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겨울방학 (3)
마치 사고 치다 걸린 학생처럼 강우와 신새벽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두 사람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차례 째려본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좀 하라고. 아니면 너희 집에 가서 하든가.”
“내가 뭘…….”
불만으로 입이 쭉 나온 신새벽이 차도도의 눈빛을 다시 접하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배우러 온 학생이 옷차림이 그게 뭐야?”
신새벽이 차도도와 강우를 쓱 살피더니 불만을 토로했다.
“내 옷차림이 어때서?”
“좀 많이…… 짧잖아?”
“크, 이게 뭐가 짧아? 노출도 별로 없는데. 나보다 지금 네가 더 심하거든? 학생 앞에서 목욕 가운이 뭐야? 너 지금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지? 네가 훨씬 야해!”
바로 되치기당한 차도도가 제대로 반박을 못 했다.
강우는 별생각이 없다가 두 사람의 대화에 옷차림새를 살폈다.
신새벽의 치마가 조금 짧긴 하지만 심할 정도는 아니다. 반면 차도도는 목욕 가운이 길어서 다리도 종아리부터 노출된다. 게다가 가운을 띠로 꼭꼭 묶어서 상체는 노출이 거의 없다. 전혀 야하지 않은 차림새인데 신새벽의 설명은 듣는 순간 갑자기 묘한 눈으로 보게 된다.
강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숙제를 안 한 건 사실이긴 한데…… 너도 숙제 덜 했잖아?”
“어휴 말을 말자.”
말문이 막힌 차도도가 자리에 앉으며 떡볶이에 눈독을 들였다.
“얼마 만에 먹는 떡볶이야 이게…….”
떡볶이를 쿡 찍어 입에 넣으면서 차도도가 행복한 탄성을 발했다.
강우는 무안함을 감추고자 얼른 어묵으로 입을 채웠다.
신새벽도 가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강우야, 완전히 서울에 올라온 거야?”
“당분간은요.”
“기숙사에 살아?”
“이틀 뒤부터…….”
“어? 이틀간은 떠돌이네?”
살짝 안면을 찌푸리며 신새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틀간 어디에 있을 건데?”
“음, 찜질방이나 모텔이나…….”
생각해 보니 대책도 없이 미리 올라왔다. 무심코 궁색한 답변을 늘어놓던 강우는 금방 문제점을 깨달았다.
“미성년자는 그런 곳에 혼자는 안 될 텐데?”
“방법이 있겠죠. 인상 쓰면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푸흡!”
신새벽과 차도도의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강우의 외모로 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신새벽과 차도도가 서로 눈치를 본다. 그 분위기가 어째 조금 이상하다.
“좋아, 인심 썼다. 이틀간 강우를 우리 집에서 재운다.”
신새벽이 호기롭게 선언했다.
곧바로 차도도가 반박했다.
“넌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올? 미모의 담임과 제자가 한집에? 이거 뉴스에 나올 일인데?”
“그 입 좀 다물지?”
“강우야, 밤에 확 덮쳐버려!”
신새벽의 입을 말리기 어렵다. 강우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대로 두면 또 무슨 기발한 음담패설들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자, 시간 없으니 하던 거 계속하죠. 그래서 이 부분도 안 했고, 이 부분도 미진하고…….”
강우는 신새벽 노트를 조목조목 짚으며 부족한 부분을 나열했다.
신새벽도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다시 말하지만, 그 부분은 이틀 후면 확실하게 할 수 있었어.”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 수소 원자와 중수소 원자 부분은 약간 문제가 있어요. 그게 흔히 물리적 관점에서는 밀도를 비롯하여 차이가 나지만 어차피 전자가 한 개라 화학적 관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하는데요, 그게 양자역학적 관점으로 들어가면…….”
설명을 늘어놓던 강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예전에 사용했던 투명칠판이 눈에 들어왔다.
“자, 지금부터 세부적인 부분을 설명할게요.”
강우는 투명칠판에 수소, 중수소, 삼중수소의 원자핵을 그리고 전자껍질 분포를 간략하게 표시했다.
이어서 그의 손에서 복잡한 수식이 나열됐다. 통계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수소 원자의 거동이다.
신새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난 며칠간 그녀가 막혀서 끙끙대던 부분이다. 그 내용을 마치 족집게처럼 명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강우를 볼 때마다 그녀는 신기함을 넘어 경외심을 느낀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받아들였다.
이제는 진짜 대학원생과 교수와 같은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지금 모습은 그 이상이었다.
교수라도 평범한 교수는 아니다. 아마 노벨상을 받은 세계적인 석학이라면 지금과 같은 포스를 뿜어내지 않을까.
‘천재는 천재인데……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천재…….’
어느 순간부터 강우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들뜬다.
처음에는 이 보석 같은 아이를 잘 다듬어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오판이었으며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다듬지 않은 원석이 아니라 이미 찬란한 빛을 내는 보석이었으니까.
보석을 보면 소유하고 싶은 것이 여인의 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강우를 갖고 싶어졌다. 자신이 강우의 담임이 되고 싶었고 함께 과제연구를 수행하고 싶었으며 함께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가끔은 엉뚱한 상상까지 해보는 그녀였다.
신새벽의 눈이 옆에 앉은 차도도를 슬쩍 훑었다.
차도도의 표정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 여자이기에 그녀는 차도도의 내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본인의 과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선에서 비슷한 조짐을 느꼈다.
경쟁자다!
신새벽은 다시 강의에 집중했다.
마치 신들린 듯 강우가 투명칠판에 수식을 끝없이 써 내려간다. 수식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안개에 갇혀 있던 진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기분이다. 그는 이 세상을 진리의 빛으로 밝히는 현자였고 저 세상을 무지의 어둠에서 구원하는 구세주였다.
