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축제 준비 (4)
한참 주저하던 고현성이 굳어진 인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다가왔다.
“뭔데?”
“이거 좀 들라고.”
“내가 왜?”
“널 위한 것이거든.”
강우의 대답에 비닐 속의 물건을 확인한 고현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전부 쇳덩어리잖아? 이게 왜 날 위한 거야?”
“너, 축제 때 차희에게 꽃을 달라며? 그거랑 관련 있는 거야.”
손차희가 언급되자 고현성의 얼굴이 봄기운에 얼음 녹듯 사르르 풀렸다.
“이게 뭔데?”
“그날 소품으로 쓸 거.”
마지 못해 고현성이 부품이 든 비닐 뭉치를 들었다.
“크윽.”
“별로 안 무겁지?”
“천하장사냐?”
“차희도 이 정도는 들거든?”
뚱한 표정을 짓던 고현성이 차희에게 질 수 없었던지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장하다! 고현성!
“어디로 갈 건데?”
“물리실험실.”
“분명히 날 위한 일 맞지?”
“그렇지, 당연하지!”
재차 확인한 고현성이 용을 쓰느라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걸음을 뗐다.
그 뒤에서 강우는 편안하게 따라갔다.
“강우! 넌 왜 안 들어?”
“나?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도 좀 쉬자.”
겨울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현성이 부품을 날랐다. 물리실험실에 도착할 때쯤에는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처럼 보였다.
“고생했다.”
“대체 이게 뭐길래 이리 무겁냐?”
“축제 때 쓸 거야.”
강우는 비닐 속의 부품을 꺼내 실험실 한쪽 구석에 펼쳤다.
계속 무엇인지 모를 작은 기계부품이 나오자 고현성은 금방 흥미를 잃었다.
“난 간다.”
고현성이 사라진 후 강우는 가져온 부품을 바닥에 늘어놓고 주저앉은 채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상온 제설기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제설기를 제작하면서 강우는 기존의 방식을 대폭 개선했다. 단열압축과 팽창 원리를 이용해서 눈을 만드는 상온 제설기의 핵심은 단열팽창을 일으키는 노즐 부분이다.
강우는 노즐의 형상을 대폭 개선했고 이 과정에서 제설기는 기존 방식보다 눈을 더 빨리, 더 높은 온도에서 만들 수 있게 됐다. 물 입자를 작게 쪼개주는 장비도 대폭 새로워졌다.
모두 그의 천재성이 적용된 결과였다.
상온 제설기 제작 업체에서 알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 개선이 이루어졌건만 정작 강우는 무덤덤했다.
이런 것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서다.
열심히 부품을 조립하고 있자니 갑자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쪼그려 앉은 채 강우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서 차도도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하니?”
“상온 제설기 만드는 중이에요.”
“응? 제설기? 그때 축제 때 쓴다고 하던?”
바닥에 놓인 부품을 이리저리 살피려고 차도도도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조립된 부품을 하나씩 만져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제법 돈이 들었겠는데?”
“돈이야 조금 들긴 했어요. 그래도 고등학생이라고 싸게 해주시던데요?”
“네가 무슨 돈이?”
“프로젝트로 받은 돈을 일부 투자했죠.”
차도도가 안면을 확 구겼다.
정작 강우는 그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 상온 제설기 제작은 자신의 천재성을 시험해본 것이니까.
공부에서는 천재성이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했다.
최근에는 심화 과학이론을 다루는 연구 분야에서도 비슷한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이를 기술적인 면에 응용할 때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예상대로라면 그가 개선한 상온 제설기는 기존에 시장에 나온 제설기보다 압도적인 성능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테스트를 직접 해볼 기회는 흔치 않다. 축제를 빙자해서 홀로 시험했다. 이러한 테스트라면 비용은 아깝지 않다. 게다가 실험실에 처박힌 부품을 일부 이용했으니 그리 지출이 크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좀 과하잖아?”
