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과학 축제 (1)
손을 흔드는 강우를 윤수아가 바로 떠밀었다.
“이야! 재밌겠다! 강우야 얼른 한다고 해!”
“내가 갑자기 무슨 연기를…….”
“너 지난번 수학여행 때 연기 엄청 잘했거든? 연극반 애들도 마찬가지니까 네가 민폐 끼칠 일은 없어. 찬조 출연! 특별 출연!”
윤수아가 적극적으로 권했고 연극반 두 학생도 막무가내로 요청했다.
“연극은 도저히 안 되겠고 꼭 구경 갈게.”
완곡하게 거절한 강우는 물리실험실로 도망쳤다. 축제 때 할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소소하게 계획해둔 일들이 있었다.
시험이 끝나니 왜 이리 바쁜지 모르겠다. 이 증상은 대한민국 모든 고등학생의 변하지 않는 법칙과도 같았다.
물리실험실에는 고현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브라더! 왜 이리 늦었어?”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느라.”
“널 왜 불러? 누가?”
“모르지. 어떤 여학생이 부르더라.”
강우의 대답에 고현성이 안면을 팍 찌그러트렸다.
지난 1년간 강우의 옆에는 여학생이 만만찮게 꼬였다. 물론 같은 조인 손차희와 윤수아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 두 여학생이 미모에서 다른 남은 여학생을 압도한다는 거다.
그에 비하면 고현성 주변에는 여학생이 씨가 말랐다. 중학교 때 여학생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그이기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데다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강우가 조금 생기긴 했지만…… 고현성은 절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리해서 축제 때 독창을 선보이기로 했다. 그의 필살기인 기타를 들고, 이른바 지난 수학여행 때 부른 독창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자, 자! 서두르자고.”
강우가 한쪽 구석에 쌓아둔 부품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충 형체가 갖춰진 상온 제설기는 제법 그럴듯한 모양을 드러냈다.
고현성은 지금 만드는 기계가 대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단지 강우에게 잡혀 수시로 돕고 있을 뿐이다.
“이거 하면 차희가 축제 때 나에게 꽃다발 주는 거 확실하지?”
“그럼, 그럼. 정확히는 꽃다발이 아니라 다른 거지만.”
“다르든 말든 주기만 하면 돼.”
고현성은 힘을 내서 강우를 도왔다. 며칠째 공연에 도움 된다는 강우의 말만 믿고 힘을 썼다. 덕분에 강우는 손을 덜었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근데 이게 뭐야?”
“몰라도 돼.”
하루에 한 번은 정체를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마지막으로 볼트를 조인 강우는 전원을 연결했다.
“흐아, 끝났어.”
버튼을 누르자 나지막한 기계소음이 울렸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그거야 재료를 안 넣었으니까.”
강우는 노즐 끝으로 뿜어지는 공기의 온도를 확인했다. 예상대로다. 여기에 물만 첨가하면 노즐 끝으로 인공 눈이 분사될 것이다.
“완벽해.”
강우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고현성의 안색이 밝아졌다.
“앞으로 난 안 와도 되지?”
“아니 아직도 할 일이 남았어.”
“어? 뭔데?”
“축제 때 무대 살려줄 도구. 총천연색 불꽃과 드라이아이스라고 들어봤지?”
축제라는 말이 나오니 고현성은 꼼짝없이 강우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 * *
축제일 전날, 바쁜 하루를 마치고 강우는 기숙사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최대우는 노트북의 걸그룹 동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고곽천재 단체방 톡이 울렸다.
- 윤수아 : 강우야, 강우야아!
- 강우 : 왜 불러?
- 윤수아 : 홈페이지 들어가 봤어? 너 보이더라.
“어? 내가 왜 있어?”
강우는 재빨리 휴대폰을 열어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 올해를 빛낸 고려 과학인 10인!
체험 활동 동아리인 신문반에서 여론을 조사하여 모두 10인을 선정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내가 어디 있다고…….”
무심코 창을 내리던 강우는 자신의 얼굴이 박힌 기사를 보고 기가 막혀 혀를 내둘렀다.
