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연구 프로젝트 (2)
당연히 메뉴를 정할 권한은 강우에게 없었다.
그에게 물어봐야 설렁탕이나 콩나물국밥이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서 코다리찜을 먹은 그들은 학교 정문 앞으로 돌아와 가우스 카페를 찾았다.
“난 핫 아메리카노. 차 쌤은?”
“나도.”
“강우는?”
“핫초코요!”
신새벽이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요?”
“커피 안 마시니 아직 애다 싶어서.”
강우는 반박하려다 참았다.
그도 커피를 마시긴 했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에 있으니 이상하게도 커피보다 탄산이나 단 음료에 더 손이 간다. 왜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두 선생님이 보기에 그는 아직 어린 학생이 분명하니까. 그들 앞에서 정신연령 운운해봐야 씨도 안 먹힐 소리였다.
각자 음료를 들고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이름 때문일까. 이 카페에 올 때마다 강우는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다.
그는 맞은 편에 앉은 차도도와 신새벽을 관찰했다.
휴일이라 편한 캐주얼 차림인 그들은 시원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들과 같이 자리한 이 시간이 왠지 소중하게 느껴졌다.
“강우야, 넌 언제 그렇게 물리와 수학을 공부했어?”
신새벽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새삼스럽게 공부는…….”
“너 저번 고중전에서 올킬했다며? 그날 끝내줬다던데?”
신새벽이 수학 퀴즈 대회 소식을 들었나 보다.
“그야…… 상대가 허접해서…….”
“중앙고에도 국가대표가 있었다던데? 그거 올킬 쉬운 거 아냐. 지금까지 양쪽 다 올킬은 없었기도 하고.”
무려 다섯 문제를 연속으로 상대보다 압도적인 속도로 문제를 풀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강우는 KMO 1차 시험도 떨어졌고 상대방 팀에는 국가대표를 비롯해서 잘하는 학생이 총출동했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요?”
대충 대답하고 넘어가려니 신새벽이 바로 반응했다.
“그래? 국가대표도 네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나 보다? 대단한데?”
“그, 그게 아니라…….”
“괜찮아. OX 퀴즈와 특별 퀴즈를 동시에 한 학생이 상 탄 것도 처음이야. 물론 둘 다 운이 따라야 하는 대회지만……. 어쨌든 이번 일로 강우를 다시 봤어.”
신새벽이 생글생글 웃으며 연달아 강우를 칭찬했다.
야단보다 칭찬이 당연히 기분이 좋다. 강우는 우쭐한 마음에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공부했는데?”
“음, 그게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손강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말이 막힌다. 차도도 역시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다.
“그냥 중학교 때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봤어요.”
“학원은?”
“시골에 학원이 어딨어요. 만일 학원에 다녔다면 오히려 역효과 났을걸요?”
대충 얼버무리자 차도도가 지원 사격했다.
“강우가 엄청 똑똑해. 작년에 똑똑하다고 소문난 권유성과는 차원이 달라. 아마 고려 과학고 전체로 봐도 역대급이 아닐까……. 물론 엉뚱하기로.”
“그렇겠지? 화학이 아니어서 아쉽다.”
신새벽도 반박하지 않았다.
비록 화학에서 강우의 성적은 들쭉날쭉했지만, 그것이 강우의 본 실력이 아님을 그녀도 대충 짐작하기 때문이다.
초기에 원소주기율표도 모른다고 혼냈던 그녀도 이제는 강우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최근 들어 화학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일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강우라면 어련히 알아서 할 거라는 믿음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논문 때문에 그녀도 강우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진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계속 질문이 들어오자 부담스러워진 강우는 역공을 가했다.
“쌤은 어쩌다가 대학원에 가셨어요?”
“나? 원래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었어. 사실 선생님은 내 꿈이 아니었는데…… 집안에서 여자는 학교 선생님이 낫다고 해서 멋모르고 사범대학에 입학했어. 대학 들어가서 후회해도 어쩔 도리가 없더라. 그래서 선생님이 되자마자 대학원을 알아봤어.”
