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28화 (128/325)

제128화 연구 프로젝트 (3)

홍 감독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존재감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뭔가 감이 온다.

“1군, 아니 2군에서도 힘들겠죠? 저 구속이면 뭐…… 베팅볼 수준인데…….”

“아냐, 직구는 그렇지만 방금 그 변화구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는데? 저 녀석 불러봐.”

모두가 초특급 스피드의 공을 던질 필요는 없다. 하나만 잘 던져도 써먹을 곳이 있다고 믿는 홍 감독이다.

보물을 발견한 기분에 홍 감독은 한껏 기대가 부풀었다.

공정혁은 투수치고는 체격 조건이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크게 나쁜 편도 아니다. 얼굴을 보니 인성은 그럭저럭 괜찮은 놈 같고…….

“부, 부르셨습니까?”

다가온 공정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방금 던진 그 공 뭐냐? 커브 비스무리한 거…….”

“어, 어떤 거요?”

“마지막에 삼진 잡은 공 있잖아?”

“아, 그거 필살긴데요?”

“공 휘는 방향이 이상하던데? 어디에서 배웠어?”

공정혁이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어떤 고등학생한테요.”

홍 감독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고등학생에게 변화구를 배웠다는 놈은 처음이었다.

유명 1군 투수에게 배웠다는 답을 기대했는데?

손을 저어 돌려보내려 할 때 공정혁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 고등학생이…… 과학으로 개발했데요. 야구를 전혀 모르는 녀석인데 과학으로 변화구를 개발해서…….”

이건 더 황당한 소리다.

“과학? 무슨 개소리야?”

“서클 커브라는 구질인데요, 서클 체인지업과 비슷한…… 그러니까…….”

공정혁은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개발 당사자가 아니어서다.

극히 드물게 스스로 변화구를 창조하는 천재 야구선수가 있긴 하다. 그런 천재들에 의해 수많은 새로운 구종이 개발된 것도 현실이고. 하지만…….

“너! 새로 함 던져봐라. 다시 구경해보게.”

이번에는 홍 감독이 직접 포수 뒤 심판 위치에 섰다.

공이 날아왔다. 빠르진 않다. 그런데 타자 부근에서 공이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우타자 아래쪽으로 공이 파고든다. 단순한 커브와는 궤적이 다르고 속도도 빠르다.

“헉!”

눈이 동그래진 홍 감독이 코치와 교감한 후 다시 신호를 넣었다.

와인드업한 공정혁이 재차 공을 던졌다. 제구가 좋은 공정혁이기에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오! 기가 막힌데?”

이 정도면 마구라 불러도 될 수준이다.

고등학생에게 배웠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어쨌든 눈앞에서 새로운 구종이 춤을 추고 있다. 한두 타자에게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홈 플레이트로 날아오는 공을 보면서 홍 감독은 흥분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올해 육성선수 테스트는 풍년일지도 모르겠다.

* * *

카이스트 한태규 교수의 고려 과학고 방문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태규가 한 달에 한 번 있는 초빙 강연 대상자로 강당에 나타났다.

고려 과학고에서 마다할 상황이 아닌 데다 어차피 프로젝트 관련 회의 때문에 한 차례 방문이 필요하던 차였다.

평소처럼 강우는 고곽천재와 함께 관중석에 자리했다.

고곽천재는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아는 사람이 강연하는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단상에 차도도가 등장했다.

보통 때는 학년주임인 김윤택이 강연자를 소개했는데 오늘은 차도도가 대신했다.

“카이스트에서 귀한 분이 오셨습니다. 물리학과 한태규 교수님이십니다. 한 교수님은 고전 물리학에서 활약하시는 분으로…….”

소개가 끝나고 한태규가 앞으로 나섰다. 안경을 낀 중년인 모습의 한태규가 환호를 받으며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 주제는 ‘물리학의 발전’이었다.

