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39화 (139/325)

제139화 겨울방학 (1)

강우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요셉 교수와 통화했다.

- 당연히 자네가 현재 추진하는 연구는 상온핵융합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게임 체인저야. 나는 그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고 먼 훗날 실제로 그렇게 될걸세.

“고맙습니다.”

- 그런데 말이지, 내가 알기로는 비슷한 연구를 한 사람이 있어.

“그렇겠지요. 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스스럼없는 강우의 대답에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이윽고 다시 요셉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손강우라고 아나?

가슴이 뛴다. 이제는 아득한 과거의 이름이고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이건만 손강우란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순간 강우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 손강우는 살아있구나. 핵융합계에서 살아있구나!’

그 감동 때문에 휴대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손강우를 숨겨야 할까? 드러내야 할까? 물론 지금 자신이 손강우가 죽고 나서 빙의한 거라는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믿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압니다.”

강우는 짧게 대답했다.

- 어떻게?

“제가 핵융합 쪽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분을 몇 번 찾아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방향으로 전문가를 만나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당시에는 중학생이었습니다만, 인생을 바꿀 정도로 의미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순식간에 강우는 손강우와 지식적인 교류를 한 적이 있는 사람이 됐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 두는 게 설명하기 편했다. 자연과학에서는, 적어도 최근 들어서는 갑자기 새로운 이론이 튀어나올 수 없다.

현대 과학은 과거의 지식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손강우와의 교류는 현재 핵융합 분야에 있어서 강우의 천재성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로써 강우를 향한 요셉 교수의 믿음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 그랬군. 그래서 강우 군의 주장이 손강우 교수와 유사한 부분이 있었군.

다행히 요셉 교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강우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이 문제 때문에 멀리 전화하진 않았을 테고. 분명히 다른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 강우는 머리를 굴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혹시 한국대 마도환 교수라고 아나?

역시 예상을 피해 가지 않는다. 손강우의 이름이 나오는가 싶더니 마도환의 이름도 나왔다. 이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핵융합 연구의 선두주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압니다.”

- 어떤 관계지?

“얼마 전 물리학회 학술발표장에서 만났습니다. 아직은 얼굴만 아는 사이이고 특별한 교류는 없었습니다.”

- 그런가…….

강우는 오늘 요셉 교수의 전화 주요 내용이 바로 이 마도환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니 요셉 교수가 마도환을 아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번 학교에 강연을 왔을 때도 마도환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으니까.

- 실은 마도환 교수가 미국 방산업체에 프로젝트를 제안했네. 소형 상온핵융합 원자로 프로젝트지. 원래 이 프로젝트는 손강우 교수가 미국 방산업체와 계획했던 것인데 손강우 교수가 죽는 바람에…….

강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던 일이었다. 손강우가 추진하던 연구 프로젝트를 마도환이 이어받았다고 한다. 손강우의 앞길을 사사건건 방해했던 마도환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 과실을 훔쳐 가려 하고 있었다.

마도환이 손강우를 죽인 이유도 분명해졌다. 손강우가 없는 세상에서는 마도환이 이 분야에서 일인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강우의 판단으로는 마도환은 미국 방산업체와 프로젝트를 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도환 측에서 제안했다는 것은…….

- 마도환 교수도 꽤 실력자이긴 하네. 지금까지 손강우 그늘에 가려 있었던 듯하지만, 한국에서는 손강우 이상으로 이름이 높으니까. 겉으로 본다면 손강우의 빈자리를 마도환이 채운다고 해서 딱히 이상하지 않네. 손강우의 죽음으로 프로젝트가 좌초된 방산업체에서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고 있으니까.

강우는 요셉 교수의 짧은 상황 설명에서 그동안 진행된 과정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마도환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상황이 마도환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 다만 나는 프로젝트 진행을 의심하고 있네. 방산업체의 의뢰로 마도환에 관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적어도 지금까지 마도환은 새로운 이론이나 기술을 개발한 적이 없네. 핵융합계는 큰 난관에 부딪혀 있는데 이를 마도환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거지. 그가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에야.

강우는 요셉 교수의 뜻을 이해했다.

지난번에 손강우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던 이력까지 연결해보면 그 의사가 분명해진다. 몸이 달았던 방산업체는 어쩔 수 없이 마도환과 프로젝트를 체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요셉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을 테고. 요셉 교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불안했겠지.

‘마도환의 능력이라면 뻔하지.’

마도환이 자신 있게 방산업체에 제안한 근거는 손강우의 연구자료를 손에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전에 한국대 실험실에서 보았던 손강우 피씨 내부에 있는 자료들. 그때부터 6개월 이상 지났으니 그랬을 가능성이 무척 컸다.

아마 이를 토대로 미국 방산업체에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것이고.

강우는 쓴웃음을 토해냈다. 그 피씨에 있는 자료는 미완이다. 그것만으로는 절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연구였으니까.

그는 마도환이 해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아마 마도환 본인도 알 것이다.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 참여는 사기에 가까운 짓이었다.

- 프로젝트의 자문역을 맡은 나로서는 여러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네. 그래서 말인데…….

요셉 교수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기색이다.

- 나는 마도환 교수보다 오히려 자네의 아이디어가 더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보네. 마침 자네가 손강우 교수와 관련 있다고 하니 그 가능성이 더 커지는군.

얼핏 요셉 교수가 한낱 고등학생인 그를 높이 사는 점이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그 이외에 마땅한 사람이 없다.

요셉 교수가 볼 때 현재의 강우는 아직 실력이 부족할지라도 아이디어 측면에서는 기존 연구진을 능가한다. 즉 그의 창의력을 높이 산다는 뜻이다.

강의가 보낸 연구 요약본이 그런 견해를 더욱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 혹시 자네가 그 프로젝트를 수행할 생각이 있나?