신새벽도 차도도처럼 고민이 많았었나 보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석사과정을 밟고 있으니 마치고 나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화학교육과도 대학원이 활발해요?”
“화학과만큼은 아니야. 난 화학과 수업을 꽤 많이 들었거든. 사실 이번에…….”
신새벽이 주절주절 말하다가 눈치를 보며 말을 끊었다.
“이번에 왜요?”
“으응, 애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논문과 관련해서 사건이 있는 눈치다. 강우는 차도도에게 눈치를 줬다.
그 심정을 이해한 차도도가 대화를 유도했다.
“말해봐, 뭔데?”
“논문 주제가 솔직히 좀 어렵잖아? 그래서 담당 지도교수가 물리화학 전공 화학과 교수님을 연결해주셨거든.”
“그런데?”
“작년에 그 교수님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 교수님이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서…….”
신새벽의 나이는 평범한 석사과정 학생과 같지만, 직장인이기에 다른 학생과 다른 처지다.
“연세가?”
“삼십 대 초반? 엄청 젊어. 작년에 조교수로 부임했으니까.”
“오올! 잘 생겼어?”
차도도가 놀리듯 질문을 던졌다.
신새벽이 바로 손사래 쳤다.
“외모가 문제가 아니야. 성격이 쓰레기라 문제지.”
수업을 듣던 시절, 처음에는 신새벽도 고분고분 대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교수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신새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때부터 그 교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대충 괘씸죄에 걸린 기분이었으나 신새벽은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당연히 성적도 예상보다 나빴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논문 주제와 그 화학과 조교수의 전공이 유사해서 다시 연결됐다.
지도교수의 명으로 논문 상담을 하러 갔을 때 그 조교수가 노골적으로 다시 데이트를 요구했다.
신새벽은 대충 얼버무리고 물러났다.
“아마 그 조교수는 자신이 아니면 내가 학위를 받지 못한다고 확신하나 봐. 앞으로도 사사건건 걸고넘어질 텐데…… 골치 아프게 됐어.”
“학과는 다르잖아?”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지. 아니면 졸업 못 하지.”
교수와 대학원생의 알력은 흔히 있는 일이다. 교수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된 것도 한 원인이다.
오랜 기간 대학원생 생활을 했고 교수도 되어본 강우는 당연히 무슨 일인지 눈치챘다.
아직은 별일 아니라지만 어쩌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다.
차도도가 신새벽을 달랬다.
“신경 쓰지 마. 설사 그 조교수가 방해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잖아? 지도교수도 아니고, 논문지도를 받을 것도 아니고.”
“그렇지? 강우야, 난 강우 너만 믿으면 되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황을 따져본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설사 논문 지도교수라도 상관없다.
압도적인 수준의 논문으로 눌러버리면 되니까. 아마 그 조교수는 신새벽이 알아서 길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강우가 있는 한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없다.
“히히, 좋아. 난 강우만 믿을게. 좋아! 문제 해결!”
차도도가 곧바로 손을 휘휘 저었다.
“으이구, 강우 미성년자거든?”
“어차피 2년만 있으면 미성년자 아니라고!”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핫초코와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차도도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강우야. 카이스트 한태규 교수님을 강연회 연사로 초청하면 어떨까?”
“강연회요?”
“보통 R&E를 하게 되면 해당 교수님이 와서 강연하시거든.”
한태규의 강연을 들을 수 있다면 강우는 무조건 환영이었다. 마침 프로젝트 진행 상황과 내용도 협의할 거리가 있고.
“전 좋아요.”
“그럼 교수님께 부탁드려볼게.”