“괜찮아요. 재미있는걸요. 돈은…… 프로구단에서 또 들어올 테고.”
“아, 그 프로젝트 계약 성사됐어. 어제 도장 찍어서 보냈다.”
“빠르네요.”
급한 쪽은 DD 파이터즈이고 프로야구단 측에선 부담 없는 소액이라 금방 계약이 체결됐다. 요약하자면 DD 파이터즈와 차도도의 투구 구종 개선 프로젝트 협약이었다.
협약이 체결되자마자 DD 파이터즈에서는 곧바로 프로젝트비를 입금했다.
학교에서는 이 돈을 차도도와 강우에게 매월 일정 금액으로 나누어서 1년간 지급한다.
“덕분에 선생님이 엄청 돈을 많이 벌게 됐어.”
프로젝트 두 개를 합하면 차도도는 현재 받는 월급만큼의 수당을 매월 더 받게 됐다. 물론 강우도 그보다는 적지만 학생으로선 많이 받는다. 이제는 일반 월급쟁이 수준은 된다.
“그럼 한턱내세요.”
“당연히 내야지. 원하는 것 있니? 내가 사줄게. 아니다. 그 돈 모두 너에게 줄까?”
강우의 형편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기에 그녀가 넌지시 제안을 건넸다.
당연히 강우는 거절했다.
“아뇨, 그건 선생님 몫이에요. 돈이야 앞으로 훨씬 많이 들어올 건데요. 그러니까 그러실 필요 없고요. 그 돈은 선생님이 저랑 함께 연구하기 때문에 받는 합당한 대가거든요.”
“어휴, 알았다. 내가 제자 잘 둬서 호강하네. 앞으로 돈 필요하면 말해. 선생님이 보기보다 꽤 돈 많거든.”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강우는 부품을 조립하며 볼트를 조였고 차도도가 옆에서 잡아줬다. 덕분에 작업 속도가 한결 빨라졌다.
“그런데 DD 파이터즈에는 언제 방문할 거야?”
“지금 당장은…… 시간이 안 나죠?”
“그렇지.”
“그럼 제가 필요한 내용 적어드릴 테니까 그쪽에 요구하세요. 방문 전에 일단 자료부터 받아보죠.”
“내가 야구를 잘 모르잖아?”
“어차피 투수들 자료니까 어렵지 않아요. 투수들이 던지는 기존 구종을 조금 보완하면 프로젝트 성과가 나올 거예요. 절대 어렵지 않아요.”
강우의 자신 있는 대답에 차도도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강우와 한배를 타기로 마음먹었기에 이제는 그녀도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걱정이 있다. 다가오는 겨울방학이다.
학교 학사일정은 겨울방학 동안 멈추지만 계약한 연구 프로젝트는 멈출 수 없다. 방학 기간이어도 연구를 수행해야 하고 중간에 보고서도 내야 한다.
“강우야, 방학 때…….”
그녀의 염려를 강우는 이미 눈치챘다.
“방학 때 서울 있으려고요. 집에는 잠시만 다녀오고. 어차피 수학 올림피아드 대비 겨울학교를 한국대에서 개최하니까 거기 출석해야 해요.”
“아, 그렇구나.”
강우가 서울에 있으면 연구 프로젝트 수행에서 문제가 없다. 오히려 다른 방해가 없는 방학 기간에는 더 탄력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서울에 머물 곳은 있어?”
“당연히 없죠.”
한숨을 쉬며 고민하던 차도도가 고민 끝에 제안했다.
“적당한 원룸을 알아볼까? 선생님이 조금 보태면 가능하잖아?”
“그래도 미성년자 혼자 거주하기는 어렵죠?”
“그러네. 밥도 문제고.”
두 사람의 한숨이 짙어졌다.
“일단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 주실래요? 방학 때 기숙사 거주 가능한지. 식당 식사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잠만 잘 수 있으면 충분하거든요.”