“제가요?”

- 어차피 마도환 교수가 연구할 거야. 자네는 일종의 보험일세. 업체로 보자면 그리 큰돈이 아니거든. 업체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거지. 물론 학생인 자네가 전체 프로젝트를 모두 할 수는 없고 핵심 분야만 조금 거들면 되네.

“마도환 교수와 함께요?”

- 아니. 자네의 존재는 아직은 비밀이었으면 해. 마도환 교수와는 별도야. 자네가 개입하더라도 자네 프로젝트 규모는 마도환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네. 자네도 딱 받는 만큼만 일해주면 되니까.

요셉 교수의 뜻을 알 것 같다.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성사하고자 이런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물론 강우에게도 나쁘지는 않다. 일단 지금의 그는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방산업체에 한 번 제안해보겠네.

“저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프로젝트와 무관하게 관련 연구를 계속해나갈 생각이니까요.

- 그럼 잘됐네.

프로젝트에 발을 담가 놓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주도권이 마도환으로부터 강우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마도환이 실패하면 선택지는 강우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거고 업체에서도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그를 중용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굴욕을 단숨에 만회할 수 있다. 사실 지금 마도환보다 낮은 몸값을 굴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는 고등학생이고 마도환은 한국대 교수인데.

- 그런데 아무리 나여도 한국의 이름 없는 고등학생을 적임자라고 소개할 수는 없잖나?

“그렇겠죠?”

- 그래서 빨리 논문을 하나 완성해서 발표해주게. 이 동네에서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오늘 요셉 교수가 급히 전화한 이유가 나왔다.

결론은 핵융합 관련 논문을 유명 학술지에 실어달라는 뜻이다. 프로젝트는 그다음부터 추진할 수 있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강우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그의 계획과도 부합한다.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 상세한 내용은 다시 이메일로 보내겠네. 수고하게.

전화를 마무리했다.

강우는 휴대폰을 끄고 요셉 교수의 의견을 정리했다. 예상보다 빨리 제안이 왔지만 언젠가는 올 일이다. 그는 요셉 교수에게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린 강우는 차도도에게 톡을 넣었다.

- 강우 : 쌤?

- 차도도 쌤 : 아직 안 잤어?

- 강우 : 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자요.

- 차도도 쌤 : 키 크려면 일찍 자야지.

- 강우 : 지금도 쌤보다 크거든요!

- 차도도 쌤 : 어휴. 무슨 일인데?

- 강우 : 그때 핵융합 연구과제 맡긴 거 어떻게 됐어요?

- 차도도 쌤 : 아! 그거…….

톡이 끊어졌다. 대충 상황은 짐작된다. 이제 막 핵융합 연구에 뛰어든 그녀가 벌써 제대로 역량을 발휘할 순 없다. 아직은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다.

- 강우 : 그게 급해졌어요. 요셉 교수가 빨리 진행하자네요.

- 차도도 쌤 : 아!

- 강우 : 그러니까 현재 진행 상황을 수시로 저에게 알려주셔야 해요.

- 차도도 쌤 : 흑흑(이모티콘), 알았어. 매일 보고할게. 어째 네가 선생님이고 내가 학생 같지?

지난 1년간 강우는 거의 매일 차도도에게 그날 공부한 내용을 밤에 보고했었다. 지금 상황은 그 관계가 딱 역전됐다.

그 사실을 깨달은 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 강우 : 방학이라 그래도 여유 있으시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주셔야 해요. 막히는 것 있으면 바로 물어보시고요.

- 차도도 쌤 : 완전 시어머니구나. 알았어. 더 노력할게.

- 강우 : 안녕히 주무세요.

- 차도도 쌤 : 잘자. 파이팅(이모티콘)!

톡을 마무리한 강우는 뿌듯한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마치 차도도를 대학원생으로 받아들인 교수와 같은 기분이다.

이럴 때일수록 확실하게 그가 갑임을 확인시켜야 하는데…… 아! 이런 기분에서 갑질할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강우는 곧바로 신새벽에게 톡을 넣었다.

- 강우 : 쌤?

- 신새벽 쌤 : 자는데 왜 깨워?

- 강우 : 거짓말. 자는 사람이 무슨 톡을 이리 일찍 받아요?

- 신새벽 쌤 : 티비 보다가 자려고 침대에 누웠어.

신새벽이 지금 취한 자세가 눈에 그려진다. 강우는 악마의 미소를 머금었다.

- 강우 : 쌤! 신새벽 학생! 지금 잠이 오나? 논문 써야지!

- 신새벽 쌤 : 헉! 갑자기 웬 논문? 잠이 부족하면 피부 상하거든!

- 강우 : 쌤! 어이! 신새벽 학생! 자료 조사 어디까지 했어? 보고해!

- 신새벽 쌤 : 어?(이모티콘).

어리둥절한 표정의 이모티콘에 강우는 폭소를 터트렸다. 신새벽을 놀려 먹는 재미가 남다르다.

- 강우 : 대학원생이면 말을 잘 들어야지! 대학원생은 을도 아니고 병이야 병!

- 신새벽 쌤 : 흑흑(이모티콘)!

- 강우 : 방학이라고 기가 빠졌군. 그냥 두면 안 되겠네.

- 신새벽 쌤 : 으악(이모티콘)!

엉겁결에 폭소를 터트린 강우는 그제야 농담을 멈췄다.

- 강우 : 아무튼 내일부터는 매일 저녁에 공부한 거 보고하세요.

- 신새벽 쌤 : 아이고 내 팔자야. 알았어.

신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신새벽에게 갈굼을 당한 게 엊그제인데 비록 톡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가 갈구고 있다.

“크크, 스트레스는 이렇게 푸는 거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