물리학을 현실로 끌어들인 뉴턴부터 근대 천재 물리학자들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현대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물리학을 전공할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강우에게는 별다를 게 없는 주제이지만 다른 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처럼 물리학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오늘 강연으로 물리학의 전체 구조가 확고하게 머리에 자리 잡혔을 것이다.

강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고곽천재 팀은 교장실로 향했다.

한태규가 교장 선생님과 인사하는 자리에 고곽천재도 참석하기로 한 때문이다.

“우와, 교장실은 처음인데…….”

윤수아가 흥분을 감추며 주위를 둘러봤다. 큰 사고를 치지 않은 이상 학교 내에서 가장 들르기 어려운 장소가 교장실일 것이다.

그녀의 흥분에 강우가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난 가봤는데…….”

강우는 교장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물리 프로젝트와 수학 추천서 때문에 차도도와 함께 교장실에 갔었다. 그래서 흥분할 일이 없다.

“나도 가봤어.”

손차희는 입학식 때 상을 받는 바람에 교장실에 인사하러 갔었다. 입학식 3인방이었던 이민찬, 주영식과 함께였다.

두 사람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풀이 죽은 윤수아는 동지를 찾아 최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우야, 넌 교장실 처음이지?”

“아니, 나도 교장실 갔었어.”

최대우의 대답에 윤수아는 가슴이 무너졌다. 어떻게 자신만 교장실이 처음일까.

“넌 교장실 왜 갔었어?”

“청소하러.”

이 순간 윤수아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얼굴만 봐도 푸근한 백두섭 교장 선생님과 한태규가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 고곽천재도 함께 자리했다.

뒤쪽 자리에 앉으며 강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 차도도의 합석은 이해가 됐지만 김윤택이 왜 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기에 뒤에 잠자코 앉아있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백두섭이 한태규에게 학교 방문에 대한 감사를 전달하는 말이 오갔다.

“저희는 항상 우수한 연사를 초청하려 합니다. 그런데 시간 되시는 분이 거의 없더군요. 대부분 너무 바쁘셔서 시간 내기 힘드시다고……. 이렇게 강연해주시니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학생들을 만나 정말 즐거웠습니다. 학교 홍보도 되고 저희도 좋은 자리지요. 특히 저는…… 프로젝트 업무 수행차 온 거라…….”

백두섭과 한태규 사이에 연신 훈훈한 대화가 오갔다.

옆에서 눈치만 보던 김윤택이 바로 끼어들었다.

“다음에 또 강의하시게 되면 꼭 저를 통해 주십시오. 제가 강연회를 전담하고 있거든요.”

“아, 예.”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태규는 차도도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실상 전담이 있는 자리도 아니다. 김윤택이 강연 초빙 주도권을 빼앗기기 싫어서 하는 말일 뿐이다.

차도도는 일일이 대꾸할 수 없어 어색한 미소만 머금었다.

“물리학에서는 강연자가 많지 않습니까?”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의외로 학생들이 좋아할 분야의 주제는…….”

차도도가 대답할 때 다시 김윤택이 끼어들었다.

“한국대 물리학과에서 종종 오십니다. 얼마 전에 마도환 교수님께서 시간을 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아! 마 교수요? 그분은 강연을 자주 나가시죠.”

한태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강우는 그 웃음의 이면을 쉽게 짐작했다.

교수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교수도 있고 새로운 이론을 연구하는 교수도 있다.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교수도 있고. 가끔 윗선에 줄을 대거나 국회나 정부 부처에 입성하려고 정치질하는 교수도 있다.

마도환은 정치질하는 교수에 속했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 이름을 알리는 일이 중요하고 강연이나 티비에 자주 출연한다. 물론 강연을 많이 한다고 모두 정치하는 교수는 아니었지만.

“아, 차 선생님에게도 연락 왔었죠? 마도환 교수 말입니다.”

김윤택이 한국대 교수와 연줄이 있음을 과시하려고 대화를 한국대 쪽으로 몰고 갔다.

