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실마리 (1)
강우는 무거운 짐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모두 학생들이 써낸 리포트였다. 수학 과제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지금 그의 손에 들린 A4 뭉치는 명백하게 물리 리포트였다.
“아니 내가 이걸 왜!”
그는 불평을 터트리며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최대우를 쳐다봤다.
최대우는 그보다 한 뭉치나 더 많은 리포트 묶음을 들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는 하은찬이 신기한 듯 싱글벙글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당연히 녀석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물리실험실이었다.
수학 강의실에서 뛰쳐나온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돌아가려고 물리 겨울학교 강의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리포트를 들고 조교 뒤를 따라가는 최대우를 만났다.
이런 정도로 무거워하지 않을 최대우이지만 혼자 편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강우는 반사적으로 그를 도왔다. 그런데 예상외로 무거웠다. 덕분에 강우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조교 뒤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어느 실험실이야?”
“마도환 교수.”
참 안 끼는 데가 없다 싶었다.
그제야 앞에서 걷는 조교를 제대로 살펴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손강우 시절 그의 실험실 후배이자 학교 탐방에서 만났던 박사과정 학생, 김상원이다. 지금은 마도환 밑에서 가장 맏형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물리 겨울학교 조교가 마도환 교수 실험실의 김상원인 모양이다.
그때 처음 얼굴을 봤을 때는 어색하더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나마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네가 왜 리포트를 날라?”
“몸집이 노가다에 딱 어울린다고.”
“커윽!”
“농담이야, 설마 그렇게까지 말했겠어? 조교 쌤이 지난번에 본 얼굴을 기억하더라고.”
지금 당장에는 귀찮을지 모르지만 조교랑 친해져서 나쁠 일은 없다. 혹시 훗날 한국대 물리학과에 진학한다면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고.
열심히 따라가던 최대우가 뒤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하아! 저 자식은 왜 따라오냐?”
“나도 모르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핵입자 물리 연구실에 도착했다.
“후아!”
가져온 리포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펴고 있으니 김상원이 음료수 캔을 건넸다.
“어? 너도 왔네?”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마다. 그때 실험실 탐방 와서 발목 아프다고 하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다. 아니면 강우가 좀 특이하게 생겼거나.
“기억력 좋으시네요.”
“네가 잘 생겼잖아. 대우는 좀 특이하게 생겼고.”
“푸흡!”
무심코 음료수를 마시던 최대우가 한바탕 뿜었다.
“이 녀석은?”
“고려 과학고 후배인데요. 수학 겨울학교 다니는 중이죠.”
하은찬이 뒤에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모두 겨울학교에 다니나 보네. 셋 다 천재들인가?”
당연히 김상원의 접대성 멘트다. 한국대 대학원에는 고등학교 시절 여름학교, 겨울학교를 다녔던 학생이 널려 있다. 하지만 대학원생이 된 후 그들은 천재라 불리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저절로 알게 됐다.
이 실험실에 들어올 때부터 강우의 눈길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물건이 있다. 바로 이곳에 옮겨 놓은 손강우의 개인 피씨.
그날 피씨가 놓여 있던 책상 위는 현재 텅 비어 있었다.
“저기 있던 피씨가 사라졌네요?”
“아, 그거…… 그때도 말했었나? 우리 학교 물건이 아니고 어떤 작고한 교수님 것인데…….”
우여곡절이 많았던 듯 잠시 말을 멈춘 김상원이 책상을 바라봤다.
“그 피씨에 든 자료가 필요했었거든. 그때만 해도 그 자료에 암호가 걸려 있어서 풀지 못했었는데…… 결국 풀었어. 덕분에 자료를 얻을 수 있었지.”
“그럼 그 피씨는?”
강우는 당연히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버렸어. 죽은 사람 물건이라 쓰기 찜찜하다고 해서.”
예상했던 일이다. 그 자료를 강우 자신도 다운받아두었으니 아쉬울 것은 없지만.
“자료는 쓸만하던가요?”
“큰 도움이 되었어. 마 교수님이 엄청 좋아하시더라.”
