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겨울학교 (4)
떡볶이를 먹는다고 신이 난 손차희와 하은찬과 달리 강우는 차도도와 신새벽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내가 왜 누나지?”
“그럼 동생 할래요?”
말문이 막힌 신새벽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친누나야?”
“아뇨. 아는 동네 누나.”
“응? 그거 뉘앙스가 좀 이상한데?”
생각이 어떻게 그쪽으로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대충 배를 채운 하은찬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아! 형! 수학 과외 이야기 들었어요? 새로운 과외가 생겼는데…… 그게요 김상학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대충 표정을 보니 강우를 제외하고는 다 아는 이름인 듯했다. 심지어 차도도와 신새벽도 누군지 아는 표정이다.
“누군데?”
“고려 과학고 선배래요. 3년 전에 졸업했고, 현재는 미국 버클리 대학교 수학과에 다니는데 이번에 국내로 들어온 데요. 그 형이 좀 이상한 형인데…….”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지 강우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김상학은 고려 과학고 재학 중에 국제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2연패 했었다고 한다. 예전에 정명욱이 언급했던 고려 과학고 3대 천재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큰 업적을 남긴 김상학이 유학을 떠났다가 잠시 휴학하고 국내로 들어오니 학원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수학 국제 올림피아드 수상자가 경험을 토대로 올림피아드 대비반을 가르친다니!
엄밀히 따져서 이 경우는 유명 수학 강사보다 훨씬 실전적이고 보탬이 된다. 덕분에 대치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김상학에게 배워서 수학 올림피아드를 대비하겠다는 학생이 줄을 섰다.
당연히 김상학의 몸값도 수강료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해당 학원에서는 김상학 수업을 고액 팀과외 형태로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엄마가 김상학 선배 수업을 6개월 들으라고 하셨거든요. 올해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상을 받으려면. 형 생각은 어때요?”
당연히 강우는 아는 내용이 없어 손차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차희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이야긴 들었어. 이왕 올림피아드 준비할 거면 그 선배 수업 들으라고.”
“누나도 수강하세요?”
“아니, 난 주변에 이미 훌륭한 선생님이 있어서.”
손차희가 강우를 힐끗 쳐다봤다.
“그 사람, 고려 과학고를 졸업한 천재라고 들은 기억이 있어.”
차도도가 신새벽에게 동의를 구했고 신새벽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실제 올림피아드 수상자에게 배우는 것은 일반 과목에서 한국대생에게 과외를 받는 것과 같다. 학원에서 수많은 수학 강사가 올림피아드 대비반을 가르치지만, 그 가운데 국제 올림피아드 수상자는 눈 뜨고 찾아봐도 없기도 했다.
강우는 웃으면서 견해를 밝혔다.
“나쁘진 않겠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틀에 박힌 방식의 교육은 오히려 학생의 천재성을 제약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형은?”
“난 수학 올림피아드에 목을 매지 않아서…….”
“하긴 숙제도 버벅거리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방에 강우를 깔아뭉개 버린 하은찬의 대답에 모두가 실소를 머금었다.
내버려 두면 무슨 말이 더 튀어나올지 몰라 강우는 서둘러 정리했다.
“자! 이번 금요일 치는 시험으로 중앙고와 한판 붙기로 했으니까 열심히 공부해. 적어도 교재에 나온 문제는 모두 풀어봐야지. 난 이 누나와 함께 화학을 공부할 테니까.”
생각에 잠기던 하은찬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 이제 알았다!”
“뭘?”
“그 대결에서 제일 점수가 낮은 한 사람을 빼기로 했잖아요?”
“근데?”
“그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았어요. 안전장치였어!”
뜨끔한 강우는 공부하자고 독려한 후 신새벽의 옆에서 화학책을 들여다보았다.
각자 공부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후 차도도는 유심히 하은찬을 관찰했다. 과연 강우가 데려올 법한 특이한 녀석이다. 어쩌면 강우가 이 아이의 천재성을 꿰뚫어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관심이 갔다.
