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30화 (130/325)

제130화 축제 준비 (1)

“내가 왜?”

손차희가 뚱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이 노래…… 너를 위한 세레나데인데?”

“내가 미친다, 미쳐.”

손차희가 소름이 끼친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거절당한 고현성은 평소와 달리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성가신 놈이긴 하지만 이 녀석 덕분에 학교가 재밌어진 것도 있고 밥도 많이 얻어먹었기에 강우는 조금만 도와주기로 했다.

“내가 차희를 잘 타일러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어? 브라더가?”

강우의 협조가 예상 밖이었던 듯 고현성이 감격했다.

“너, 노래 잘 부르더라. 기타 솜씨도 죽이고. 그 정도면 어떤 여학생이든 다 넘어올 텐데?”

“달라, 차희는…….”

“으구, 감성이 풍부한 여학생을 잡아야지, 차희는 완전 전형적인 이과생이야. 가슴에 철을 품은…… 커윽!”

뒤에서 발길질한 차희의 공격에 강우는 앞으로 쓰러질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강우가 허둥지둥 밖으로 도망치며 소리쳤다.

“나만 믿어!”

강우의 뒤를 손차희가 눈을 부라리며 추격했다.

“강우! 믿긴 뭘 믿어!”

“그런 거 있어.”

강우는 서둘러 세미나실로 뛰어갔다.

* * *

정작 세미나실에서 강우는 평소와 다른 장면을 만났다.

“강우 왔네? 이 문제 좀 해결해봐.”

윤수아가 그를 세미나실로 끌어들였다.

평소라면 어려운 수학이나 물리 문제였겠지만 오늘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일단 그를 쳐다보는 두 학생이 있었다.

“너희들은?”

“난 김나영.”

“난 김형배.”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한 명이 이름을 말했다. 대충 같은 반 친구는 아니고 다른 반 녀석인데 인사도 처음이다.

“예전에 시험 전에 수학 질문도 했었는데…….”

치킨과 피자를 먹던 식당에서 질문한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이니 강우가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니 어색할 일도 없어서 친구처럼 인사했다.

“울 학원 친구들이야.”

윤수아가 이 학생들과의 연줄을 밝혔다. 역시 마당발이다.

윤수아의 학원이라면 손차희와도 잘 아는 사이다. 그것도 중학교 시절부터. 두 학생이 손차희와도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연극반 학생들인데 연극 때문에 강우 너를 찾아왔어.”

윤수아의 설명에 강우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고현성을 따라 발라드부에 갔다 왔는데 이들은 연극반이라니. 오늘은 이쪽으로 분위기가 잡힌 날인가 보다.

유서 깊은 연극반은 공부와 관련 없으면서도 체험 활동 동아리에 속해 있다. 그래서 이름도 연극부가 아닌 연극반이다.

“나? 연극이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강우는 두 사람에게 연유를 물었다.

윤수아가 나서서 설명했다.

“지난 수학여행 때 우리가 연극 했었잖아?”

“아! 티코?”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강우는 한바탕 낄낄 웃었다. 급조한 연극치고는 제법 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연극 소품 빌려줬던 학생들이야.”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강우는 그런 도움을 받고도 입을 닦을 사람은 아니었다.

“아! 고마워. 근데 오늘 무슨 일이야?”

김나영이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요약하면 기말고사 후 축제 때 연극반에서는 전통적으로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했다. 다만 그 연극에 쓸 마땅한 극본이 없다나? 원래 준비하던 작품이 별로라는 평이 많아서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그걸 왜 나에게?”

“티코 연극이…… 네 아이디어라고 말해줬거든. 티코처럼 과학자의 삶을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 해서…….”

그때 티코가 등장한 이유는 딱히 없다.

급하게 과학자 아무나 데려와서 연극에 올려야 했으니까. 단지 강우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었을 뿐이다.

