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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51화 (151/325)

제151화 그리고 일주일 (1)

기숙사 짐을 빼서 물리실험실에 처박아 넣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다.

어제 겨울학교가 끝나고 기숙사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후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챙겼다.

겨울학교와 신입생 예비입학 기간 사이 약 1주일이 비는 동안 기숙사 사용허락을 받아내지 못했기에 갈 곳이 없었다.

이 기간에는 떠돌이가 되어야 한다. 물론 차도도의 배려로 그녀의 아파트에 거주할 생각이지만.

아무리 제자라 하더라도 다 큰 성인이나 마찬가지인 두 남학생과 생활해야 하는 차도도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학교 정문을 나서는데 눈에 왔다. 함박눈이다. 이번 겨울에는 유독 눈이 적었는데 오늘은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다! 눈!”

폴짝 뛰는 강우와 달리 최대우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눈 처음 보냐?”

“아니, 그래도 눈 오면 좋지 않아? 이럴 때는 데이트를 해야지.”

“데이트는 무슨 얼어 죽을. 첫눈도 아닌데.”

그래도 이 녀석이 지나치게 무덤덤한 것 아닌가?

“넌 눈이 싫어?”

“우리 동네에선 이 정도는 눈이라고 치지도 않아. 너도 눈이 한 1미터 내려서 집안에 갇혀봐. 눈이 얼마나 지겨운지 알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이 많이 오는 울릉도에서 살았다. 당연히 요 정도는 눈으로 보이지도 않겠지.

공자 앞에서 문자 쓴 격이 된 강우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내리는 눈이 다소 많아 보였으나 어차피 조금만 더 걸으면 지하철역이니 상관없었다.

“우린 담임 쌤 집으로 가는 거야?”

“응. 쌤이 허락해주셨어.”

“다행이다.”

최대우도 서울에 머무를 집이 없어서 막막했었다.

“담임 쌤이 안되면 신새벽 쌤이 잘 곳을 마련해준다고 했어.”

“난 화학 쌤도 괜찮은데.”

최대우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어? 걸그룹 버린 거야?”

“걸그룹은…… 옆에 없으니까.”

이 녀석도 조금은 현실로 돌아왔나?

강우는 어쩌면 이 눈이 이 겨울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지 않아 신학기가 시작된다. 신학기를 시작하면 뭉쳤던 고곽천재도 찢어지겠지. 모두가 같은 반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그보다 더 서글픈 것은 차도도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려나?”

강우의 나직한 물음에 최대우도 감정이 가라앉았다.

“모두 같은 반이면 좋을 텐데…….”

“그럴 리는 없겠지.”

강우와 최대우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여야 함을 인정했다.

“그래도 고곽천재를 유지할 거야.”

강우는 다음 학기에도 세미나실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는 네 사람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다행히 그들은 프로젝트로 묶여 있어서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차도도와 신새벽도 프로젝트와 논문이 걸려 있으니 계속 만나야 할 처지다. 그 점을 강우는 무척 다행이라 여겼다.

역시 인연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 * *

차도도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트에서 장을 봤다.

세 사람은 카트를 끌고 넓은 마트를 돌아다녔다.

앞으로 대략 1주일간 차도도의 집에서 버티려면 먹을 것을 비롯하여 각종 생필품이 필요했다.

된장국 밀키트를 카트에 집어넣던 차도도가 최대우를 쓱 보고는 바로 하나를 더 추가했다.

사실 그녀는 집에서 거의 요리를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주변 식당에서 대충 끼니를 때웠고 가끔 야채를 썰어 샐러드를 해 먹는 정도가 전부였다.

혼자 살다 보니 배달 음식과도 거리가 멀었다. 1인분만 시키기 어려워서였다.

그렇기에 얼마나 사야 할지 그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창 자라는 나이인 두 남자 고등학생이 얼마나 먹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 먹고 싶은 것 없어? 쌤이 다 만들어줄게.”

그녀가 말하는 순간 강우의 입가에 비웃음이 퍼졌다.

“강우! 내가 못 할 것 같지?”

“아뇨.”

차마 아니라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자신이 슬퍼진 강우는 예전 집들이 때의 참사를 떠올렸다. 그때 차도도가 요리했었는데 아무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심지어 차도도 본인마저.

“과자는 필요 없어?”

“아! 저는 잘 안 먹는데 대우가 잘 먹어요.”

“맥주는? 아! 너희 미성년자지.”

바로 현실을 깨달은 차도도는 맥주 대신에 탄산음료를 넣었다.

하나둘 넣다 보니 어느새 카트가 가득 채워졌다.

“이거면 일주일 버티려나?”

최대우의 몸집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차도도가 만든 요리가 인기를 끌 일이 전혀 없기에 강우는 더 사야 한다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대신에 모든 한국인의 간편식을 선택했다.

“라면 사야죠.”

“아! 그렇지.”

설마 라면은 끓일 줄 알겠지. 강우는 거기까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긴 라면이야 그가 직접 끓여 먹어도 되니까.

그렇게 장을 본 후 모닝에 물건을 쑤셔 넣었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더 많이 온다. 눈이 쌓이고 길이 미끄러워 초보 운전인 차도도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것이 걱정됐다.

“쌤! 눈 오는 날, 차 몰아본 적 있어요?”

“아니. 없는데.”

“그럼 비 올 때는요?”

“비 올 때도 없는데.”

“음, 역시 생초보……. 눈이 오면 노면 조건이…….”

“까짓거 몰면 되지. 누구나 초보였던 때가 있었으니까.”

호기롭게 거리로 나선 모닝이 길에서 쭉쭉 미끄러진다.

