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축제 준비 (5)
“쌤, 쌤은 내기 안 해요? 제가 물리 만점 받으면…….”
“이 자식이! 넌 물리 만점 진짜로 받아버릴 거잖아!”
차도도가 강우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손차희와 윤수아가 더 한심한 눈빛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솔직히 강우는 억울했다.
그가 먼저 한 제안도 아니었다. 사진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은 신새벽이 먼저 했다. 그리고 내기란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해야지, 만점 받을 것 같다고 안 하면 그게 내기인가?
“화학 정말 만점 받아버릴까…….”
무심코 중얼거리는 강우를 차도도가 다시 두들겨 팼다.
“너! 만점 받으면 혼날 줄 알아.”
“쳇! 이런 법이 어딨어요? 공부하지 말라는 쌤은 처음이네.”
“어휴, 안 되겠다. 순진한 대우 물들겠다.”
머리를 긁적이던 최대우가 제안했다.
“쌤! 생각해보니 물리로 내기하면 점수가 확 오를 것 같아요. 전 화학 만점은 불가능이지만 물리 만점은 가능성이 없지 않으니까…… 정말 코피 나게 공부할게요.”
“어휴, 대우 너까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차도도는 불판 위의 고기들을 뒤집었다. 아무래도 신새벽을 단속하든지 수를 내야 할 것 같다.
* * *
4번째 시험이라 그런지 긴장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시험 자체가 무덤덤하게 다가온다.
강우는 편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이처럼 시험이 고통이 아닌 즐거운 행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다. 공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라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희열은 그 어떤 놀이보다 더 정신 건강에 가치 있는 즐거움을 준다고.
그런 공부를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시험과 강제성 때문이라고 한다. 시험이 없는 세상에서는 공부는 가장 즐거운 유희가 된다나.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강우는 명확하게 이런 진리를 깨닫고 있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처럼 강우도 즐거웠다.
그는 오히려 친구들의 선전을 빌었다.
“차희의 성적이 잘 나와야 할 텐데.”
손차희가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녀는 고등학교에서도 제 자리를 확고하게 잡게 된다.
“수아와 대우도 잘 쳐야지.”
그가 계획한 프로젝트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려면 모두의 성적이 좋아야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보다 떨어져서는 안 된다.
강우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성적 욕심이 없다. 현재의 그는 손차희나 이민찬처럼 누구를 이겨보겠다는 욕구가 없다. 물론 그런 경쟁심은 과하지 않다면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당연히 강우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그의 천재성은 굳이 타인과의 경쟁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시험보다 연구를 통해 본인과 경쟁한다. 새로운 발상과 이론을 정립하면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확인하고 밝혀낸 연구결과가 이 세상의 등불이 되기를 기대한다.
적어도 그는 성적으로 평가받는 다른 학생과 달리 자신이 해낸 연구 성과로 인생을 평가받을 생각이다. 고등학교 3년이 아닌 긴 인생의 수십 년 동안.
그렇기에 기말고사는 지나가는 작은 과정에 불과했다.
첫날 시험이 끝나고 톡방에 고곽천재의 대화가 올라왔다.
- 윤수아 : 강우야! 수학 어떻게 쳤어?
- 강우 : 다 풀었어.
- 윤수아 : 와우! 또 만점인가 보네.
- 강우 : 너희들은?
- 손차희 : 난 두 개 빼곤 다 풀었어.
- 윤수아 : 난 다섯 개.
- 최대우 : 흐아암.
바람대로 모두 잘 쳤나 보다. 정작 잠잠한 최대우가 수상쩍다.
- 윤수아 : 대우야 넌?
- 최대우 : 네 개 반.
- 윤수아 : 반은 또 뭐야?
- 최대우 : 주관식.
- 손차희 : 아자아자! 내일도 잘 치자! 파이팅(이모티콘).
- 윤수아 : 파이팅(이모티콘).
- 최대우 : 흐아암(이모티콘).
- 윤수아 : 강우야 왜 반응이 없어?
- 최대우 : 강우 지금 자고 있어.