열심히 숙제하던 하은찬이 차도도의 눈길을 느끼고는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예쁜 누나?”
“어…… 응?”
“누나 물리 한댔죠? 원래 동네 누나들은 물리 잘 안 하는데 누나는 특이하게…….”
“어…… 그런데?”
“저도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제가 과학 과목 중엔 물리가 제일 약한데요.”
“왜 하필이면 나야?”
“예쁘잖아요.”
차도도는 갑자기 골치가 지근지근 아파졌다. 아무리 봐도 이 녀석도 강우랑 비슷한 부류인 것 같다.
“수학부터 해라, 응?”
차도도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며 논문을 폈다.
* * *
금요일 시험은 비교적 무난했다.
수학 천재를 모아놓고 치는 시험이라 어려울 줄 알았지만 기우였다. 1차 올림피아드 시험보다 조금 더 어려운 수준. 덕분에 학생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다 쉽지는 않았다. 어디에나 킬러 문제는 있는 법이니까.
정작 강우는 시험을 적당히 쳤다.
굳이 양쪽 학교의 대결에 자신이 끼어들어 결과를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빠진 고려 과학고가 중앙 과학고와 한판 붙을 실력이 되는지 궁금했다.
“우리가 무조건 이겨!”
“우리 애들 봐라! 모두 얼굴이 밝잖아? 시험을 잘 쳤다는 소리지!”
“원래 자신 있는 사람은 얼굴에 표시를 내지 않는 법이야!”
“올킬 당한 녀석들이 시끄럽군!”
양 팀의 주장인 박일현과 안찬엽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두 주장이 눈을 부라리자 밑의 학생들 역시 날카롭게 기세를 올렸다.
‘어휴 어린 녀석들.’
강우는 한발 물러서서 흥미롭게 구경했다. 역시 라이벌 사이는 어디를 가나 조용하지 않다.
시험 점수는 월요일 수업이 끝나면서 받았다.
각자 채점된 답지를 들고 양쪽 학교 학생들이 모였다. 무려 열두 명이나 됐다.
긴장된 표정으로 모두가 자신의 점수를 공개했다.
최고점수는 안찬엽의 72점, 박일현은 아깝게도 70점을 받았다.
양쪽 금메달리스트의 자존심 싸움은 안찬엽의 판정승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실망을 달래던 박일현이 쓴웃음을 삼켰다.
“괜찮아, 난 후배를 믿어.”
이어서 다른 학생들도 점수를 공개했다.
역시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은 달랐다. 권유성은 당당하게 58점을 받았다.
손차희와 이민찬은 47점으로 점수가 같았다. 놀랍게도 예비 입학생인 하은찬은 52점으로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중앙 과학고 학생들의 점수도 대부분 고만고만했다. 40점대가 가장 많았다.
마지막으로 모두의 시선이 강우에게 모였다.
신입생 둘은 강우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학생들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강우가 올린 답지는 거의 텅 비어 있었고 그나마 1번을 푼 게 전부처럼 보였다. 강우의 점수는 최하인 24점이었다.
“에이.”
실망한 학생들을 향해 강우가 혼잣말로 변명했다.
“난 1차도 떨어졌었거든.”
“형! 너무 낙심하지 마요. 난 형이 하나도 못 풀 줄 알았는데…….”
돌직구를 날리는 하은찬 때문에 강우의 몸이 휘청했다.
재빨리 점수를 합산한 한 녀석이 결과를 발표했다.
“가장 아래 한 사람씩 빼고 하는 거 맞죠? 그럼 고곽은 24점을 빼고, 중곽은 37점짜리를 빼면…… 합산 점수로는 고곽이 12점 이겼네요.”
“아싸!”
고려 과학고가 이겼다. 환호하는 고려 과학고를 향해 중앙고 학생들이 아쉬움을 팍팍 드러냈다.
“한 사람 빼자고 한 게 누구야? 다 합쳤으면 우리가 1점 이겼다고!”
양측 학생들은 다시 서로가 잘났다고 열심히 언성을 높였다. 중앙 과학고에서 가장 아래 점수인 37점을 맞은 학생은 예비 신입생이었다.