물론 과학고 학생들이니 과학 상식이 풍부하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 상식이나 이론에 국한한다. 중학생 때부터 공부하느라 폭넓게 독서를 못 한 과학고 학생은 과학자에 관한 지식에서 일반 학생과 별반 차이 나지 않는다. 특히 과학자의 삶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흐음, 그래서 조언을 구하러 왔다 이거지?”

두 학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과학자 있어?”

재미있는 과학자야 널렸다. 원래 천재란 어딘지 모르게 특이하고 괴팍한 법이니까. 하지만 대중 앞에 선보이려면 유명한 과학자여야 한다.

유명한 아르키메데스나 갈릴레이도 연극 소재로 쓰기에 나쁘지 않다. 근대로 들어오면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라부아지에나 DNA 구조를 밝힌 폴링, 합성염료를 개발한 퍼킨, 인류에게 삶과 죽음을 안긴 하버……. 순식간에 수많은 과학자의 면면이 강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명인일수록 좋겠지?”

관중인 학생들의 공감을 불러올 인물이어야 연극에 몰입할 수 있다. 강우는 방금 떠올랐던 인물들을 싹 지웠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유명 인물이…….

차마 그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던 강우는 고심 끝에 답을 꺼냈다.

“뉴턴으로 해.”

“뉴턴?”

“뉴턴을 조사해보면 재밌는 일화가 엄청 많아. 뉴턴이 연금술에 심취했었다던가, 주식 투자했다가 쫄딱 망했다던가,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고…… 왕립학회에서 귀족이었던 훅과 논쟁을 벌였다던가…….”

강우의 입에서 뉴턴의 에피소드가 줄줄이 쏟아졌다.

강우가 아는 이유는 뉴턴이 워낙 유명한 천재과학자이기도 하지만 손강우 시절 강연을 많이 하면서 습득한 잡다한 지식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두 학생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유명 과학자이면서도 에피소드가 딱딱하지 않다. 적당히 각색하면 우스개 장면을 많이 넣을 수 있다. 또 인류를 과학으로 이끈 업적도 감동적이다. 여러모로 적합했다.

“고마워, 강우야!”

연극반 두 학생이 연신 감사를 표했다.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뭘 이 정도로. 나중에 밥 사라.”

이맘때의 학생에게 모든 결과는 밥으로 통하는 법이다.

두 학생이 세미나실을 나가자 다시 고곽천재만 남았다.

“전부 축제 준비하느라 열심이네.”

“우리만 놀고 있어.”

축제 관련 동아리에 가입한 사람이 없는 고곽천재는 한가해도 너무 한가했다. 특히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손차희에게 이런 분위기는 낯설었다.

“그렇다고 지금 취미동아리에 가입할 수도 없고.”

“우리는 연구 프로젝트 발표회를 할까…….”

“죽을래?”

무심코 프로젝트를 입에 올렸다가 강우는 동료의 눈총을 받았다.

모두의 표정에 일을 벌이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차희는 꽃다발이라도 챙겨야 하지만 우리는…… 커윽!”

다시 손차희에게 격하게 한 대 맞은 강우는 신음을 터트렸다.

“그 꽃다발 강우 네 선에서 처리해. 난 몰라.”

손차희의 비수 같은 눈빛에 몸을 움츠린 강우는 기발한 생각을 꺼냈다.

주연이 아니면 조연이라도 뛰면 된다.

“차희야, 꽃다발 말고…… 고현성에게 무대연출을 조금 해줄까?”

“무대연출?”

정작 손차희가 아닌 윤수아가 호기심이 폭발해서 옆에 붙었다.

“예를 들면 화려한 조명이라던가 아니면 무대 효과라든가…….”

“그러면 연극 때도 쓸 수 있겠다!”

윤수아가 흥분한 어조로 찬성했다.

찜찜한 표정으로 윤수아의 눈치를 보면서 손차희가 다시 물었다.

“그게 뭔데?”

“과학원리를 적용하면 손쉽게 할 수 있는 간단한 무대연출이 제법 있어. 드라이아이스로 무대 연기를 만드는 건 많이 봤잖아?”