속으로 욕이 나왔으나 강우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마도환도 결국 그 자료를 얻었다.
당연히 예상했다. 요셉 교수에 따르면 마도환이 미국 방산업체와 프로젝트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독자적으로 연구할 능력이 없던 마도환은 손강우의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자신 있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물론 마도환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만 단지 그 연구자료만으로는 프로젝트를 성공하기 어려웠다.
“잘됐네요. 그럼 그 연구를 시작했어요?”
“당연히 시작했지. 돈 나올 구석이 많은 연구과제라서. 요즘 마 교수님이 그 자료와 관련된 주제로 프로젝트 따려고 동분서주하시고 있어.”
“아! 힘드시겠어요.”
교수가 바쁘면 아래 대학원생은 더 바빠진다. 어쩐지 김상원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엿보이더라니.
그때 김상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김상원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네, 교수님.”
보이지 않음에도 똑바로 서서 공손하게 전화 받는 자세다. 한때 강우 자신도 저랬다는 생각에 괜히 실소가 터졌다.
“그때 받았던 자료요? 거기에서…… 아, 그 파일 본 기억 있습니다. 예…….”
한참 복잡한 대화가 오갔다. 한쪽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대충 짐작이 간다.
“예,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상원이 그제야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교수님이 자료가 필요하다고 보내달라네.”
“교수님 어디 계신데요?”
“미국.”
“미국 어디요?”
“워싱턴.”
순간 강우의 안면이 확 굳었다.
어디인지 알 것 같다.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즈. 미국에서 항공모함, 원자력 잠수함, 순양함 등 해군 무기를 납품하는 방산업체로 대부분의 매출이 군사 무기에 국한되기에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업체다.
강우가 헌팅턴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손강우가 죽기 전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던 프로젝트 주관사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는 헌팅턴사 본사가 있는 곳이니 마도환이 지금 워싱턴에 갔다는 말은 프로젝트 때문이 확실했다.
짐작했던 일이었음에도 강우는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전생에서 마도환은 손강우의 앞길을 막고 그 단물을 모두 빨아 먹었다. 그런데 죽어서도 여전히 그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설사 프로젝트가 체결되더라도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 연구비가 마도환에게 지급된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팍팍 솟는다.
요셉 교수의 염려가 떠오르고 빨리 논문을 작성해서 헌팅턴사와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는 의욕이 온몸을 압박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양질의 논문이 바로 튀어나오기는 어려웠다.
“워싱턴 가봤어?”
강우의 안색이 급변하자 김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아뇨. 전 한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마음 같아서는 김상원에게 이것저것 더 물어보고 싶지만 괜한 의심을 살 것 같다.
“교수님 언제 오시는데요?”
“글쎄. 나도 몰라. 일이 잘 풀리면 대충 사나흘 뒤에 오시지 않을까?”
긴 해외 출장은 아니란 뜻이다. 마도환의 동정을 알게 되었으니 그럭저럭 전략이 선다.
“형, 혹시 전화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전화번호?”
김상원이 별다른 의심 없이 전화번호를 넘겼고 강우도 자신의 번호를 알려줬다.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
용무를 끝낸 강우는 최대우와 하은찬을 데리고 실험실을 나왔다.
* * *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던 차도도는 황당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훑었다.
강우야 항상 오는 녀석이니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고 최대우도 가끔 배고프다고 오는 녀석이니 그렇다고 칠 수 있지만 그 옆에 선 새로운 녀석이 문제였다.
며칠 전 처음 보이더니 오늘 또 따라왔다. 신입생이라고 했던가.
“그래, 들어와.”
차도도는 강우에게 한차례 눈총을 쏘아주고는 안으로 들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그녀의 질문에 강우와 최대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공부하러요.”
“밥 먹으러요.”
차도도는 고개를 홱 돌려 하은찬을 노려봤다.
“넌?”
“저요? 아무 생각 없이 형들 따라왔는데요? 우리 엄마가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어릴 때 신신당부하긴 했는데 이 형들이 낯선 사람은 아니…….”