“밥은?”
“한국대 갈 땐 거기에서 먹고요. 안 갈 때는 근처 식당이나…….”
강우는 대답하다가 차도도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 의미를 차도도는 금방 알아챘다.
“알았어. 쌤이 밥을 해결해줄게. 내가 비록 음식 솜씨가 엉망이긴 하지만 토스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여차하면…… 우리 집에서 방학 보낼래?”
달콤한 제안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강우는 안색이 붉어졌다. 눈앞에 차도도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것이 무리한 제안이란 건 그도 안다.
아직은 문제가 될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건 최악의 경우에요. 일단 기숙사부터 교장 선생님을 설득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어쨌든 프로젝트도 성사됐으니 조만간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자.”
“네. 근사한 곳 말고 푸짐한 곳으로요.”
강우의 대답에 차도도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저씨 입맛은 어쩔 도리가 없다.
* * *
지글지글-
불판에서 돼지갈비가 익으며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고기를 노리는 고곽천재의 눈빛이 반짝인다.
주말 저녁 고곽천재 멤버들은 차도도와 프로젝트 성사 기념 파티를 열었다.
다만 강우는 윤수아와 손차희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두 여학생은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스테이크를 칼질하는 저녁 파티를 원했다. 반면 강우와 최대우는 그 돈이면 차라리 돼지갈비와 삼겹살을 먹자고 우겼다.
양과 질로 극명하게 대립하던 그들은 차도도에게 선택을 맡겼고 차도도는 간만에 강우와 대우의 손을 들어줬다.
“암, 질보다는 양이지.”
꿋꿋한 강우의 반응에 윤수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스테이크 썰었어야 했는데.”
“넌 대우 먹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그런 스테이크 1인분으로는 배가 안 찬다고.”
슬그머니 최대우를 살핀 윤수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최대우라면 스테이크를 몇 인분 먹어야 하는지 계산이 서지 않아서다.
“그래도 소고기로 할 수도 있었는데.”
“진정한 고기 사랑은 돼지야, 돼지.”
최대우가 바로 강우를 응원했다.
어쨌든 시험공부로 찌든 기분을 이렇게 환기할 수 있으니 모두 만족했다.
차도도가 그들에게 부탁의 말을 뗐다.
“그동안 프로젝트 하느라 수고했어. 그동안 기말고사 소홀히 한 건 아니지? 시험 잘 쳐야 해. 프로젝트는 프로젝트고, 내신은 내신이니까.”
그들이 만일 기말고사를 망친다면 허락해준 교장 선생님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이 이어졌다. 내년에 R&E를 열심히 하려면, 특히 강우처럼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려면 반드시 성적을 지켜야 한다는 당부가 이어졌다.
“당연히 열심히 하고 있어요.”
손차희가 자신감을 뿜어냈다.
지난 중간고사에서 1등을 한 그녀이기에 이번 기말고사에서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래야 2학기 합산 1등을 할 수 있고 1학기 때 망친 성적을 만회할 수 있다.
“이민찬은 이겨야죠.”
중간고사 때 이민찬을 간발의 차로 이겼기에 그녀는 전의를 불태웠다.
차도도의 시선이 윤수아와 최대우를 향했다. 그들 역시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연히 강우도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넌 무슨 과목인데?”
“특히 화학요.”
“응?”
심상찮은 표정으로 차도도가 강우를 살폈다.
“으음? 이번에도 신 선생님이 뭔가 내기를 걸었어?”
“만점 받으면 사진 보내준다고…….”
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극혐.”
“…….”
손차희와 윤수아는 그를 대놓고 무시했다.
“강우야, 받으면 나도 보여줘!”
“내가 왜 보여줘?”
“상부상조! 나도 화학 만점 받으면 주시려나?”
최대우의 기대감 어린 표정에 차도도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애들도 애들이지만 이건 선생님도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