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과학 축제 (3)
드라이아이스는 연극에서 뉴턴이 중요한 발견을 할 때마다 뿜어져 나왔다.
여기에다 연극 장면 곳곳에 포그머신을 동원했다. 이 포그머신은 실험실에 있던 기자재를 급조해서 만든 것이다.
화학실험실에서 글리세린 오일과 이산화탄소 기체를 확보하고 물리실험실에서 압축기와 노즐 및 가열기를 조립했다.
“포그!”
윤수아의 신호에 맞춰 강우는 머신을 가동했다.
다행히 포그머신에서 적절하게 연기가 뿜어져 나와 조명을 쬐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덕분에 오전 공연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조성됐다. 공연은 조금 더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바뀌어 뉴턴을 신비스러운 인물로 보이게끔 했다.
“드라이아이스!”
마지막 뉴턴의 장례식 장면에서도 바닥에 깔린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분위기를 잡았다.
그리고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종잇조각 축하 세례까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색 은색 종잇조각이 성공적인 연극을 자축했다.
공연이 끝날 때 첫 공연을 능가하는 우레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무대 효과 때문에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던 강우와 윤수아는 그제야 가쁜 숨을 멈출 수 있었다.
“이게 되는구나.”
“거봐 내가 믿는다고 했잖아!”
예상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작동한 장비에 감탄하고 있자니 오히려 윤수아가 제안했다.
“축제 공연에 넣어도 되겠는데?”
애초에 강우가 계획한, 축제 공연에 동원할 기기와 효과는 상온 제설기와 드라이아이스였다. 그런데 포그머신을 포함해도 괜찮을 듯하다.
“뭐든지 많이 넣어. 역효과 나더라도 그게 더 있어 보이거든.”
전문 공연이 아니라 학교 축제여서 통하는 방식이다.
그 사이 무대 커튼이 내려가고 연극반 학생들이 그들에게 몰려왔다.
“수아야, 강우야!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마쳤어!”
“내년에도 수고 좀 해주라. 지금까지 이런 무대 효과는 없었어!”
“과학이 이렇게도 쓰이네!”
모두가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역시 남을 도우면 기분이 좋다. 강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내년에는 직접 해.”
드라이아이스나 글리세린 오일의 과학적 원리는 간단하니 미리 준비하면 굳이 그가 합세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환호하는 연극반 학생들의 도움으로 강우는 모든 기기를 운동장의 축제 무대로 옮겼다.
* * *
해가 넘어갈 때쯤부터 본격적인 축제의 막이 올랐다.
문을 연 팀은 사물놀이부. 요란한 북과 징, 꽹과리 소리가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상모꾼이 긴 끈이 달린 상모를 쓰고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며 너울거리는 흰 끈이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강우는 고곽천재 일행과 함께 운동장에 퍼질러 앉아 공연을 구경했다.
“와, 엄청나네.”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던 학생들이 재주가 많다. 연극반 학생들의 연극 솜씨도 대단하더니 사물놀이패는 더 하다.
“일 년 동안 수시로 연습했을걸?”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와 취미, 자기계발에 노력했을 학생들에게 강우는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자신만 열심히 한 줄 알았더니 친구들인 고곽천재를 비롯하여 고려 과학고 모든 학생이 최선을 다해 일 년을 보냈다. 그들 사이에서 승자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강우는 이들 틈에서 젊음과 열정을 만끽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이 학생들은 먼 훗날까지 그와 함께할 아군이다.
공연이 끝나자 운동장을 메운 구경꾼들이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하늘 꼭대기까지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댄스 공연.
“푸흡!”
강우는 댄스 공연 관람에 몰두한 최대우를 보면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동아리 가입 때 댄스부 앞에서 가입을 고민하던 최대우가 생각나서다. 아마 최대우가 가입했다면 이 공연의 주역이 되어 시선을 모았을 텐데.
대략 이십여 명의 학생들이 반주에 맞춰 집단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네 명의 여학생을 중심으로 여장한 네 남학생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여학생이 적은 과학고의 특성 때문이다.
“제법 여자 같지?”
윤수아가 낄낄대며 웃었고 강우도 학생들의 재치에 감탄했다.
“나도 내년엔 댄스부에 가입할까 봐.”
아쉬운 듯 최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여장하면 예쁘게 보일걸?”
윤수아의 비웃음에 최대우는 오히려 의지를 불태우는 것 같았다. 녀석의 표정을 보니 정말 내년에는 일을 저지를 기세다. 강우는 댄스부의 안녕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흥겨운 댄스 시간이 지나가고 밴드부의 공연이 시작됐다.
남녀 한 쌍의 보컬과 전자기타, 베이스기타, 드럼의 합주가 운동장을 메웠다.
“록이다!”
윤수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음악에 몸을 실었다.
음악과 그리 친하지 않은 강우에게는 단지 시끄러운 음악처럼 들렸지만 다른 학생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록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묘한 열기가 있다. 강우는 공연에 공감하는 관중의 몸동작을 따라 하며 음악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아마 저들 가운데 수학이나 과학 천재가 아닌 예술 천재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 천재들도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꾸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움직일 시간이야.”
손차희가 강우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현성의 공연에 맞춰 며칠간 준비한 비장의 무기다. 록 공연이 끝나면 발라드부의 공연이 있다.
주로 독창인 이 발라드부 공연에서 세 번째가 바로 고현성이다. 녀석은 이미 준비에 들어간 듯 보이지 않았다.
“가자!”
강우는 손차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윤수아와 최대우도 뒤늦게 따라갔다. 연극에서 무대 효과를 도왔던 윤수아는 이 일이 얼마나 바쁜지 실감했었다. 강우 혼자서는 손이 부족하여 완벽하게 무대를 꾸미기 힘들기에 그녀도 가담해야 한다.
