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겨울방학 (4)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에 요셉 교수에게 논문을 보내야 합니다. 그 논문은 학술지에 실릴 예정이고 우리의 능력을 입증해줄 거예요.”
불과 두 달 만에 논문을 써야 한다는 말에 차도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최근 몇 달간 강우와 공부를 해왔으나 아직은 확실하게 장담하기 어려웠다.
“할 수 있을 거예요.”
강우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지금은 차도도가 그 내용을 소화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번 논문에서 차도도가 맡은 역할은 사실상 없다. 논문에 수록할 내용은 예전에 손강우가 연구했던 것과 얼마 전 이곳에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면 충분하다.
“열심히 할게.”
차도도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방학 때는 강우와 차도도에게 가장 한가한 시간이기에 이 시기에 해내야 한다.
“요셉 교수에게도 2월이 끝나기 전에 보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논문이 학술지에 실린 후부터 본격적으로 방산업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 겁니다.”
강우는 그 시점을 대략 내년 여름으로 잡았다. 이미 프로젝트에 시동을 건 마도환에 비하면 한발 늦었다고 볼 수 있으나 연구는 선착순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오래지 않아 역전을 자신했다.
“그래서 이번 방학 동안에는 정말 열심히 해야 해요.”
마치 선생님처럼 강우가 차도도를 격려했다.
“그럼 나는?”
“신 쌤도 열심히 하셔야죠. 물론 신 쌤이야 아직 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빨리빨리 해치우면 좋잖아요?”
“그래, 그렇지. 나야 천천히 하면 내 졸업만 조금 늦어질 뿐이니까. 차 쌤이랑 다르지.”
장난스러운 신새벽의 말에 차도도가 슬쩍 눈을 흘겼다.
“킥킥, 그러니까 차 쌤이 제대로 안 하면 팍팍 굴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으로 온 거예요.”
강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색이 확 변한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깔깔 웃었다.
보다 못한 차도도가 신새벽을 노려봤다.
“밥도 먹었는데 그만 가지?”
“강우 데려갈까?”
“재울 곳은 있고?”
“내 방!”
“혼자 가!”
차도도의 눈총에 신새벽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녀는 문을 나서며 강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또 올게. 그때 봐.”
“넌 내일 안 와도 돼.”
“내 맘이다! 강우야! 오늘 밤에 몸조심해. 혹시 차 쌤이 덮칠지도 모르니까. 킥킥!”
얼른 사라지라고 다그치는 차도도를 피해서 신새벽이 재빨리 달아났다.
* * *
야밤에 거실에 두 사람만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강우는 차도도의 눈치를 보다가 바깥 야경을 보다가를 반복했다.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신새벽이 괜히 이상한 말을 남긴 바람에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강우야, 침대는 거실 옆 저쪽 손님방을 사용하면 돼. 화장실도. 난 위층을 쓰니까 네가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네.”
“조금 이상하긴 한데…… 그렇다고 네가 이틀간 달리 머물 곳도 없잖아.”
“저야 감사하죠.”
정말 이곳이 아니면 달리 갈 곳이 없다. 몸을 의탁할 친한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손차희나 윤수아의 집에서 머무르겠다고 부탁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앞으로도 갈 곳 없으면 여기로 와. 내가 밥을 해주기는 어려워도 토스트 정도는 줄 수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어쨌든 강우는 서울에 잘 곳을 확보했다는 점이 무척 기뻤다.
“집 비밀번호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패스마저 확보했다. 이거 상관없나? 그래도 엄연히 그도 남자인데.
“쌤? 그렇게 막 알려주면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왜? 신 쌤 말처럼 내가 덮칠까 봐?”
“컥!”
아무래도 차도도는 그를 남자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신연령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이제 기껏 고등학교 1학년일 뿐이었다.
아! 한 달 후면 2학년으로 올라가는.
차도도도 무안한 듯 잠시 미소만 흘렸다.
“강우야, 이제 어떡할래? 밤이 늦었으니 편하게 쉬다가 자렴.”
“쌤은요?”
“난…… 아까 배운 거 다시 복습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내일 그 뒤편을 또 공부하지.”
