은근슬쩍 귀를 기울이던 고현성의 턱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확성이 말이 되지 않았다.
“강우야? 혹시 퀴즈 문제 미리 알았어?”
윤수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리 문제를 알았다고 해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때 단상에서 과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답을 정확하게 맞힌 학생이 있습니다. 강우 학생? 앞으로.”
정확하게 맞혔다는 말에 모두가 놀란 가운데 강우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과학 선생님이 마이크를 넘기며 물었다.
“강우 학생? 정확히 맞혔는데 특별한 비법이라도?”
“그런 게 있을 리 있나요? 끊임없이 사고하며 고민한 덕분이죠.”
“아! 한마디로 정리하면 머리를 잘 썼다…… 이런 뜻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맞혔는지 말해 보세요.”
“그게 말입니다.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방법이죠. 행정실에 가서 학교 건축 대장을 찾아봤거든요. 도면에 나와 있던데요?”
일순간 학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대부분 학생은 과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건물의 높이를 구하려고 머리를 싸맸다. 정작 강우는 도면을 이용했다. 제한 조건이 없었으니 틀린 방법은 아니었으나 학생들은 수긍할 수 없었다.
강우는 단상에서 학생들을 쭉 훑어보면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이 바로 사고의 유연성이다. 20세기 물리학자 보어는 대입에서 똑같은 유연성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고 훗날 양자역학의 기반을 닦았다.
강우는 보어의 일화를 알았기에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를 제외하고는 정답을 써낸 학생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고려고와 중앙고에는 보어 일화를 아는 학생도, 사고가 유연한 학생도 없었다.
세기의 천재 과학자, 보어에 육박하는 천재가 없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지만, 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 유명 과학자의 삶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 조금 슬펐다.
그만큼 학생들은 시험에 나오는 내용만 공부하느라 그 밖의 것에 관심을 쏟지 못한다.
“우우!”
어떤 학생은 야유를 보내고 어떤 학생은 재밌다며 깔깔 웃었다.
황새의 뜻을 뱁새가 어찌 알까? 어떤 학생은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분개할지 모르지만 그런 작은 부분에서 천재의 역량이 드러나는 법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방법을 따르는 것은 천재가 아닌 수재면 충분하다.
천재라면 모름지기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방식을 떠올리고 답을 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고의 유연성이자 응용력이고 창조성을 발휘하는 기반이다.
강우는 손을 휘휘 저으며 지지자들에게 답례했다. 환호성이 쏟아졌다.
“사실 이 방법이 출제자가 의도한 방법이었습니다. 맞힌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 선생님들은 무척 기쁩니다. 마찬가지로 도서상품권을 상품으로 마련했습니다.”
개인이 수상하는 OX 퀴즈와 특별 퀴즈 모두를 강우가 차지하는 쾌거였다.
윤수아에게 한 개를 줬음에도 다시 두 개가 됐다. 오늘 도서상품권을 세 개, 그것도 적은 금액 하나에, 많은 금액 상품권을 두 개 받은 학생은 강우가 유일했다.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과학고 대항전이 끝났다.
양쪽 학교에서는 서로 자기네가 이겼다고 우겼는데 강우가 대충 계산해본 바로는 고려고가 이긴 종목이 더 많았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스트레스를 날리며 하루 재밌게 놀고 도서상품권까지 챙겼으니.
끝나자마자 고곽천재는 학교 앞 떡볶이 가게로 직행했다. 물론 돈을 낼 전상철네 조도 함께였다.
* * *
중간고사 이후 주말에도 고곽천재는 세미나실을 점거했다.
과제연구로 수행 중인 고속전철 프로젝트 때문이다.
강우와 최대우는 어차피 집에 갈 일이 없어 상관없었으나 손차희와 윤수아는 집에 가는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열심히 참여해서 아이디어를 모으는 두 사람이 강우는 무척 고마웠다.
평소처럼 군것질거리를 잔뜩 쌓아두고 그들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의견을 교환했다.
기본적인 자료 정리는 끝났다. 이젠 이 자료를 보고서 양식에 맞게 정리해야 한다.
물론 손차희가 정리를 담당해서 다른 사람들은 할 일이 줄었다.
“기본 양식이…….”
“그때 카이스트에서 얻어온 연구 보고서 양식 있잖아?”
강우가 바로 도움을 줬고 손차희는 예전에 받아두었던 자료를 확인했다.
“정말 이렇게 각국 고속전철 기술 조사만 하면 중간보고서는 끝나는 거야?”
“카이스트의 요구는 그게 전부이지만 거기에서 끝내면 우리가 섭섭하지.”
“맞아, 뭔가 새로운 것을 추가해야…….”
“자료 조사 내용 중에 KTX에 도입 가능한 방식을 찾는 일이 핵심이야.”
세부적인 기술은 그들 수준에서 처리할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형상 저항을 줄이는 방법에 국한한다면 해볼 여지가 꽤 있다.
강우는 눈빛을 빛내는 조원에게 간략하게 힌트를 줬다.
“정말 핵심 기술은 공개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 힘들어. 다만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다른 분야가 있어. 즉 비행기야. 비행기가 저항을 줄이기 위해 형태를 어떻게 변경하고 표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연구해보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고속전철과 비행기를 접목하자는 강우의 의견에 모두가 눈을 반짝였다.
그 의견을 현실화하면 충분히 연구비에 걸맞은 적절한 결과를 도출해낼 것이다.
신이 난 조원들이 다시 자료 탐색에 몰두했다.
강우는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이미 생각해두고 있었다. 비행기, 그것도 전투기 표면을 처리한 방식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 표면 처리만으로도 난류 발생을 억제한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검증하고 이론적인 해석을 시도하면 된다. 마침 관련 논문을 찾았고 그 논문에서 추가된 이론을 해석할 방법도 염두에 뒀다.
이 연구는 그와 차도도의 연구논문으로 추진할 생각이다.
평소라면 테이블에 놓인 과자에 가장 먼저 손이 갔을 최대우가 오늘은 웬일인지 뜸했다. 그 덕분에 윤수아가 대부분 과자를 신나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최대우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심각하다.
“대우야? 문제 있어?”
“아니, 프로젝트는 상관없는데…… 블로그가…….”
그제야 강우는 최근 들어 블로그에 뜸했다고 자책했다. 다른 사람이 프로젝트에 정신이 없을 때 최대우는 블로그까지 열심히 챙기고 있었다.
최대우가 블로그 때문에 고민한다면 원인은 하나뿐이다. 또 그 이상한 어려운 질문이 들어왔겠지.
강우는 급히 블로그에 접속했다. 금방 최대우가 고민하고 있을 문제를 발견했다.
“이것도 일반물리학을 벗어난 난이도인데?”
“그렇지?”
심심할 때마다 고난도 문제를 툭툭 던져주는 이 질문자가 누구인지 도대체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