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29화 (129/325)

제129화 연구 프로젝트 (4)

“이, 이건…….”

말을 잇지 못하는 한태규를 향해 차도도가 미소를 지었다.

“어려운가요?”

“아뇨, 아주 좋습니다. 제가 바라던 일이지요.”

방금 차도도가 내민 초안에는 고속전철의 궁극적인 개선안도 담겨 있었다.

한태규의 시선이 강우에게로 옮겨갔다.

“이건 강우 군이 낸 아이디어인가요?”

“제가 처음 생각한 것이지만 실제 연구수행은 저희 선생님이 하십니다.”

“선생님이 유체역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최근에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거든요.”

강우가 차도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다시 초안을 세밀히 살펴본 한태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네요, 저…… 차도도 선생님, 혹시 카이스트에서 석박사 밟으실 생각 있으십니까? 이런 연구를 수행하실 수 있다면 충분히 대학원을 졸업하실 수 있습니다. 이 연구과제로 저에게 석사과정으로 오시면…….”

예기치 않은 제안에 차도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비록 지금은 학교 선생님이지만 연구자의 꿈, 진학의 꿈을 버린 적은 없다.

카이스트 석사 과정이라면 그녀에게 훌륭한 선택지다. 게다가 그녀는 한태규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밑에서 물리학을 배운다면 괜찮은 과학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는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강우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강우의 내심을 지금으로선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만 현재 학교 재직 중이라…….”

“파트로 입학하셔도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비울 수 있으면 학위 과정을 밟을 수 있으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교육부에서도 선생님들의 자기계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 그게…….”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급하지 않으니까요.”

차도도를 바라보는 한태규의 눈빛에 따스함이 묻어났다.

정작 정신없는 차도도와 달리 강우는 한태규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난류 유동과 관련하여 한두 차례 대화를 나눴기에 한태규는 강우의 능력과 관심을 비교적 잘 이해했다. 그렇기에 이 아이디어가 강우의 머릿속에서 나왔음을 쉽게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를 실제로 연구와 연결하여 수행하는 문제는 다르다. 지금 고등학생인 강우에게는 여러 제약 요인이 있다. 그걸 극복하려면 차도도의 역할이 커져야 했다.

논문 초안에서 언급한 연구수행이 가능해지려면, 중간 역할을 담당한 차도도의 능력 또한 범상치 않아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로젝트 체결 과정에서 차도도의 이력을 확인했던 한태규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절대 잘못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강우는 지금 학생이기에 오히려 그녀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차도도 선생님도 물리학에서 재능이 A급은 충분히 된다. 어쩌면 S급일지도…….’

차도도 또한 굉장한 능력자란 생각이 들자 강우는 가슴이 부풀었다.

차도도를 앞세우면 그의 모든 계획을 훨씬 쉽게 달성할 수 있다.

강우가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는 사이 화제가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강우는 마도환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교장실에서…… 마도환 교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조금 언짢아 보이셨어요.”

“마도환 교수랑 잘 아는 사이입니까?”

“한국대 탐방 때 만나 뵈었을 뿐입니다. 혹시 문제라도?”

“아뇨, 문제는 없습니다만…… 학계에서 평이 엇갈리는 사람이거든요.”

김윤택이 친한 교수이기에 차도도는 다음 말이 궁금했다.

괜한 말을 했다며 고사하는 한태규를 계속 부추겨 간신히 다음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평가는 강우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물리학계에 몸을 담았던 시절, 그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던 손강우가 본인이기에 강우도 모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부친의 위세를 등에 업고 각종 프로젝트를 가로채기로 유명합니다. 또 학계에 이래저래 영향력을 행사하고요. 대학교도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거든요. 좋게 보면 정부와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주니까 도움이 되는 존재이지만 나쁘게 보면 연구에 간섭하는 골치 아픈 사람이죠. 물리학계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을 꼽자면 바로 마 교수일 겁니다.”

한태규는 한국대가 아닌 카이스트이지만 마도환의 문제를 꽤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나마 직설적으로 험담하지 않고 완곡하게 돌려서 비판했다.

“물론 고려 과학고에서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마 교수라면 프로젝트를 쉽게 추진할 능력이 있으니까요. 부담도 거의 없을 테고요.”

“네. 마 교수님이랑은 물리 부장이신 김윤택 선생님이 주로 연락하세요.”

“부탁드리고 싶은 점은 적어도 저희랑 프로젝트 하는 동안에는 마 교수랑 엮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말이 강우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저렇게 하면 차도도와 마도환의 접촉을 그나마 막을 수 있다.

“저희는 한 교수님 프로젝트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차도도의 대답에 고곽천재도 동의했다.

회의가 끝나고 한태규가 떠났다.

그때야 긴장을 푼 차도도가 의자에 축 늘어졌다.

“학계도 복잡한가 봐…….”

그녀의 혼잣말에 강우는 충분히 공감했다.

힘들 때는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 스트레스에는 먹는 게 최고다.

“쌤! 일 끝났으면 우리 저녁 먹으러 가요. 연구비도 많이 받았는데 맛있는 거 먹어요.”

강우의 제안에 윤수아와 최대우가 환하게 웃으며 기쁨을 표시했다.

“그래, 덕분에 내 월급이 늘었는데 맛있는 거 사줘야지.”

고곽천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통장에 들어오는 연구비만 떠올리며 희희낙락했었다. 생각해보면 이 연구를 대표하는 차도도의 연구비 수당이 그들보다 훨씬 많을 게 뻔하다.

물론 차도도의 재력을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월급이 오르면 좋은 일 아닌가.

“오늘은 코스요리로!”

