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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40화 (140/325)

제140화 겨울방학 (2)

강우네 어머니는 요즘 읍내 식당으로 일을 나갔다.

누구나 짐작하듯 홀어머니가 자식을 키우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원래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강우의 학비나 생활비가 만만치 않기도 했다.

강우도 그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집안에 보탬이 될 프로젝트에 더욱 신경을 쏟고 있었다.

프로야구단 프로젝트에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한결 어려움이 풀리겠지만…….

“일 나가세요?”

점심이 되기 전 어머니는 오늘도 길을 떠났다.

“후딱 다녀오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아니다. 앞으로 네가 대학 들어가면 돈 들어갈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강우를 돌아봤다.

강우는 저 표정에 담긴 그녀의 속내를 안다. 남들만큼 못 해주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조금만 지나면 이제 일 안 나가셔도 돼요.”

“네가 번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어린 네가 벌어봐야 얼마 번다고.”

“아마 다음 달부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 알았다. 어쨌든 다녀오마.”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를 강우는 조용히 배웅했다. 지금 나가면 저녁 늦게야 돌아온다. 그렇게 번 돈으로 두 가족이 간신히 살아간다.

지금은 강우도 안다. 사회배려자 전형이 아니었다면 그는 고려 과학고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읍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어쩌면 지금보다 더 어렵게 살았겠지.

“너도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운동 좀 하거라. 무슨 일을 하든 몸이 튼튼해야 해.”

그때 낙상으로 며칠 병원 신세를 진 이후 그만 보면 잔소리하는 어머니다.

“알아요.”

강우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이 생활도 익숙해졌다. 마치 친어머니인 것처럼.

요셉 교수가 제안한 프로젝트 건을 얼른 처리해야겠다는 의욕이 솟구친다. 그래야 모든 일이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그러려면 차도도를 더 다그쳐야 한다. 물론 그가 홀로 끝내버려도 상관없지만 길게 보면 좋지 않았다. 며칠 일찍 학교로 돌아가야겠다.

강우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예전에 손강우 시절 연구했던 내용과 차도도에게 설명하다가 불현듯 깨달았던 결과를 나란히 비교했다.

이제 마도환도 손강우의 연구자료를 손에 넣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 있게 미국 방산업체에 제안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연구자료만으로 과연 핵융합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낼 수 있을까?

“푸하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가 아는 마도환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과거에 그렇게 그의 앞길을 막을 필요도 없었다.

연구 전체의 흐름을 볼 줄도 모르는 마도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은 손강우 자료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남은 문제가 더 험난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손을 들 테고 달리 방법이 없는 방산업체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로 프로젝트를 넘기는 쪽으로 진행할 것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요셉과 차도도를 통해서 하겠지만.

* * *

강우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대비 한국대 겨울학교가 시작되기 3일 전에 서울로 올라갔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기숙사 거주 허락을 받은 날에 돌아와야 했으나 요셉 교수의 전화 이후 일정을 당겼다.

일단 차도도가 수행한 과제 점검부터.

집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차도도는 학교가 아닌 집으로 그를 불렀다. 학교로 갈 시간조차 없다는 뜻이다.

“쌤?”

위층 서재에는 머리를 헝클어트린 한 여인이 책상 앞에 몰골인 채 앉아있었다.

그의 부름에도 차도도는 여전히 반응 없이 책상 위만 집중하고 있었다.

차도도를 알고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녀가 이렇게 망가진 모습은 처음 봤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인 그녀는 세상의 관심을 끊은 폐인처럼 변해있었다. 누가 보면 게임 폐인인 줄…….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굶었어.”

“언제부터요?”

“어제저녁부터.”

거의 하루를 굶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밥은 드시면서 해야죠.”

“다이어트 중이야.”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책에 고정되어 있고 손에 쥔 샤프로 끊임없이 뭔가를 써 내려가고 있다.

다이어트를 할 리 없는 그녀이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가 온다는 소식에 뭔가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그녀가 지나치게 무리한 탓이다.

저 집중력을 보면 차도도 또한 비범한 천재일 가능성이 무척 크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은 천재의 기본적인 특성이니까. 저런 집념이 없다면 어느 분야에서든 크게 성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해결은 했어요?”

강우는 차도도 옆에 의자를 빼내 앉으면서 자료를 훑었다.

그제야 책에 고정되었던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수그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그와 만났다.

보름 만에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은 듯 평소와 달리 산발한 얼굴이지만 선명한 이목구비와 반짝이는 눈빛은 그녀의 본바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천재의 본색이 학원에서 갈고 닦아야 드러나는 게 아니듯 미모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빛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제대로 안 풀려. 대충 다 하긴 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허탈감이 담겨 있었다.

강우는 그녀의 샤프가 가리키는 수식을 쭉 살폈다.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다. 차도도는 대학원 과정을 밟지 않았기에 학부 과정에서 배운 수학과 물리만으로는 지금 연구할 핵융합 문제를 든든하게 받치기 어렵다. 이를 명확하게 풀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수학적 토대가 필요하다.

19세기 발전한 미적분학이 20세기에 정립된 수학의 여러 개념과 만나면서 형성한 이론을 공부해야 한다. 현재의 차도도로서는 다소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가 옆에 붙어있었다면 바로 해결해주었겠지만 하필이면 방학 때라 떨어져 있는 바람에 그녀는 독학 아닌 독학을 하게 됐다.

“정말 거의 다 했네요.”

그녀의 풀이는 마지막 관문만 남겨두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예전의 그녀라면…… 어림없었을 것이다.

‘차도도의 능력이 늘었나?’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만날 때마다, 아니 그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때마다 차도도의 능력이 향상되는 기분이다.

