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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48화 (148/325)

제148화 실마리 (2)

기숙사로 돌아온 뒤에도 강우의 머릿속에서는 헌팅턴사가 떠나지 않았다.

당분간은 마도환과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소식을 접하고 나니 속이 쓰렸다.

그냥 이대로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대학원까지 졸업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걸려야 하는데 그때 가서 마도환을 대적할 수 있을지 새삼 고민이 된다.

한숨을 짓고 있자니 맞은편 침대에서 최대우가 위로했다.

“왜 그래? 점수가 나빠서?”

“그건 아니고.”

“걱정하지 마. 겨울학교 성적이 나빠도 최종 시험 자격은 준대. 그때 잘 치면 국가대표 발탁이 가능해.”

수학 성적 때문이라고 오해한 최대우가 잡설을 늘어놓았다.

그냥 답답했다.

문득 지금 이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면 마도환이 손강우를 죽였다는 사실마저 완전히 묻혀버리지 않을까. 그때 가서 아무리 마도환을 비난하고 진실을 밝혀봐야 누가 알아줄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빠를수록 좋다. 강우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12시 넘었어.”

“잠시 나갔다가 올게. 먼저 자.”

지금은 기숙사에 그들 둘만 있으니 점호나 통금이 없다. 언제든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

강우는 학교를 뛰쳐나오며 급히 차도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택시를 잡지 못해서 발을 구르고 있자니 차도도의 모닝이 미끄러지듯 도착했다.

강우는 재빨리 조수석에 탔다.

“무슨 일이니?”

“한국대로 가주세요.”

일단 차를 출발한 차도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밤에 한국대는 왜? 쌤 운전실력이 별로인 것 알지? 밤에 운전하려면 쉽지 않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처음 차를 몰고 나왔을 때보다는 한결 안정감이 있다.

“그럼 제가 운전할까요?”

“네가? 참자, 참아.”

차도도가 눈을 흘기며 운전에 집중했다.

운전면허를 취득 연령은 만 18세 이상이었다. 강우가 운전을 하려면 아직은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되면 제대로 된 운전실력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강우는 앞을 주시했다.

밤이라 거리가 한산해서 금방 도착했다. 늦은 밤, 도로변으로 쭉 늘어선 가로등이 모두 꺼진 학교는 적막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여긴 왜?”

차도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냥 답답해서요.”

조금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강우를 한참 쳐다보던 차도도가 입을 다물었다. 한국대를 왔으니 아마도 입시 부담 때문이라고 여겼다.

학교 중간쯤까지 들어간 차도도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겨울의 추운 날씨에 아무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뜨거운 히터를 틀어놓고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강우는 차도도의 기분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온통 마도환의 연구실에 쏠려 있었다.

이곳에 온 이유도 뭔가 오늘이 아니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마도환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 그리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대낮에 마도환의 연구실 앞을 얼쩡거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는데 여기에서 더 늦출 수도 없다.

뒤죽박죽 복잡한 심경에 강우는 앞뒤 가리지 않고 한국대로 왔다. 차도도의 의심이야 어떻게든 나중에 무마하기로 하고. 어차피 밤에 움직이려면 차도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저기 저 앞에 건물 있죠? 거기 좀 세워주실래요?”

한참 고민하던 강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한숨을 내쉬며 차도도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쌤! 잠시만 여기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걱정하는 차도도를 차에 두고 강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대에는 야간에 닫히는 건물이 많아 낮과는 접근성이 다르다. 각 건물은 건물 사이 통로로 이어져 있어서 이곳 지리에 밝은 강우는 어느 건물로 들어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 훤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마도환의 연구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컴컴한 복도에서 강우는 연구실 문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아직도 어떤 증거가 남아있을까?

마도환이 손강우를 해쳤다는 작은 실마리라도 남아있다면 지금이라도 일단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런 생각 하나로 그는 이 밤에 이곳을 찾은 것이다.

딸칵-

손잡이를 돌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당연하다.

문의 잠금을 풀려면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네 자리 숫자. 가장 단순한 방식의 잠금장치이건만 도둑이 아닌 강우로서는 뚫기 어렵다.

“번호가 뭐지?”

마도환의 전화번호 뒷자리를 눌러봤다. 아니다.

너무 뜬금없는 시도라 생각하면서도 마도환과 거의 십 년을 같이 생활했기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마도환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던가? 그의 기억에 깊이 사귄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짝사랑했던 여자도 없다. 즉 여친의 생일로 비밀번호를 설정할 가능성은 없다.

마도환의 생일이? 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강우는 마도환의 생일을 기어이 떠올렸다.

삐빅-

역시 아니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너무 대책 없이 왔어.”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돌리던 강우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1234*.

삐빅-

문이 열렸다.

강우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마도환이 단순한 놈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순할 줄은 몰랐다. 하긴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연구실에 별다른 귀중품이 존재하지 않으니 도둑이 들어올 일도 없다.

처음 전자키를 달 때 초기 비밀번호가 0000 아니면 1234인데 그것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줄이야. 운이 좋았다.