배신자란 톡이 쏟아졌으나 강우는 알지 못했다. 이미 잠들어 있었으니까.
* * *
과학 시험도 별다르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긴장했을 시험이 지금은 나들이 나온 기분이다. 강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어쩐지 갈수록 시험이 쉬워지는 것 같다. 하긴 문제를 내는 선생님이나 전공한 교수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 내신 시험 문제는 어렵지 않다.
사실 기초적인 수준의 문제이고 단지 여러 과목에 분량이 많다는 점이 장애물이다. 물론 이마저도 1학년이기에 논외였다.
강화된 천재성 덕분일까, 강우는 여느 때보다 훨씬 쉽게 시험을 쳤다. 대부분 과목에서 정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공부한 양에 비하면 처음 보는 유형의 문제도 머릿속에서 정답이 예상됐다. 마음 가는 대로 찍으면 답이란 사실을 경험으로 이미 안다.
당연히 너무 잘 칠 수는 없기에 강우는 적당히 요령을 부렸다.
밤에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차도도에게서 톡이 날아왔다.
- 차도도 쌤 : 강우야, 시험 어떻게 됐어?
- 강우 : 당연히 다 맞았죠.
물리 시험을 칠 때 고민하긴 했다. 하나쯤 틀려줄까 하다가 마지못해 정답을 찍었었다.
- 차도도 쌤 : 물리 말고 화학!
- 강우 : 예? 화학은 왜요?
답이 없다. 설마 신새벽 선생님과의 내기를 신경 쓰는 건가?
솔직히 강우는 화학을 전부 맞출 뻔했다. 하필 이번 시험의 주된 범위가 원소 번호 앞쪽을 다뤘다. 그가 복잡한 유기화학 분야는 정말 모르지만, 수소나 산소 화합물을 다루는 화학에서는 강점이 있다.
전부를 맞출 수 있었으나 고민했다. 괜히 화학까지 다 맞춰서 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잠시 톡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강우는 화학 점수를 써넣었다.
- 강우 : 세 개 틀렸어요.
- 차도도 쌤 : 지난번보다는 잘 쳤네.
보통 화학 성적이 평균 부근에서 놀았으니 잘 쳤다고 볼 수 있다.
- 차도도 쌤 : 고생했다. 내일 시험도 잘 치렴.
강우는 휴대폰을 던져놓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옆에서는 최대우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내일 시험이 국어와 영어였나? 강우는 대충 칠 생각이다. 어차피 공부도 거의 하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최대우 옆에서 먼저 잠들기 미안했으나 잠이 쏟아졌다.
그때 폰이 진동했다. 휴대폰을 주워 보니 신새벽이다.
- 신새벽 쌤 : 강우!
- 신새벽 쌤 : 강우야아아아!
- 강우 : 부비적~
- 신새벽 쌤 : 화학 어케 쳤어?
- 강우 : 만점!
- 신새벽 쌤 : 진짜?
- 강우 : 실은 세 개 틀렸어요.
- 신새벽 쌤 : 놀라라! 흐뭇(이모티콘).
- 강우 : 무슨 선생님이 학생이 틀리는 걸 더 좋아해요?
- 신새벽 쌤 : 너니까 그렇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안도하고 있을 신새벽이 눈앞에 그려져서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차도도의 만류만 아니었다면 정말 만점을 받았을 것이다.
- 강우 : 쌤, 저 내일 시험이거든요? 그러니까 빨리 자야 해요.
- 신새벽 쌤 : 그래, 응? 자긴 뭘 자? 내일 시험이면 공부해야지?
- 강우 : 공부는 평소에.
- 신새벽 쌤 : ㄴㄴ. 그래도 잘했으니까 내가 잠을 확 깨워줄게.
그리고 톡이 끊어졌다.
강우는 편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손에 쥔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본 강우는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놓쳤다.
“아, 정말! 이 사람이…….”
휴대폰 화면에는 미스테리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처녀 귀신 사진이 떠 있었다.