“어쨌든 고곽이 이겼다! 고중전 합쳐서 2연승이야!”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런 떠들썩함이 좋다.
문득 그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안찬엽이었다.
녀석은 강우가 열심히 시험 치지 않은 진실을 안다는 표정이다. 강우는 상대를 향해 밝은 미소를 보냈다.
못 말리겠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안찬엽이 시선을 거뒀다.
보통 학생들이라면 단지 점수만 비교하고 끝이 났겠지만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풀지 못한 문제를 토론하며 연구했다.
역시 정답의 바이블은 안찬엽과 박일현의 답지였다.
“하! 이렇게 증명하는구나.”
“역시! 메달리스트의 접근 방식은 달라. 풀이가 깔끔하잖아!”
학생들은 연신 자신의 답지와 비교하면서 왜 틀렸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르는 내용을 넘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욕구가 이들의 천재성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다.
그렇게 한 문제 한 문제를 다시 풀고 토론하면서 학생들은 실력 상승을 실시간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난관에 봉착했다.
마지막 문제. 변별력을 위한 킬러 문제였다.
이 문제를 푼 사람은 없었고 대부분 한두 줄 끄적이다 포기했다. 그 풀이로는 부분점수마저 전혀 받지 못했다.
“형! 이건 어떻게 풀어요?”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졌으나 박일현은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겠어.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누구 푼 사람 없어?”
박일현의 시선을 받은 안찬엽도 바로 고개를 저었다.
“푼 사람 없나 보네. 내일 조교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때 하은찬이 손을 들었다.
“전 부분점수 받았는데요? 저도 솔직히 이게 왜 점수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요…….”
모두의 시선이 하은찬에게 쏠렸다.
놀랍게도 하은찬은 마지막 문제에서 5점이나 건졌다. 하은찬이 손차희보다 점수를 잘 받은 이유가 바로 이 마지막 문제 점수 때문이었다.
하은찬의 답지를 검토하면서 학생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짐작이 안 되는데?”
“저도 여기에서 더 진행 못 하고 딱 막혔어요. 그래도 부분점수를 줬으니까 여기까지는 맞다는다는 뜻 아닐까요? 머리를 더 굴리자니 시간도 없고…….”
IQ 80인 사람 둘이 모인다고 IQ 160이 되지는 않는다. 바보가 아무리 많이 모여도 바보일 뿐이다.
바로 이런 상황이 그 진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동안 고민에 잠겨 눈을 찌푸리던 권유성이 강우에게 물었다.
“넌 풀었어?”
강우는 피식 웃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긴…… 24점인데 물어볼 필요도 없지.”
권유성이 고개를 젓는 사이 손차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강우의 답지를 확 뒤집었다. 대부분 백지인 채였으나 놀랍게도 마지막 문제는 수식이 잔뜩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에 최고배점인 20점이 당당하게 적혀 있었다.
“어?”
“이게 뭐야?”
학생들이 얼이 빠져 답지에 시선을 모았다.
그들이 중지를 모아 고심해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던 정답이 바로 거기에 적혀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놀란 하은찬이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강우에게 소리쳤다.
“형! 이거 어떻게 풀었어요?”
“네가 어제 가르쳐줬잖아? 숙제 마지막 문제!”
“예?”
강우가 힌트를 말해줄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시험 마지막 문제와 어제 숙제로 낸 마지막 문제가 교묘하게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 문제를 강우에게 열심히 설명했던 하은찬마저도 그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
하은찬을 제외하고 모두가 강우의 천재성을 재차 눈으로 확인했다. 역시 24점은 제대로 시험 친 점수가 아니었다. 달리 올킬이 가능한 천재가 아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던 하은찬이 저만치 멀어진 강우에게 다시 소리쳤다.
“형? 지금 어디 가요?”
“물리 공부하러!”
“아싸! 예쁜 누나 나도 만나러 가야지!”
하은찬이 후다닥 짐을 챙겨 강우를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