정신없던 록 공연이 끝나고 잔잔한 발라드의 시간이 됐다.
남학생 한 명이 앞으로 나와 감미로운 발라드를 불렀다. 낮은 베이스 계열의 음색이 록에 흥분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각 동아리에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기에 정신없이 순서가 돌아갔고 덕분에 관람객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 발라드 독창은 그런 분위기를 일거에 은은한 목소리로 잠재웠다.
무대 뒤에서 강우는 손차희와 함께 고현성을 만났다.
“이야! 브라더! 씨스더! 왔구나!”
“약속했으니 당연히 와야지.”
고현성이 손차희의 손을 살폈다.
“꽃다발은?”
“노래 끝날 때 줄게.”
손차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강우는 좋아하는 고현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그렇게 좋을까.
정작 노래나 악기 공연과 전혀 관련 없는 강우는 이 순간에 꽃다발을 받을 일이 없다. 만일 그가 공연한다면 누가 꽃다발을 줄지 상상해봤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분명히 축하해줄 것이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그 외에는 없겠지?
문득 차도도와 신새벽이 생각났다. 그 두 사람도 꽃다발을 줄까? 괜히 근거 없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다.
강우는 무대 뒤에서 청중을 쭉 살폈다. 저쪽 구석에 차도도와 신새벽이 나란히 앉아서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날 때쯤 몰래 뒤로 가서 놀려야겠다.
* * *
고현성의 차례가 왔다.
강우는 윤수아와 힘을 합쳐 무대 아래를 누볐다.
“드라이아이스!”
고현성이 무대로 걸어 나오는 순간 무대 아래쪽에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앞선 공연에서 무대 효과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관중들은 놀라워하면서도 환호했다.
정작 더 놀란 사람은 고현성이었다.
기타를 들고 무대 앞으로 나오는 순간 발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으니까. 그는 무대 아래에서 신호를 보내는 강우를 발견하고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강우가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있었다.
감격한 고현성은 무대 중앙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기타를 무릎에 놓았다.
띠리리- 띵 띵-
가장 자신 있는 곡을 기타 반주로 깔고 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가사였다.
비록 강우는 고현성의 노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수학여행에서도 이번 축제에서도 독창할 만큼 고현성은 노래에 재능이 있다.
특히 기타를 치며 고운 음색의 목소리로 부르는 발라드풍의 가요는 여자들의 시선을 순식간에 빼앗았다.
다음 단계를 준비하면서 강우는 무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채 관중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역시 예상대로다. 심취한 관중들의 집중이 느껴진다.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그 분위기를 더했다.
그의 시선이 차도도와 신새벽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뭔가 잡담을 나누면서 고현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강우는 괜스레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차도도는 고현성의 담임이기도 하니까.
무대를 평정한 노래가 열기를 더하자 강우는 다음 단계를 연출했다.
급조한 포그머신으로 연기를 뿜으면서 프리즘을 이용한 조명으로 무지개를 허공에 걸었다. 마치 고현성의 머리 위로 무지개가 걸린 듯했다. 그 무지개는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우와! 멋있다!”
윤수아가 들뜬 목소리로 환호했다.
연극 때 넣은 효과와 또 다른 맛이 있다. 연극은 실내였고 지금 이곳은 야외다. 게다가 어둠이 내린 밤이다. 어둠과 밝은 조명이 적절한 대비를 이루면서 무지개를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그래, 이게 바로 뉴턴이 해석한 빛의 분산이니까.”
앞에서 본 연극과 연관 지으며 감탄하던 강우는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열심히 제작한 상온 제설기.
노래가 절정에 이를 때쯤 제설기가 돌아가고 만들어진 눈이 허공에 뿌려졌다.
고현성의 노래가 끝났다.
기타 반주를 마무리한 고현성은 공연을 끝냈다는 기쁨에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기타 소리에 이어 음악이 깔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강우가 만든 인공눈이다.
“눈?”
이상하게도 눈은 무대 주변에서만 내리고 있었다. 흰 눈에 무지개가 어리며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그리고 아련한 미성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노래에 고현성은 당황했다. 빨리 무대를 내려가야 하나? 다음 주자가 누구였더라?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옆으로 시선을 돌린 고현성은 무대로 걸어 나오는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손차희였다. 그녀가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대 중앙에 등장하고 있었다.
마치 고현성이 부른 노래의 답가처럼 손차희의 목소리가 무대를 휘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눈 오는 밤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았다.
손차희의 노래가 고현성을 비롯하여 관객의 가슴을 울렸다.
강우는 예전에 손차희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홀로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일 년 동안 몰려다니면서도 함께 노래방을 간 적이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손차희를 보고 있자니 윤수아가 옆에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거봐. 차희 노래 잘 부른다고 했잖아.”
“그, 그렇네.”
“지금 고현성은 꽃다발보다 더 감격했을걸.”
“관객들도 그렇겠지.”
저러니 손차희는 인기인이 아닐 수 없다. 공부 잘하지, 예쁘지, 노래 잘 부르지.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다.
강우는 손차희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했다.
손차희의 노래에 고현성이 호응하면서 노래는 두 사람의 합창으로 변했다. 의외로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아! 좋다!”
윤수아가 노래에 취해 감탄사를 연발했다.
눈이 내리는 밤에 두 남녀의 합창은 모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마지막에는 총천연색 불꽃놀이 효과까지. 오늘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강우가 만든 제설기의 효과가 아니었더라도 두 사람의 노래는 단연 최고였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의 스타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