휴대폰에서 바로 튀어나올 듯한 입체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잠이 확 달아났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식겁한 강우는 흐린 눈을 뜨고 채팅창을 나갔다.
깔깔거리며 웃고 있을 신새벽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한숨을 쉬고 있자니 최대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강우야, 졸려? 내가 잠 깨워줄까?”
“응? 잠을 깨워?”
“걸그룹 사진 보면 잠이 확 깨는데…….”
아! 이 녀석은 어쩔 수 없는 덕후다. 강우는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 오늘 밤 꿈에 여자 나올까 겁난다.”
- 신새벽 쌤 : 강우야, 자니? 또 사진 보내줄까?
“차단할까 진짜.”
* * *
무사히 기말고사가 지나갔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일주일은 과제연구 집중기간이다. 여기까지는 1학기 때와 같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과제연구 집중기간의 마지막 날에 축제가 열린다.
고려 과학고에서 1년에 한 번, 유일하게 열리는 축제이고 1년간의 동아리 활동 결과를 모두에게 발표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날은 타학교 학생이나 가족 등 외부인을 초청하여 축제를 즐기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기말고사가 끝난 과제연구 기간은 한 학기 과제연구 보고서를 작성하고 마무리하랴, 축제를 준비하랴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다.
그나마 한가한 사람들이라면…….
“하아, 심심하다.”
윤수아가 연신 하품을 내쉬었다.
그녀의 옆에서 최대우 또한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반주를 넣었다.
“하아! 먹을 거 없나…….”
“이미 많이 먹었거든!”
빈 과자봉지를 털던 두 사람의 시선이 손차희와 강우를 향했다.
손차희는 할 일이 있다. 과제연구 보고서 최종본을 작성 중이다. 그들이 틈틈이 연구하고 정리한 고속전철 중간보고서를 과제연구 보고서로 바꾸는 작업이다. 서두르면 한나절에 충분히 끝낼 분량이라 손차희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다.
그들 가운데 가장 바쁜 사람은 강우였다.
강우는 복사지를 묶은 책자를 연신 들여다보면서 볼펜으로 뭔가를 적고 있다.
“강우는 왜 저리 바빠?”
“연극반 극본 쓰는 중이야.”
윤수아의 질문에 최대우가 대답했다.
“그거 아직도 안 끝났어?”
“어제도 기숙사에서 밤새던데?”
“보통 일이 아니네. 괜히 연극반 애들한테 소개해줬나?”
윤수아는 후회막급이다. 돈도 되지 않는 일을 강우에게 떠넘겨 힘들게 했다는 자책이다.
정작 강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극본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 연극반의 두 학생이 강우의 제안을 듣고 돌아간 뒤 엊그제 검토해달라고 극본을 가져왔다.
극본을 보는 순간 바로 미간을 찌푸린 강우는 몇 군데 지적하다가 포기하고 직접 극본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이 고생이었다.
“강우야 힘들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윤수아가 물었다.
“아니, 다했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별로. 그래도 명색이 뉴턴이면 과학이 들어가야지. 군데군데 과학을 넣느라…….”
“그럼 소품이 필요하잖아?”
“소품이야 실험실에 널렸는데.”
실험 기자재를 과연 빌릴 수 있는지는 그가 알 바 아니다. 마지막까지 마무리한 강우는 극본을 윤수아에게 넘겼다.
“자, 연극반에 전해 줘.”
“넌?”
“난 물리실험실 가봐야 해.”
바쁜 척 강우가 일어났을 때 마침 연극반 두 학생이 들어왔다.
“잘 왔네. 지금 막 끝났어.”
극본을 받은 두 학생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극본을 뒤적이던 두 학생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말 고마워.”
“뭘, 대충했으니까 세세하게는 알아서 채워 넣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강우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강우야, 넌 축제 때 별달리 할 일 없지?”
“나?”
생각해보니 특별하게 맡은 일은 없다. 지난 고중전 때처럼 이방인 포지션이었다.
“없는데?”
“그럼 특별 출연하면 어때? 극본 쓰느라 고생했으니까 연극에 나오면 좋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