신새벽은 읽었던 참고논문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며칠간 막혔던 안개를 말끔하게 걷어냈다. 역시 강우는 모르는 것이 없다!
칠판 한가득 수식을 늘어놓은 강우가 마지막 지점에서 멈췄다.
“이해했어요?”
“응, 이해했어!”
신새벽이 환하게 웃었다.
“여기까지가 바로 현재까지 연구된 지점이고요, 다음부터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죠. 이 의문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풀어내면 그게 바로 논문이 되는 겁니다. 여기부터는 제가 도와드리기 어려워요. 할 수 있죠?”
“응, 강우가 도와주면.”
“앞으로 2년이나 남았으니까 스스로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어려워 보이는데…….”
“신새벽 쌤도 관련 수학에 조금 더 신경 쓰셔야 해요. 현재 수학적 기반이 얕아서 지장이 있거든요. 제가 몇 편의 수학 논문을 알려드릴 테니까 그 이론을 접목하시면…….”
신새벽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화학을 좋아하지만 수학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강우가 말하는 수학은 수학이라 말하기 어려운 끔찍한 괴물이다.
그런 와중에도 신새벽은 모범생처럼 칠판에 적힌 수식을 노트에 옮겨적고 있다.
강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흐, 이러면 당장 급한 일은 끝났나?”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원인을 찾아보니 차도도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괜히 무안해진 강우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쌤, 가운 벌어졌어요.”
“으악!”
차도도가 급히 가운을 여몄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 * *
놀랍게도 푸짐한 밥상이 차려졌다.
차도도는 부러운 얼굴로 시선을 떼지 못했고 신새벽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요리를 날랐다.
“우와! 신 쌤! 최고예요!”
강우는 연신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는 차도도의 제안을 신새벽이 거절하고 냉장고를 뒤졌다. 당연히 차도도의 냉장고에는 별것이 없었지만, 그 재료만을 사용해서 신새벽은 놀라운 요리 솜씨를 발휘했다.
마치 허공에서 요리를 꺼내는 마법사처럼 그녀가 움직이자 음식이 뚝딱 쏟아졌다.
신새벽은 요리 천재였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새벽의 요리 실력에 차도도는 좌절을 맛보았다.
당연히 먹을 것에 눈이 뒤집힌 강우는 연신 신새벽을 칭찬하며 감사했다.
가끔 차도도의 눈총이 느껴지지만 어쨌든 식사 자리에서는 밥을 주는 사람이 최고였다.
“쳇,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정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새벽이 차도도를 놀렸다.
차도도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몇 년 후라면.”
요리도 열심히 노력하면 느니까.
가차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신새벽 때문에 한층 차도도의 좌절감이 깊어졌다.
“자, 우리 교수님? 얼른 드세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거든요.”
신새벽이 애교를 부리며 강우 앞에 요리를 덜어주었다.
강우는 한입에 넣고 맛을 봤다.
“맛있지?”
“흐음! 과연!”
다시 엄지를 올리며 강우는 예전에 이곳에서 먹었던 차도도의 요리를 떠올렸다. 도무지 간이라고는 맞지 않던, 한 숟갈 떠먹고 숟가락을 놓았던 그 음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냥 그저 그런데?”
차도도가 방해 공작을 폈다.
“넌 먹지 마!”
신새벽의 호통에 차도도는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 포식한 적이 있을까 감탄할 정도로 강우는 배불리 먹었다.
배가 부르니 최대우 생각이 났다. 그 녀석한테도 이틀 일찍 올라오라고 할걸.
* * *
설거지까지 완벽하게 해치운 후 세 사람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창으로 화려한 서울 야경이 시선을 끌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이제는 감동이 다소 무뎌졌지만, 아직도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후련함이 있다.
“그래서 제가 일찍 올라온 이유는…….”
강우는 며칠 전 요셉 교수와의 통화를 밝혔다. 물론 마도환과 관련된 세세한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자신과 관련된 내용만 언급했다.
“미국 방산업체에서 상온핵융합 개발을 계획하고 있어요. 소형 상온핵융합 원자로죠. 앞으로 상온핵융합은 원자력 잠수함을 비롯하여 항공모함 등에 차세대 기술로 적용되리라 예상해요. 그래서 현재 물밑으로 개발연구를 수행 중인데…….”
강우는 간략하게 전략적인 장점을 설명했다.
“……요셉 교수는 그 계획의 핵심으로 제 아이디어를 이용해보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렇게 방산업체에 제안하려나 봐요. 즉 요셉 교수, 차도도 쌤, 저. 이렇게 세 사람을 공동연구자로 해서 개발계획에 참여하는 거죠.”
“프로젝트?”
“그렇죠. 연구비가 꽤 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추진한 카이스트와 프로야구단 프로젝트는 금액이 많지 않다. 말 그대로 최저 인건비 수준이다. 그런데 이 건은 차원이 다르다.
“그게 가능해?”
“요셉 교수잖아요.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이시니까 어렵지 않을 거예요.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고요. 기초연구가 잘 이뤄져서 실용 개발로 들어가면…… 적어도 열 배 이상 프로젝트가 커질 거예요.”
물론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고등학교 선생님과 학생이 주먹구구식으로 개발에 매달릴 수준을 훌쩍 벗어난다.
차도도와 신새벽은 무엇보다 요셉 교수가 강우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나도 물리로 전향하고 싶다!”
“신 쌤도 한 발을 이미 걸치고 있다니까요. 저만 믿으세요.”
이제는 강우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일은…….”
강우의 시선이 차도도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