이틀이 지나고 나면 강우는 기숙사로 돌아가고 낮에는 겨울학교에 다녀야 하기에 그에게 배울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차도도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속도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럼 저도 같이 공부할게요. 할 일이 많거든요.”
강우가 먼저 위층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먼저 올라가. 난 네 이불 펴놓고 갈게. 공부하다가 피곤하면 내려와서 자렴.”
계단을 오르면서 강우는 아마도 오늘 밤에는 잠잘 일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강우는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잠을 깼다.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낯선 주변 모습에 강우는 눈을 비볐다. 그랬다. 이곳은 그의 집이 아니었다.
사방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앞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있었다. 그 탁자에 엎어져서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그의 시선이 탁자에 엎어진 다른 사람에게 옮겨갔다.
긴 머리카락을 탁자에 흩트린 채 잠이 든 여인이 보였다. 차도도다.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자료 논문을 연구하면서 머리를 맞대다가 간신히 잠들었다. 그가 오기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몰두했던 차도도가 당연히 먼저 쓰러졌다.
지금도 저 요란한 초인종 소리라면 깰 법도 한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 침을 흘리며 자고 있지는 않다.
“힘들었나 보네.”
눈을 감은 차도도의 얼굴에 잠시 홀려있다가 강우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손강우 시절에는 이처럼 밤새워 연구에 몰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최근 들어서는 거의 없었기에 그도 무척 피곤함을 느꼈다.
강우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초인종을 확인했다.
“신새벽 선생님?”
“그래, 나야! 문 열어!”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세요?”
“일찍? 벌써 점심때거든! 둘이 불장난하는지 감시하려면 일찍 와야지!”
문을 열자 신새벽이 후다닥 들어왔다.
어제랑 다른 옷차림이지만 비슷한 모습이다. 반면 강우는 어제랑 같은 옷차림이지만 완전 다른 모습이다. 아직 세수도 안 한 얼굴이 부스스하다.
그의 몰골을 쳐다본 신새벽이 낄낄대며 웃었다.
“아니! 두 사람 대체 밤새도록 뭘 했길래 이 모양이야? 너! 자다가 나왔지?”
“네.”
“차 쌤은?”
“아직 주무시는데요?”
“킥킥, 둘이서 뜨거운 밤을 보냈구나!”
어휴. 강우는 혀를 끌끌 찼다. 물론 농담임을 그도 안다.
신새벽이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탁자에 널브러져 잠이든 차도도를 목격한 신새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님이 어제 밤새도록 막 굴렸나 보네.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파김치가 됐어.”
“조금밖에 안 했다고요.”
강우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조금이긴 하다. 저 투명칠판 가득하게 수식을 대여섯 번밖에 설명하지 않았으니. 어지럽게 낙서한 듯한 칠판과 탁자에 가득 쌓인 책이 이 밤 내내 얼마나 치열했는지 증명했다.
이미 내용을 이해한 그와 달리 차도도는 그때그때 머리를 굴리면서 받아들여야 했을 테니 그 집중도가 훨씬 높아야 했다. 당연히 피곤도 배가 되었을 것이다.
“너무 무리했나…….”
“공부만 잘했지 남을 배려할 줄 모르네.”
신새벽의 투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강우는 지은 죄가 있으니 입을 다물었다.
몇 차례 차도도를 건드리며 깨우려고 노력하던 신새벽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우리끼리 밥 먹으러 가자.”
강우는 세수도 못 한 채 끌려 나왔다.
* * *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IMO)는 전 세계 고등학생들의 수학 경연장이다.
우리나라는 그 대회에서 꽤 오랫동안 좋은 성적을 유지해왔다. 단체우승을 차지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 국가대표를 뽑기 위해 국내 수학 올림피아드(KMO)를 개최해서 국가대표를 선발한다.
단지 경시를 통해 선발하는 과정이 전부가 아니었다. 선발된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도 했다. 그런 이유로 방학 때마다 한국대에서 여름학교, 겨울학교를 열었다.
직접 수강하기 힘든 지방 학생들은 온라인으로 수강하기도 한다.