손차희는 강우가 머릿속으로 기발한 실험을 구상했음을 눈치챘다.

무대연출이면 부담도 없고 축제를 즐기기도 괜찮다. 과학원리를 적용한다면 과학고 학생들에게 어울리기도 하고.

고곽천재 모두가 찬성했다. 지금까지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던 최대우까지.

“그럼 내가 쌤에게 일단 물어볼게.”

강우는 바로 휴대전화를 들고 차도도에게 전화했다.

“쌤! 학교에 제설기 있어요?”

차도도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 학교에 눈 치울 일 없다.

“그 제설기 말고요, 눈 만드는 인공눈 제설기요.”

-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비슷한 것도요?”

한참 고민하는 듯 대답이 없더니 마침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있어. 냉장고 원리를 구현한 실험장치. 공기 압축기랑 분사기 등등 그런데 그거 고장 났을걸? 뭐하게?

“아, 그러면 지금 문의드리러 갈게요. 어디 계세요?”

- 상담실.

“알았어요.”

전화를 끝낸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우리도 축제 때 재밌게 놀아보자.”

* * *

상담실로 직행하던 강우는 도중에 휴대폰 문자를 받았다.

- 공정혁 : 전화 가능하니?

공정혁? 누구지? 휴대폰에 이름이 저장되어 있으니 분명히 인연 있는 사람인데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여름에 중학교에 갔을 때 만났던 전직 프로야구 선수임을 기억해냈다.

그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어도 다시 연락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뭔가 좋은 일이라는 직감이 왔다.

- 강우 : 네.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 강우?

“예, 전데요. 무슨 일이세요?”

- 수업 끝났어?

“저녁이잖아요. 지금은 자습시간이고요”

- 공부하느라 고생이네.

“고생은요, 재밌는걸요.”

사사로운 일상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주제로 들어갔다.

- 나, 다시 입단했다. 육성선수로 계약했는데 현재 분위기로 봐선 내년에는 1군으로 올라갈 것 같아.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그때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새로운 변화구를 개발해주었었다. 서클 커브라고 이름 붙였던가? 그 구종이 효과를 봤나 보다.

제대로 몸에 익혔다면 대선수로 성공하기는 힘들지라도 한두 타자를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알아본 구단도 대단한 눈썰미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말인데 한번 볼 수 있을까?

“저…… 서울에 있는데요?”

- 내가 거기로 갈게. 프로야구단 DD 파이터즈 3군 감독님이랑 같이 갈 건데. 네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 했지?

“고려 과학고요.”

- 그래, 고려 과학고. 이틀 뒤에 갈게.

이유를 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갑자기 왜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설마 수업 시간에 오려나? 어차피 상관없다. 가끔은 수업을 빼먹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 * *

상담실에 도착한 강우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무슨 날이야?”

세미나실도 그렇더니 이곳도 학생들로 북적인다.

사고 친 녀석들이 왜 이리 많아? 상담실에 학생들이 오는 경우는 뻔하다. 대부분 사고치고 반성문 쓰러 오니까.

그런데 지금은 수업이 모두 끝난 저녁이고 선생님들은 퇴근한 시간이다.

차도도나 신새벽이야 상담실에서 논문을 쓰고 연구한다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몰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쌤! 움직이면 안 돼요!”

경고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와 석상처럼 굳어서 의자에 다소곳이 앉은 두 선생님이 보였다. 그 앞에 대략 대여섯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늘어서 있고.

무슨 일인지 두리번거리던 강우는 눈앞에 세워진 이젤을 보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젤 표면에 붙은 큼지막한 도화지에는 차도도와 신새벽의 얼굴이 막 그려지고 있었다.

캐리커처!

갑자기 바람이 불었는지 학생들이 두 선생님의 얼굴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 특징을 잘 잡아서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한 학생이 강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강우? 우리는 만화창작부 부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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