잠시 고민하던 강우는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어쨌든 그녀의 천재성을 엿봤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여기까진 완벽하게 끝내고 싶었는데…….”

차도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엄청 많이 하신 거예요.”

“그래도…….”

“여기서 다음에는요…….”

강우는 차도도의 샤프를 빼앗은 다음 유려하게 수식을 풀었다.

“아!”

그녀의 입에서 허탈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풀 수 있었는데 아깝게 놓쳤다는 뜻인지 아니면 강우에게 져서 속상하다는 뜻인지 알 길이 없다.

강우는 차도도의 눈길이 그의 수식을 잘 따라오고 있음을 확인한 뒤 설명을 계속했다.

끄덕끄덕.

차도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토해냈다.

“어젯밤부터 계속 고민했었는데 그런 식으로 바로 풀리니까 뭔가 허탈해.”

“원래 알고 나면 쉬워요. 처음 답을 찾아내기가 어렵죠. 천재는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고 하잖아요?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익히면 그게 바로 천재죠.”

차도도는 대답 대신 그를 살피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흠,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아? 너도 독학한 거잖아?”

“그렇긴 한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이 막힌 강우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았다.

“저도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이 문제를 풀 때는 온종일 여기에 매달렸었고요.”

일부분만 진실인 변명을 했다.

대충 짐작한다는 듯 차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차도도에게 강우는 식사를 권했다.

“뭐라도 드셔야…….”

“신 선생님에게 사 오라고 해야겠어. 너도 신 선생님한테 볼일이 있지 않아?”

“있긴 한데…….”

“그럼 됐네.”

차도도가 재빨리 신새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우는 밥 먹으러 나가기 귀찮다는 그녀의 심정을 눈치챘다.

대화가 잘 된 듯 웃으며 전화를 끊은 차도도는 몸을 일으키며 강우에게 말했다.

“그럼 신 선생님 오면 문 열어줘. 난 좀 씻어야겠어.”

차도도가 강우를 홀로 내버려 두고 서재를 벗어났다.

* * *

신새벽의 집도 그리 멀지 않은 모양이다.

얼마 되지 않아 신새벽이 바로 달려왔다.

오늘 신새벽의 옷차림은 예전에 데이트할 때처럼은 아니어도 평소 학교에서 보던 차림새에 비해 꽤 예뻤다. 코트를 벗으니 하얀 블라우스와 무릎 위 스커트로 멋을 낸 모습이다.

“차 선생님은?”

“일단 우리 먼저 먹고 있으래요.”

강우는 그녀를 위층 서재로 안내했다.

어지럽게 널린 원서들을 목격한 신새벽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새벽은 들고 온 만두와 떡볶이를 펼쳐놓았다.

‘음, 떡볶이?’

손차희와 윤선아 때문에 떡볶이집을 많이 다녔던 걸 떠올린 강우는 여자들이 떡볶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근데 어디에 가셨는데?”

“지금 씻으시는 중.”

“흐음 그래?”

야릇한 표정으로 신새벽이 강우를 힐끔 쳐다봤다.

괜히 찔린 강우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오호, 흥미로는 장면인데? 제자랑 단둘이 있다가 제자만 남겨두고 욕실에서 샤워 중이라…….”

“크윽.”

말문이 막힌 강우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강우야? 너 빨개졌다.”

역시 신새벽은 어쩔 도리가 없다.

강우는 별수 없이 눈총만 날리고는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이제 반격할 시간.

“쌤! 쌤은 과제 다 하셨어요? 할 거 많았을 텐데?”

“나? 엄청 했는데…… 가 아니라 하려 했는데…….”

신새벽이 가져온 가방에서 주뼛 쭈뼛 자료와 노트를 꺼냈다.

대충 훑어보니 예상 대비 절반가량밖에 하지 않았다. 차도도가 예상보다 더 많이 했다면 신새벽은 그 반대다.

강우의 인상이 확 구겨지자 신새벽이 재빨리 변명했다.

“그, 그게 말이야, 네가 사흘이나 일찍 서울에 와서 그래. 원래 계획대로 왔으면 나도 거기에 맞춰서 다했을 거라고.”

학생들의 흔한 변명이 신새벽의 입에서 나왔다. 물론 그 변명이 진실임을 강우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한데요? 이 부분은 분명히 어저께 했다고 저에게 보고한 내용인데…….”

톡에서 했다고 보고한 부분이 아직 미완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거짓으로 보고했다는 뜻이다.

강우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하자 신새벽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야! 거짓말 좀 할 수 있지. 너도 생각해봐.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동안 네가 거짓으로 보고한 거 나도 다 알고 있었거든? 적어도 주기율표 적어오라고 했더니 복사해서 낸 녀석이 할 말은 아니지, 응?”

갑자기 과거의 허물까지 들춰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강우는 선생님도 학생과 마찬가지란 점이 흥미로웠다. 역시 선생님들도 가끔은 거짓말을 한다.

강우는 화난 표정을 지으며 신새벽을 쓱 훑어봤다.

움찔하는 신새벽이 오늘따라 귀엽게 보인다.

“그래서 잘했다는 건가요?”

“으음, 그건 아니지만……. 하여튼 나도 고충이 있다고.”

“저도 톡으로 보고할 때마다 고충이 있었다고요.”

“그래서 내가 벌 준 적 있었니? 넌 심심하면 톡에서 나를 막 굴렸잖아?”

심심하면 이라니? 딱 한 번 장난삼아 굴렸을 뿐인데. 누가 보면 맨날 괴롭히는 줄 착각하겠다.

“제가 언제요?”

강우가 발끈하는 순간 뒤에서 차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이구,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욕실 가운을 걸친 차도도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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