강우는 처음으로 겨울학교에 나갔다. 대한 수학회 이사 추천으로 수강 자격이 생겼기 때문이다. 겨울학교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다면 그는 봄에 KMO 최종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겨울학교는 그에게 꽤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아! 지겨워.”
한국대를 들어서면서 강우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 뻔질나게 돌아다녔던 한국대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서였다. 손강우 시절에 10년 넘게 다녔어도 정겨움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힘들어!”
옆에서 최대우가 헉헉대며 따라왔다.
한국대는 규모로도 유명하지만, 오르막으로도 유명하다. 이 가파른 오르막은 포동포동한 최대우에게는 역시 넘사벽이었나. 괜히 강우는 미안해졌다.
수학 겨울학교에 맞춰 물리도 겨울학교가 열렸다. 온라인 서류전형과 온라인 경시로 치른 물리 시험에서 최대우는 당당하게 합격했다. 덕분에 같은 날 겨울학교 수강생이 됐다.
“어디까지 가야 해?”
“저기 건물 보이지? 저기가 그때 우리가 견학했던 물리학과 실험실이 있던 곳이고…… 넌 저기까지야.”
강우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한 번 와 본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정확도와 눈썰미였지만 오르막에 후달리는 최대우는 그런 점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겨울 추위도 오르막 앞에서는 여름으로 바뀌었다.
“그럼 넌 어디야?”
“난 그 건물 조금 뒤에 작은 건물 보이지? 저어기…….”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 최대우는 힘을 냈다.
앞뒤로 같은 목적지를 가는 듯한 학생들이 보인다. 그 일부는 이곳 한국대 학생이고 남은 일부는 그들처럼 겨울학교에 등교한 고등학생이다.
꾸역꾸역 올라가고 있자니 뒤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오르막길을?’
뒤를 홱 돌아보니 키 작은 남학생이 달려오고 있었다. 짧게 친 스포츠머리에 자그마한 키, 추위를 피하느라 온몸을 감싼 패딩까지, 대충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다.
어쩐지 체력이 좋더라. 젊으니까. 고등학생이 돼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정신연령만큼은 이미 팍삭 늙은 강우는 그 학생의 청춘이 부럽다며 투덜댔다.
막 그들을 지나치던 학생이 다시 돌아왔다.
“말 좀 물을게요.”
“헉헉! 아이구 힘들어. 물어봐요. 너무 세게 물지 말고요.”
강우의 우스꽝스러운 답변에 학생이 한참을 킥킥대며 웃더니 간신히 진정했다.
“수리과학관이 어디예요?”
“아! 거기요?”
강우는 저 앞에 보이는 도로변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죠? 저기예요. 근데 거긴 왜요?”
마침 강우의 목적지다. 그곳에서 오늘 수학 겨울학교를 연다고 했다.
“거기에서 개강한다던데…….”
“으잉?”
강우는 학생을 다시 훑었다.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이라 하기엔…….
놀란 강우의 표정을 확인한 학생이 다시 말했다.
“……형도 거기 가세요?”
“어…… 그런데요?”
“이 뚱뚱한 형도?”
“커윽!”
최대우가 낙담해서 눈을 부라렸다. 구김살 없는 아이라 차마 화를 낼 수가 없다.
“나, 난…… 물리 겨울학교.”
“아하!”
바로 이해한 학생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이 곧바로 강우 옆에 붙었다.
“그럼 난 형만 따라가면 되겠네요. 어딘지 몰라 걱정했는데 신난다!”
귀엽게 생긴 천진난만한 학생이니 경계심은 들지 않는다, 괜히 귀찮아진 강우는 신경을 껐다.
혼자서 좋아하던 학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 이름이 뭐예요? 우리 엄마가 친구 많이 사귀라고 했거든요. 나중에도 자주 만날 형들이라고요. 그래서 만날 때마다 이름을…….”
“난 강우.”
녀석이 무척 수다스러운 듯하여 후다닥 대답했다.
“난 은찬이. 하은찬! 제 이름이 무슨 뜻이냐 하면요…….”
순간 강우는 학생의 머리 위에 어리는 찬란한 빛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