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49화 (149/325)

제149화 실마리 (3)

2주간의 겨울학교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마지막 금요일. 오늘이면 마지막이라는 홀가분함과 마지막 2차 시험이 남았다는 긴장이 뒤섞여 강의실이 부산스러웠다.

시험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강우는 당장 다른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교장 선생님의 허락으로 기숙사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내일부터는 당장 숙박할 곳이 문제였다. 다음 허가 날인 신입생 예비입학 기간까지는 아직 1주일이나 더 남았다.

그 1주일간 어디에서 머물지 고민이다.

“정 안 되면 다시 집에 갔다가…….”

연구에 몰입해서 논문을 빨리 완성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숙제 리포트에 표지를 갈아치우고 있자니 한 녀석이 시야를 확 가렸다.

“뭐야?”

그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이 손에 든 리포트를 빼앗아 쓱 훑었다.

“그래도 숙제는 제법 하네.”

중앙 과학고의 안찬엽이었다.

그리 우호적인 눈빛이 아니어서 강우도 삐뚜름한 시선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리포트를 찬찬히 살피던 안찬엽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다가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뒷문으로 들어왔다더니…… 이것도 다시 보니 복사본이네. 햐! 교묘하다, 교묘해!”

“뭔데? 갑자기 왜 그래요?”

강우는 상대가 한 학년이 높으니 차마 반말을 하지 못하고 대신에 목소리에 힘을 줬다.

“지난 금요일 시험 대결에서 네 녀석 때문에 짜증이 나서 그런다.”

“그건 우리가 이겼는데요?”

“알아. 다만 네가 우리를 얼마나 물로 봤으면 시험을 그렇게 치냐고!”

“내가 꼴찌 해도 못 이긴 게 누군데!”

강우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단 말이야! 네 녀석이 제대로 시험 치면 얼마나 잘할지 궁금했거든.”

“으이구, 남이야 잘 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안찬엽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강우를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강우에게 열심히 치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한참 고민하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오늘만은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거다. 오늘은 정말 나보다 더 잘하는지 확인해보겠어.”

“알아서 하세요.”

강우는 신경 쓰지 않고 빼앗긴 리포트를 확 낚아챘다.

손을 흔들고 안찬엽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쩌라고.”

정작 강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험이야 기분 내키는 대로 칠 테니까. 마음이 가면 제대로 치고 아니면 예술작품을 그리고.

마지막 날 수업이 시작됐다.

그동안 계속 대학원생 조교가 수업하더니 오늘은 마지막이라고 교수가 들어왔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교수다. 대략 전생의 손강우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에…… 저는 한국대 수학과 이성철 교수입니다. 올해 올림피아드를 총괄하고 있어요. 아마 여러분 가운데 국가대표가 나와서 여름에 국제 대회에 출전한다면 제가 여러분을 인솔하게 될 겁니다.”

한 마디로 시험을 통과하면 계속 함께할 사람이란 뜻이었다.

“오늘은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배운 내용의 질문을 받고 2차 시험을 칠 거예요. 점심시간 후, 시험 풀이와 점수를 발표하고 끝낼 겁니다. 여러분 가운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봄에 있을 최종시험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일정이 소개됐다.

반쯤 졸면서 듣던 강우는 한 학생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수님! 그 몇몇 사람의 기준이 뭔지 질문해도 될까요?”

벌떡 일어서서 질문하는 자는 안찬엽이었다.

안찬엽을 찬찬히 살핀 이성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 안찬엽 군이군. 오랜만일세. 작년에 국가대표였었지? 올해도 꼭 국가대표가 되기를 바라네. 그래, 질문이 뭔가?”

“1차 시험에 떨어지고도 낙하산으로 여기에 앉아있는 학생이 있습니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박에 알아챈 강우는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흠, 내가 알기로는 두 사람이 있어. 물론 낙하산이라기보다 추천서로 입학한 학생이지. 당연히 그만한 자질이 있어서 들어온 거네.”