- 강우 : 1학년 3반. 천재라는 소문이 있으나 그 진위는 아무도 모른다.
- 입학 진단 고사에서 사실상 꼴찌였다는 소문과 화학 주기율표가 뭔지 몰라 화학 시간에 무척 혼났다는 제보가 있다. 1학기부터 2학기까지 수학과 물리 시험에서 만점이라는 유례없는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KMO 1차 시험에서는 떨어졌다.
- 고중전에서 운인지 실력인지 모르겠지만 OX 퀴즈와 특별 퀴즈를 석권했다. 이 두 퀴즈를 한 학생이 거머쥔 것은 개교 이래 처음이다. 또 수학 퀴즈에서 중앙고 선수 5명을 올킬했다. 중앙고 선수 중에는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 1학년에서 가장 기행을 많이 저지른 학생으로 이름이 자자하여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 선생님들 평 :
- 담임 차도도 선생님 : 말썽꾸러기.
- 화학 신새벽 선생님 : 바보.
- 수학 정명욱 선생님 : 기이한 녀석.
- 지학 김선호 선생님 : 인간 아님.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호한 평가가 주르륵 나타났다.
딱히 틀린 말은 없지만 조금은 씁쓸하다.
“내가 왜 말썽꾸러기고 바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최대우가 덩달아 부채질했다.
“내가 봐도 그런데?”
“왜?”
“안심이 안 되잖아? 담임이 속 터지지.”
그 말마저 이해할 수 없어 강우는 무시하고 창을 아래로 넘겼다.
고려 과학인 10인에 이민찬과 손차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평은 각각 귀공자, 미녀, 천재 등등으로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다.
이것 또한 강우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이민찬은 여학생들이 뽑은 최고 인기남이었고 손차희는 남학생들이 뽑은 최고 인기녀였다. 외모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강우는 신문반에서 만드는 기사의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을 느꼈다.
“이민찬 이 자식 돈으로 표를 샀나? 왜 얘네 둘은 좋은 말만 적혀 있어?”
“다른 학생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해.”
“차희가 예뻐?”
“차희 무시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강우는 자신의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이외에도 여러 학생이 있었다. 과학고답게 국제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들이 상당히 많았다.
10인 가운데 놀랍게도 차도도도 끼어있었다. 대충 올해 투표에서 고곽 최고 인기녀로 선정되었다나. 차도도가 인기 절정이라는 사실을 강우는 처음 알았다. 하긴 그 미모를 보면 놀랄 일은 아니지만.
강우는 이 기사를 통해 지난 일 년을 반추했다.
처음 강우로 빙의했을 때는 조용히 학창시절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점차 적응하면서 초기의 마음가짐이 바뀌어 버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음이 바뀐 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앞으로 2년은 어떨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잠이나 자자.”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이 절반이 넘는다던데. 사서 걱정할 일은 없다.
* * *
A동 앞에는 동아리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고려 과학고에는 체험 활동 동아리가 20여 개, 자율 동아리가 40여 개가 있다. 이들 동아리 가운데 절반가량이 축제에 동참해서 전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전시장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시청각실에서는 영화제작반 학생들이 만든 단편영화가 상영됐고 한쪽에서는 별점을 쳐주거나 영자신문을 제작해서 배포하기도 했다.
심지어 천체관측반에서도 촬영한 천체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강우는 천체관측반 활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기에 전시회에 참가하는 줄도 몰랐다. 전시장 앞에서 권유성을 만나고 나서야 천체관측반도 축제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크크, 어때? 죽이지?”
학교 천문대에서 찍은 달과 행성, 별 사진은 훌륭했다.
“이거 언제 찍었어?”
“네가 놀 때.”
마음에 안 드는 녀석. 강우는 피식 웃고는 사진을 돌아봤다. 놀랍게도 그의 이름이 붙은 사진도 있었다.
커다란 달 표면 사진 아래 최대우, 윤수아와 함께. 그들이 사이언스 페스타에 출품하느라 찍은 코페르니쿠스 크레이터 사진이다.
“넌 이미 찍은 게 있어서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어. 학생들이 골고루 참여해야 하니까.”