윤수아가 재빨리 메뉴를 정해 앞장섰다.

* * *

날씨가 추워지면서 초록빛이 사라지고 노란빛과 붉은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반 팔을 입던 옷차림도 어느새 긴 팔로 바뀌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는 계절이 됐다.

저녁을 먹고 자습실로 돌아가면서 강우는 학교 교정을 쭉 둘러봤다.

그가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는 삭막한 겨울이었다. 지금 다시 겨울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었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고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고등학교 생활은 원래 그의 삶인 듯 자연스러워졌다.

“강우야, 뭐해?”

뒤에서 손차희가 불렀다.

뒤를 돌아본 강우는 그녀에게 손짓으로 인사하고는 다시 터벅터벅 걸었다.

이런 날은 바로 세미나실로 들어가 공부하기보다 운동장이라도 걷고 싶다. 곧 기말고사가 닥치면 그마저도 못하게 될 테니까.

“너희들 먼저 올라가 있어. 난 강우랑 같이 들어갈게.”

손차희가 윤수아와 최대우를 먼저 보내고는 강우 옆에 붙었다.

강우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먼 곳을 바라봤다.

손강우가 없어도 이 세상은 평화롭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강우의 삶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겠지.

그는 깊은숨을 쉬고는 옆의 손차희를 돌아봤다.

“공부는 잘돼? 프로젝트 때문에 힘들지 않아?”

“난 지난번 중간고사 때 벌어놓은 게 있잖아? 조금만 하면 되는걸. 너야말로 바쁘지 않아?”

“내가 바쁠 게 뭐 있어?”

“넌 차도도 선생님, 신새벽 선생님과 함께 연구하잖아? 그거 실제로는 네가 주도하는 거라며? 그러니 바쁘지.”

아마 두 선생님과 논문 쓰는 작업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특별히 다른 학생에게 떠벌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논문을 쓰고 싶어서 두 선생님의 도움을 받는 거야.”

“으응, 그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수긍하는 표정은 아니다.

굳이 그녀를 설득할 필요는 없기에 강우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어이, 브라더! 씨스더!”

뒤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부를 녀석은 고현성뿐이다.

피식 웃으며 강우는 뒤를 돌았다.

“왜?”

“뭐하냐?”

고현성이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문득 장난기가 든 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야말로 여긴 왜? 우리 둘이 데이트 중인데 왜 방해하지?”

“어? 데이트?”

녀석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완전히 나라를 잃은 표정이다.

“씨…… 씨스더! 정말이야?”

“강우랑 나란히 있으니 어울리지 않아?”

손차희가 한술 더 떠서 강우의 팔짱을 꼈다.

고현성의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잠시 머뭇거리던 고현성이 손차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차희야, 잠시 나 좀 보자.”

버티는 손차희를 강제로 끌고 가는 고현성을 보고 강우는 혀를 차면서 두 사람을 쫓아갔다.

고현성이 도착한 곳은 동아리방으로 사용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창의적 체험 활동 동아리는 체험 활동 시간에 과목별 강의실, 실험실 등을 이용하지만 취미동아리가 모인 자율 동아리는 동아리별로 작은 공간을 줬다.

“여기 어디야?”

“발라드부.”

다시 보니 디지털 피아노와 기타를 비롯한 음향기기가 놓여 있었다.

“여긴 왜?”

약간은 짜증이 난 손차희가 눈에 힘을 주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학교 축제가 있잖아?”

고려 과학고 축제는 12월 말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부담이 없을 때 진행하고 이때는 각 동아리에서 전시회와 장기자랑을 한다. 댄스부, 디자인부, 사물놀이부 등에서 일 년간 연습한 장기를 선보이는 시간이다.

“기말시험이나 친 다음에 준비하지?”

“아! 그때 하면 이미 늦어. 지금부터 틈틈이 연습해야지.”

“그래서? 여기에 왜 데려왔는데?”

“그날 내가 노래를 부를 건데 어떤 노래가 괜찮은지 골라줄래?”

대충 무슨 속셈인지 강우도 눈치챘다.

강우는 체험 활동 동아리인 천체관측반에 가입했으나 자율 동아리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축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 보니 축제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손차희는 수학연구반과 이론물리부에 가입되어 있으나 마찬가지로 장기자랑이 아니어서 축제와 거리가 있다. 윤수아나 최대우도 마찬가지.

결론적으로 고곽천재는 축제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지금 고현성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축제가 성큼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왜 내가 고르는데?”

까칠하게 대응하는 손차희를 사정사정해서 의자에 앉힌 고현성이 기타를 꺼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발라드부잖아? 축제 때 노래 부를 거거든?”

손차희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고 고현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주를 시작했다.

녀석의 기타 연주 솜씨가 제법이었다. 수학여행 때도 범상치 않더니 대단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조용히 흐르고 고현성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발라드풍의 대중가요다.

“오! 제법인데?”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었건만 강우의 반응에 고현성이 인상을 팍 쓰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듣기 좋았다. 괜히 발라드부 부원이 아니었다.

어느새 손차희는 노래에 빠져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하고 있었다.

노래를 끝낸 고현성이 뿌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노래하고…… 또 다른 노래 둘 중에서 고를 생각인데…….”

“방금 부른 걸로 해.”

“응? 아직 두 번째 노래는 안 불렀는데?”

“제일 자신 있는 걸 먼저 불렀잖아? 그럼 그걸로 하는 거지.”

손차희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고현성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희가 그렇게 하라면 해야지. 차희야, 그날 내가 이 노래 부르면 네가 꽃다발을 던져주면 어때?”

보고 있자니 고현성 이 자식의 속셈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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