“그렇게 들어와서 열심히 한다면 이런 소리 안 합니다. 리포트도 시험도 불성실하게 치르니 문제죠.”

“흠, 그런 학생이 있나?”

이성철이 강의실을 쭉 둘러봤다. 물론 이성철은 대부분 학생과 안면이 없기에 형식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나?”

“지난 1차와 오늘 2차 시험을 종합해서 하위권 학생을 확실하게 떨어트렸으면 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네.”

“덧붙여 리포트 불성실도 포함해서요.”

“그것 또한 어렵지 않네.”

강우는 속으로 욕했다. 안찬엽 저 자식이 아예 물 먹이려고 작정했나? 대충 적당히 넘어갈 줄 알았더니 칼을 갈고 있다. 물론 강우 본인의 과실이니 잘못된 비열한 술수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성철이 학생들을 쭉 둘러보면서 말했다.

“모두 들었죠? 오늘 시험은 성실하게 치세요. 정말 떨어트릴 수도 있으니까요.”

강력한 경고는 아니었으나 당연히 학생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강우를 비롯하여 1차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학생들은 눈에 띄게 전전긍긍했다.

물론 최종시험의 목적이 국가대표 선발이고 이 시험을 망친 학생이 국가대표가 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으니 불합리한 조치도 아니었다.

‘젠장!’

강우는 안찬엽의 속내를 깨닫고 이를 갈았다.

꼭 승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녀석이 있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줄 수밖에.

마지막 날이었기에 시험 채점 시간을 벌기 위해 오늘 일정은 시험부터 시작됐다.

문제지를 받아든 강우는 앞뒤로 쭉 훑어봤다.

난이도는 1차 때와 비슷했다. 어려운 고난도 문제는 마지막 한 문제 정도. 물론 강우에게는 별것 아닌 수준이다.

풀기 전에 고개를 들어 안찬엽 쪽을 쳐다봤다.

그의 반응을 본 안찬엽이 주먹을 들어 그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에이, 귀찮은 녀석.”

강우는 똑바로 앉아 시험에 정신을 쏟았다. 수학에서 안찬엽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나 그에게 비빌 수준은 아니다.

순식간에 강우는 문제를 풀어나갔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는 곧바로 답지에 풀이과정을 썼다.

주어진 두 시간 가운데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강우는 마지막 문제까지 풀이를 마쳤다.

강우는 평소의 버릇처럼 책상에 엎어져 잠에 빠졌다.

시험 감독이자 올림피아드 담당 교수인 이성철은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풀이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 시험 문제를 제대로 푸는 학생보다 못 푸는 학생이 더 많았다. 처음 얼마간은 아는 문제를 푸느라 학생들이 바빴지만, 시간이 지나자 풀 문제가 없어진 학생들은 멍하니 문제지를 쳐다보거나 풀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쯧. 아직 멀었군.”

2차 시험을 통과해서 곧 국가대표 초입에 들어갈 학생들이라지만 그가 보기엔 아직 한참 수준 미달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풀려고 발버둥 치는 학생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이성철의 눈에 특이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꽤 이른 시각부터 엎어져 자는 학생이다.

못 푸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저렇게 성의가 없어서야.

이성철은 눈을 찌푸리며 그 학생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풀어놓은 답지가 보였다.

백지라는 예상과 달리 제법 글씨가 적혀 있어 이성철은 답지의 이름을 확인했다.

“강우? 음, 누구더라…….”

얼핏 들어본 것 같긴 한데……. 한참 고심하던 이성철은 이 학생의 이름을 추천서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이번 겨울학교에 추천 입학으로 들어온 두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방금 이의를 제기했던 안찬엽의 목표가 이 학생이었나? 대충 풀고 자는 모습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순간 약간의 분노가 치밀었으나 금방 이성을 되찾은 이성철은 답지를 세세히 살폈다.

“음?”