어차피 찍으라고 했어도 찍을 시간이 없었기에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예상외로 많은 학생이 참여해서 반가웠다. 얼핏 제대로 동아리 활동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열심히 하고 있었나 보다.
권유성도 사이언스 페스타에 출품했던, 1년 동안의 태양 궤적을 추적한 사진을 전시했다. 이 사진을 보면 다소 가볍게 보이는 권유성이 실제로는 얼마나 끈기 있는 녀석인지 짐작할 수 있다.
S급 재능에 끈기까지 있다니!
‘크게 될 녀석이군.’
같은 학년이라면 고곽천재 친구들처럼 키우고 싶은 녀석인데 운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미래를 보고 지켜봐야 할 녀석 중 하나였다.
A동 전시장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은 사진반과 만화창작부가 함께 연 전시회였다. 엄밀하게는 신문반까지 함께한 역작이다.
바로 어제 홈페이지에 공개한 올해를 빛낸 고려 과학인 10인전.
만화창작부에서는 해당 인물의 캐리커처 그림을 넣었고 사진반에서는 해당 인물의 사진을, 신문반에서는 홈페이지에 넣었던 관련 기사를 사진 옆에 붙였다.
어젯밤 해당 기사를 보면서 이불킥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얼마 전에 캐리커처를 그린다고 만화창작부 학생들이 몰려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강우의 사진은 고중전 때 수학 퀴즈에서 올킬하고 환호하던 모습이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사진이 찍히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 사진은 평소의 진중하고 무게 잡는 모습이 아니라 승리로 날뛰는 장면이니 마치 미친 사람 같다. 머리 스타일도 개판, 표정도 개판, 체육대회 때니 옷차림까지.
“으, 이게 뭐야…….”
이건 초상권 침해다. 반면 이민찬이나 손차희의 사진은 마치 스튜디오에서 작정하고 찍은 것처럼 차분하고 우아했다.
“사람 차별을 해도 어째 이렇게 할 수 있나…….”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인상을 팍팍 쓰고 있자니 손차희가 다가왔다.
“왜 그래?”
“내 얼굴 봐.”
강우가 가리키는 사진으로 시선을 옮기던 손차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괜찮아 보이는데 뭘.”
“이게 사람이냐?”
“김선호 쌤도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커윽!”
자지러지는 강우를 손차희가 붙잡았다.
“상온 제설기는 완성했어?”
“고현성 덕분에 편하게 조립했다.”
“다른 거는?”
“그럭저럭.”
“그럼 작전 수행에 차질 없겠네.”
“그렇지. 이제 네가 할 일만 남았어.”
강우와 손차희는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을 교환했다.
손차희를 보내고 강우는 차도도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녀 또한 10인에 포함되어 있기에 사진과 캐리커처가 동시에 전시되어 있었다.
“역시 남달라.”
사진에서도 단연 미모가 돋보인다. 지금 전시된 차도도의 사진과 캐리커처가 탐이 난다. 사실 얻어봐야 둘 곳이 없어 처리 곤란이긴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졌다. 인근 고등학교에서 구경 온 학생 가운데 가끔 중앙 과학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눈에 띄었다. 이런 축제를 통해 타학교와 교류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저쪽에서 친구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윤수였다.
뻘쭘해서 옆으로 피해가는데 윤수아가 반갑게 불렀다.
“강우야! 강우야아!”
“응?”
“내 친구들! 인사해.”
대충 남학생과 여학생이 반반 섞여 있었다. 중학교와 학원 친구들이라 했다. 그녀는 넓은 발을 축제에서도 증명했다.
“우리 학교 최강 천재야.”
윤수아가 그를 소개했다.
그를 보는 학생들의 눈빛이 어쩐지 사람이 아닌 동물을 보는 느낌이다. 일반고 학생에게는 과학고 학생이라면 상식을 벗어난 인간으로 보일 텐데 그런 곳에서도 천재라고 하니 어떤 기분일지 대충 짐작이 되긴 하다.
생각할수록 김선호의 평이 매우 적절했다.
“강우야, 연극 볼 거야?”
당연히 봐야 한다. 그가 극본을 써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