강우는 불을 켜고 내부를 쓱 살폈다. 일반적인 연구실과 차이가 없다. 양쪽 벽에 책장이 위압감을 자랑하고 안쪽 창가에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다.

책상 서랍을 흔들어보니 잠겨 있다. 책상 위에는 별달리 눈에 띄는 물품이 없었다. 하긴 몇 달 전에 남겼을 어떤 증거물을 손쉽게 찾을 리는 없다.

“없나…….”

강우는 마도환의 피씨를 켰다.

익숙한 윈도 화면이 나타났다.

각종 연구자료를 모아 둔 폴더가 눈에 띄었으나 무시했다. 지금 그 녀석의 연구 실태가 궁금한 게 아니니까. 그것보다는 지극히 사적인 것들이 필요했다.

몇 번 마우스를 클릭하던 그는 피씨와 휴대폰을 연결했던 흔적을 발견했다. 피시에 휴대폰 갤러리와 전화번호부 등이 복사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톡이 깔린 흔적은 없었다.

결국 손강우의 죽음과 관련된 특별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허탈해진 그는 피씨를 끄기 전에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급한 대로 전화번호부에 나열된 명부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적어도 마도환과 자주 연락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확보한 셈이다.

강우는 조용히 피씨와 전등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 * *

“어디 갔다 왔어?”

“그냥 건물을 좀 돌아다니다 왔어요.”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자연과학부 건물요.”

지난 탐방 때도 왔었으니 강우가 안다고 하여 특별히 이상할 일은 아니다.

조수석에 앉아 강우는 방금 뒤졌던 연구실 내부를 머릿속으로 다시 되새겼다. 흔적은 모두 지웠겠지? 연구실에 살해 증거가 남아있으리란 생각은 다소 뜬금없었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전화번호부에 그날 마도환이 데리고 왔던 그 의문의 살인범 전화번호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화번호부에서 동료 교수와 친지를 빼면 남은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단서를 찾았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자 차도도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건드렸다.

“강우야? 괜찮아?”

“예?”

“괜찮냐고.”

“네, 별문제 없어요.”

강우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걱정 있어?”

“아뇨.”

“가슴이 답답해?”

“조금요.”

“흠, 요즘 너무 무리해서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절대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마도환의 해외 출장과 프로젝트 체결은 그의 상온핵융합 연구와 연관성이 있으니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미안해. 내가 더 열심히 보조해야 했는데…….”

뜻하지 않게 차도도가 미안함을 표했다. 의도와 다르게 그녀가 스스로 자책하자 강우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선생님 때문이 아니고요. 그냥…… 그동안 한 일이 없어 우울해졌을 뿐이라서요.”

“한 일이 없다니…….”

“아직 변변찮은 실적이 없으니까.”

차도도는 강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프로젝트는 두 개나 따냈지만 연구실적이라 할 논문은 아직 나온 게 없다. 연구자라면, 과학자라면 궁극적으로 논문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차도도가 강우를 위로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마. 넌 아직 어리니까. 시간이 많잖아? 이번 방학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핵융합 논문 한 편과 고속전철 논문 한 편이 나올 거야. 내가 무조건 완성해볼게.”

강우는 스스로 짐을 지려하는 차도도가 고마웠다.

오늘 강우가 새삼 깨달은 것이라면 그가 웅크리고 있던 최근 일 년간 경쟁자들은 열심히 뛰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마도환마저 소리 없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더 멀리 뛰기 위해 잠시 움츠렸을 뿐이야.’

강우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곧 다시 비상할 거라고.

“강우야, 우리 드라이브할까?”

차도도의 운전실력이 의심스럽지만 멀리 가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저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차도도의 세심함이 고마울 뿐이었다.

밤길을 달려 그들이 탄 차는 한강을 건너는 대교 중간쯤에 멈췄다.

다리 중간에는 전망대와 카페가 있었으나 늦은 밤이라 문을 닫았다. 다행히 한쪽 옆에 차를 주차하기 어렵지 않았다.

차에서 밖으로 나와 다리 난간에 서서 서울 야경을 바라봤다. 차도도의 아파트에서 보던 야경과는 사뭇 기분이 다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강을 따라 쭉 늘어선 가로등, 형형색색 물든 건너편 다리, 화려하게 빛나는 서울 타워까지.

막혔던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이다.

“춥지?”

겨울이라 바람이 세지 않아도 귓가가 서늘했다.

“아뇨. 이 정도는 괜찮아요.”

놀랍게도 정말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옆에 한 사람이 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되는지 오늘 확실하게 깨달았다.

“대우는 시리우스란 별을 참 좋아하던데…….”

차도도가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시리우스는 차도도의 아파트에서 겨울철 남쪽에 보이는 별이다. 밤하늘에서는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기도 하다.

일전에 천문대에서 최대우가 가르쳐준 별을 떠올렸다.

“강우는 뭘 좋아할까?”

“……전 공식을 좋아하죠.”

“어떤 공식?”

“이는 엠씨제곱(E=mc²).”

이 공식은 아인슈타인과 현대 물리학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식이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식이었다.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대변하는, 핵융합의 핵심 원리를 표현하는 법칙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그럴 것 같았어.”

강우의 귀에 수식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차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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