작성한 답안은 놀라웠다. 증명을 마친 답안은 깔끔했다. 마치 책에 작성된 정답을 보는 기분이다. 문제를 보자마자 이렇게 작성하려면,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완료하려면 미리 문제를 아는 게 아닌 이상 쉽지 않았다. 아니면 천재이거나.

문제가 노출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안다. 왜냐하면 오늘 낸 문제는 그가 그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다가 어젯밤에 워드를 쳐서 오늘 아침에 프린트로 뽑았으니까.

이성철의 시선이 잠든 강우에게로 향했다. 슬슬 이 녀석에게 관심이 간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의 특징이다. 이성철도 그러했다.

이성철은 강우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왜애애애?”

잠꼬대를 하면서 몇 번 손을 휘적이던 강우가 후다닥 고개를 들었다.

“강우 학생?”

“누, 누구세요?”

강우가 눈을 비비고 상대를 쳐다봤다. 그제야 상대를 인식한 강우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풀다가 자면 어떡하나?”

“다 풀었는데요?”

“대충 풀었잖은가?”

“예? 그럴 리가…….”

재빨리 답지를 돌려받은 강우가 다시 쓱 훑었다.

이성철이 웃으면서 물었다.

“마지막 문제에서 말이야. 그 문제는 다른 케이스가 하나 더 존재하지?”

“예? 그건 문제에서 풀라는 요구가 없는데요?”

강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나도 알아. 그것도 한 번 풀어보게. 어차피 시간이 남잖아?”

“잘 시간도 부족한데…….”

구시렁거리던 강우는 매서운 이성철의 눈빛을 발견하고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까라면 까야지 어쩔 건가. 조교도 아니고 앞으로 올림피아드를 담당할 교수라면 일단 잘 보여야 한다.

입술을 삐죽이던 강우는 마지막 문제를 다시 읽어보고는 답지에 곧바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성철의 눈이 확 커졌다.

마지막 문제는 특이했다. 사실 출제한 부분은 전체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난이도가 극악이라 학생들이 풀 수 없다고 생각해서 뺐을 뿐이다. 그 절반만으로도 어려웠다.

그런데 강우가 볼 것 없다는 듯 바로 써 내려가고 있다. 정말 이 문제를 처음 접하면서도 이런 속도로 푼다면…….

‘수학 천재군.’

왠지 가슴이 웅장해지는 포만감에 이성철은 숨을 골랐다.

그동안 올림피아드 국가대표 학생을 인솔하면서 수많은 천재를 봤다. 뛰어난 후배를 갈고 닦는 선배이자 선각자의 기분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자신이 키운 학생이 훗날 전 세계 수학, 과학계를 휘어잡을지도 모른다는 흥분은 새로운 수학 이론을 정립한 기쁨에 비견할 만하다.

그는 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열심히 답지를 써 내려가는 녀석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이 녀석은 국가대표로 뽑히겠군. 추천 제도가 있었던 게 다행이야.’

이 녀석이 있다면 올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한국의 성과는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녀석이 한 명 있으면 연쇄효과를 일으키는 법이니까.

이성철은 괜히 이번 여름이 기다려지는 기분이었다.

* * *

최대우와 함께 점심을 먹고 강의실로 돌아왔을 때 강우는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느꼈다.

학생들이 그를 보는 눈치가 이상했다.

고려 과학고 학생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타학교 학생들이 힐끔힐끔 그를 쳐다봤다.

“응? 왜 이래?”

강우가 옆의 하은찬에게 물었다.

“형! 낙하산 때문이래요.”

“낙하산?”

“아침에…….”

금방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아침에 있었던 안찬엽의 발언 때문이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라 낙하산이나 특혜를 싫어하는 정의감을 이해한다. 그렇다고 규정을 어긴 일은 없으니 강우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뒤통수에서 학생들이 수군댔다.

“1차도 떨어졌다던데…….”

“학교도 거의 꼴찌로 입학했대.”

“사회 배려 대상자라던가…….”

“어쩐지 수업 시간에 잠만 자더라니.”

뒤통수가 간질거리자 강우는 뒤를 홱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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