“아무 생각 없이?”
“예쁜 누나가 사는 집이라서요.”
녀석을 다시 쓱 훑은 차도도는 내심 혀를 찼다. 이 녀석도 머리에 나사 하나가 풀려 있었다.
저녁때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고민하던 차도도는 과일을 깎아서 음료수와 함께 가져왔다.
“오늘은 어디에서 공부할 건데?”
“여기서요.”
세 녀석이 거실 소파 테이블을 둘러앉았다. 주섬주섬 책을 꺼내는 것을 보면 정말 공부하러 온 게 맞나 보다.
차도도는 한쪽 소파에 앉아 그들을 관찰했다. 공부하는 건지 노는 건지 얼핏 분간이 잘 가지 않았지만.
“형! 수학 마지막 문제 설명해줄래? 그건 나도 못 푼 문제인데 형이 어떻게 풀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가르쳐준 대로야.”
“내가? 언제?”
“여길 잘 봐. 어제 푼 숙제에서 이 부분 증명을 이렇게 바꾸면…….”
강우가 재빨리 손을 놀려 수식을 쭉 나열했다.
점차 하은찬의 안색이 밝아졌다.
“우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형? 천잰데?”
“그게 다 네가 숙제를 보여준 덕분이지. 그래도 오늘 꼴찌 하지 않으려고 마지막 문제 힘들게 풀었다. 그 문제 아니었으면 거의 빵점 맞을 뻔했어.”
“그래도 꼴찌였는데?”
“모두 너무 잘해서 그렇지.”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우가 시험에서 꼴찌 했다는 말 같았다.
차도도는 강우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예?”
그녀는 강우의 머리에 꿀밤을 크게 먹이고는 눈을 부릅떴다.
“너! 또 시험 시간에 장난쳤지?”
“진짜 아는 게 없었다니까요!”
“이게 정말!”
차도도는 주먹을 피해 도망 다니는 강우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 와중에 하은찬 녀석을 왜 데리고 온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 의문은 잠시 후 풀렸다.
하은찬이 수학 숙제가 끝나자마자 강우가 옆에 붙었다.
“숙제 다 했어?”
“네.”
“나 좀 보여 줘봐.”
재빨리 리포트를 낚아챈 강우는 대충 훑어보고는 차도도에게 넘겼다.
“쌤! 복사 좀 해주세요.”
이 녀석이? 아예 하인 부리듯 그녀를 시켜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화를 낼 수도 없다. 이젠 선생과 학생이 아니라 교수와 대학원생으로 관계가 역전된 건가?
“알았어.”
순순히 리포트를 받아든 그녀는 서재로 올라가다가 강우와 하은찬이 하는 짓을 구경했다.
“은찬아, 너 휴대폰 줘봐.”
하은찬이 순순히 휴대폰을 내놓자 강우는 물리 문제풀이 센터에 접속했다.
“이 블로그는 대우가 운영하는 건데…… 지금도 대우가 여기 올라온 질문에 대답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거든? 후배로서 도와줘야겠지? 그렇지?”
“어? 저 물리 잘 못 하는데요? 물리는 저랑 상극이고 화학에 비하면…….”
“공부는 할수록 느는 거야.”
뭔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젓는 하은찬에게 강우는 강제로 해답을 달게 했다.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아! 물론 나에게 말고 저 누나한테. 그리고 다 하면 대우한테 검사받고.”
계단에 서서 차도도는 웃음이 터졌다.
하은찬을 이용해서 대우를 도와주려는 심보는 알겠는데 방법이 영……. 심지어 그녀까지 끌어들였다. 다른 사람을 부려 먹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저 녀석은 전생이 선생님이었거나 교수님이었을 거야.”
남을 부려 먹는 저 능숙한 태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게 틀림없다.
한숨을 내쉰 차도도는 서재로 올라가서 복사를 했다. 오늘 저녁에는 저 녀석들의 배를 어떻게 채워줘야 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요리 한 가지라도 미리 배워놓는 건데.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