차도도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가끔 연락 오시긴 합니다. 다만 지금 당장 강연회를 열기엔…….”

일전에 한국대 탐방을 갔다가 마도환을 만난 이후 수시로 마도환에게 연락이 왔다.

올해 초에 핵융합 관련으로 요셉 교수의 강연이 있었기에 비슷한 주제로 마도환을 초청하기엔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차도도는 일단 고사하며 내년을 기약하고 있었다.

강우는 마도환 이야기가 나오자 신경이 팍 쓰였다.

얼핏 대화로 미루어 보아 마도환과 차도도 사이에 연락이 오가는 듯했다.

괜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도환과 엮이면, 그것도 마도환과 차도도가 엮인 장면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마도환 교수도 아마 내년부터 저희랑 R&E를 할 듯합니다. 저희는 항상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김윤택이 열심히 마도환을 앞세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리 탐탁지 않은 한태규의 표정을 읽은 백두섭이 서둘러 만남을 정리했다.

“오늘 프로젝트 수행 학생들과도 회의하셔야죠? 차도도 선생님과 함께 가시면 됩니다.”

백두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일어나야 했다.

“한 교수님? 물리실험실로 가시죠.”

차도도가 재빨리 한태규를 안내했고 강우를 비롯한 친구들도 뒤를 따라갔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가던 김윤택은 곧바로 백두섭의 부름을 받았다.

“김 선생, 내년 학사운영 계획 초안 어떻게 됐어요? 가져와 보세요.”

김윤택은 멀어지는 차도도와 한태규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한태규는 프로젝트 수행 중간보고를 받았다.

각국의 고속전철 사례를 비교 분석한 연구는 예상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등학생과 학부 졸업 선생님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이대로라면 프로젝트가 끝나는 내년 여름까지 충분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대로 계속하면 됩니다.”

한태규의 칭찬에 차도도를 비롯한 모두가 마음을 놓았다.

“다만 내년에 학생들이 2학년이 되어도 이 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반이 달라지고 담임 선생님이 바뀌면…….”

한태규의 우려를 차도도가 재빨리 풀었다.

“내년에도 R&E 형태로 존속하면 됩니다. 곤란한 문제는 전혀 없어요. 지금은 우연히 제가 담임이지만 담임 아니어도 상관없거든요. 내년 여름까지는 연구비가 계속 지급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1년 프로젝트이니까요. 내년 여름 종료 시까지 연구 보고서만 제출해주시면…….”

중간보고서를 돌려받았을 때 차도도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논문 발표도 가능하죠?”

“논문이 나오면 더 좋지요. 보통은 논문도 함께 요구합니다만 여기는 고등학교라…….”

“저희도 논문을 내고 싶은데요.”

차도도가 논문 초안을 꺼냈다. 물론 논문은 앞부분 서론과 본론 일부만 정리했다.

이 논문은 이번 겨울방학 때 중점적으로 연구해서 내년 초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 모든 계획은 강우가 주도해서 차도도에게 일러준 것이다.

초안을 살핀 한태규는 무척 놀랐다. 차도도 팀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저자는 제가 하고, 마지막 교신저자는 한 교수님으로 했습니다. 중간에 학생들을 넣고요. 그래서 논문 저자가 많아요.”

무려 6명이나 됐다. 이것 또한 강우의 의도였다. 고곽천재 모두에게 실적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당연히 그들 모두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니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었다.

“다소 무리일지라도 학생들에게는 입시에서 도움이 되거든요.”

차도도의 사려 깊은 부탁에 한태규가 감사했다.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은 일입니다. 논문을 쓰신다니 제가 무조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차도도는 다른 초안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건 저와 강우 둘이서 난류 유동과 관련하여 준비한 논문인데요, 이것도 가능할까요?”

한태규가 입을 쩍 벌렸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그가 강우에게 원했던 바로 그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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