차도도가 좋아하는 눈치가 보였다. 지금까지 강연회 연사를 수배하는 일을 물리에서는 김윤택이 맡아서 했다. 발이 넓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차도도가 한 건을 성사할 순간이 왔다. 이는 차도도 본인의 역량을 교장 선생님에게 과시하는 경우라 당연히 그녀에게도 플러스가 된다.
“쌤, 그런데요, 한 교수님이 오시면 우리가 수행 중인 연구의 중간점검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 그렇구나…….”
갑자기 쏟아진 할 일에 차도도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고 차도도는 한동안 자책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 * *
프로야구 DD 파이터즈에서는 육성선수를 뽑는 연례 공개테스트를 열었다.
프로구단에서 방출되었거나 지명받지 못한 고졸, 대졸 선수 가운데 가능성이 있는 선수를 뽑아 키울 목적이다.
과거에는 육성선수 가운데 스타가 나오기도 했으나 스카우트가 체계화된 현재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
덕분에 연례행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진흙 속의 진주란 말은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기껏해야 몇 년에 한 명 정도 1군에 올라가는 녀석이 생기는 수준이다.
그래서 DD 파이터즈 육성선수 책임자인 홍 감독은 스카우터이자 코치에게 모든 평가를 맡겨 놓고 사우나를 나갔다가 돌아왔다.
여전히 운동장에선 테스트 평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김 코치! 쓸만한 선수 있어?”
홍 감독은 홈 플레이트에서 타격 테스트를 받는 선수를 힐끔 보면서 말을 걸었다. 김 코치는 한쪽에 앉아서 열심히 테스트 결과를 기록하고 있었다.
김 코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을 주저하는 눈치다.
“별놈 없지? 하긴 있을 리 없지. 있었다면 이미 다 쓸어갔겠지.”
“그, 그게 아니라요. 감독님, 저 녀석 한번 보십시오.”
김 코치가 홈 플레이트를 가리켰다.
테스트는 투수와 타자가 다르다. 투수는 수십 개의 공을 타자 없이 던지고 타자는 피칭머신의 공을 친다. 이런 기본 테스트가 끝나면 투수는 타자를 세워 놓고 공을 던지는 실전을 벌인다. 이 테스트가 중요하다. 이때 투수와 타자는 서로를 이기려고 사력을 다하게 된다. 당연히 높은 점수를 받아야 입단의 문이 넓어진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그 공을 받아쳤다.
홍 감독이 보기에 투수의 직구는 힘이 없었고 타자의 타격기술도 변변찮았다. 공은 1루 관중석 파울 플라이가 됐다.
“별것 아닌데?”
“그렇죠? 지금 직구는 뭐 그저 그런……. 근데 저 녀석이 오늘 삼진을 무려 다섯 개를 잡았습니다. 일곱 명 중에 다섯이 삼진이었어요.”
“에이, 아무리 못 치는 녀석들이라 해도 그건 좀…….”
홍 감독이 말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투수가 다시 공을 던졌고 기묘하게 휘어진 공에 타자는 헛방망이질을 했다.
“또 삼진입니다. 여섯 개째인데요.”
“어…… 응?”
감독은 눈을 비비며 방금 본 공을 떠올렸다. 하지만 공의 궤적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놈 뭐 하던 놈이야?”
“작년에 야구단에서 방출된 녀석인데요, 직구 구질을 보면 그럴 만해요. 변화구는 조금 낫긴 한데…… 그런데 투 스트라이크에서 던지는 공이 예술처럼 휘어져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요.”
홍 감독이 눈을 가늘게 떴다.
1군에서 뛴 적이 있는데도 기억이 없으니 경력이 아주 짧은 놈이다. 공의 구질을 봐도 확신할 수 있다. 저러니 잘렸을 거다. 그런데 방금 얼핏 지나간 변화구는 뭔가 이상했다. 그 이상한 변화구가 삼진을 그렇게 잡았나? 그렇다면 완전히 물건인데?
“저놈 이름이?”
“공정혁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1군 통산 8이닝 던지고 방출됐으니까요.”
“공정혁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