“으악!”

게다가 금방 유리창에 눈이 덮여 창밖도 잘 보이지 않았다.

차도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으으으, 강우야! 나 운전 못 해.”

여차하면 대신 운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 강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렇다고 차를 내버려 두고 가기도……. 차야 버려도 되지만 일용할 양식만은 절대 버릴 수 없다.

“쌤? 눈이 올 때는…… 저단 기어를 사용하는 법이거든요. 그러니까 1단 또는 2단으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런! 답이 없다. 차도도는 주행 중에 D를 제외하고는 써본 적이 없었다.

이과 선생님이 맞나? 하긴 이과 선생님이라고 자동차를 잘 운전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건 이렇게…….”

강우가 옆에서 열심히 코치했다.

덕분에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간신히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후아!”

긴장이 풀린 듯 차도도는 운전대에 얼굴을 처박고 한동안 꿈쩍도 하지 못했다.

* * *

오늘 저녁 메뉴는 라면으로 일치를 봤다.

다행히 차도도는 라면을 요리할 줄 알았다. 이것도 요리라 부를 수 있다면.

기본 라면에 파를 대충 썰고 계란까지 풀어 넣으니 제법 맛있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그들은 거실에 둘러앉았다.

창으로 여전히 눈이 내리는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던 최대우가 실망해서 돌아섰다.

“오늘은 별이 안 보이네.”

“그래도 쌤은 너희 둘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뿌듯해.”

차도도가 미소를 지었다.

저 얼굴은 확실히 동생을 보는 표정이다. 그녀와 그사이에 가로놓인 10년이 예상보다 훨씬 큰 거리임을 다시 깨달은 강우는 조금 우울해졌다.

“자, 그럼 밥도 먹었고…… 티비 볼래?”

“쌤! 얼른 공부해야죠.”

솔직히 강우도 티비를 보고 싶었지만 괜히 심술이 나서 공부를 입에 올렸다.

조금은 질린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던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토요일인데…….”

“주말이라고 놀면 공부는 언제 하죠?”

차도도의 선생님 말투로 강우가 반박했다. 이럴 때는 확실히 강우가 선생님이고 차도도가 학생인 듯하다.

안면을 팍 찡그리던 차도도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래, 그럼 서재로 올라가자.”

“아뇨, 오늘은 여기 거실에서 공부하죠.”

“여기에서?”

“공부를 꼭 책상에 앉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에요.”

미심쩍은 듯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차도도가 책을 가지러 갔다.

강우와 최대우도 가방에서 책과 연구자료를 꺼냈다.

이미 책상이 아닌 곳에서 공부하는 방식이 두 사람에겐 익숙했다. 기숙사에서는 거의 침대에 붙어서 공부했으니까.

강우와 최대우는 수식을 전개하는 수학마저도 누워서 책장을 넘기면서 공부하는 수준이다. 침대에 누웠다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천재의 자격이 없다.

음악을 듣듯이 누워서도 책을 보고 공부하는 사람이 천재다.

한 사람은 소파에 드러누워서 물리책을 보고 한 사람은 바닥에 드러누워서 수학책을 보았다.

그 장면에 기가 막힌 차도도가 재차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자세로 공부가 돼?”

“쌤도 해보세요. 잘 돼요.”

말이 되지 않아도 이제는 강우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그녀이기에 차도도도 강우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거실 바닥에 깔린 양탄자가 쿠션처럼 느껴져서 예상보다 안락했다.

차도도도 엎드려서 논문 초안을 넘겼다. 그럭저럭 공부할 만했다. 아니 오히려 부담이 없어서 더 머리에 잘 들어오는 기분이다.

새삼 차도도는 강우와 최대우를 다시 봤다.

이전에는 강우만 천재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최대우도 괴물이었다. 저렇게 소파에 누워서 집중하는 방식은 공부를 무척 좋아하는, 한 곳에 집중력을 쏟을 수 있는 천재만이 가능한 법이니까.

강우에게 가려져 있던 최대우의 뛰어남이 보였다. 아마 강우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최대우의 천재성을 진작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논문을 읽다가 한쪽을 넘기고 또 한쪽을 더 넘길 즈음에 차도도의 얼굴이 쿡 내려갔다.

강우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거실 바닥에 차도도와 나란히 누워있으니 기분이 어색했다.

자연스럽게 순간순간 차도도를 힐끔거리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도도가 꾸벅꾸벅하더니 잠에 빠졌다.

“피곤했나?”

하긴 그 눈길을 헤쳐오느라 초보가 온 신경을 곤두세웠을 테니 안 피곤하다면 거짓말이겠지.

무심코 손을 뻗던 강우는 깜짝 놀라 손을 거두고 따스한 눈빛만으로 차도도를 어루만졌다. 어느 순간 그도 잠에 빠져들었다.

* * *

새벽에 차도도는 잠에서 깼다.

그녀는 자신이 평소처럼 침대가 아닌 거실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논문을 읽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훑어봤다.

거실을 밝히던 전등이 꺼진 공간을 은은한 보조등이 밝히고 있고, 소파 위에는 최대우가 드러누운 채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강우를 찾았다. 강우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꺼운 수학책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책을 베고 자면…… 그 책에 든 지식이 자는 동안 저절로 들어간다지…….”

고등학생 때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당연히 진실은 아니고 잠잘 때까지 책을 볼 만큼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강우는 지금 그 말을 손수 실천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깨워서 침실로 들여보낼까.

고민하던 차도도는 베개를 가져와서 강우의 머리에 받쳐주었다. 깊이 잠이 든 듯 여전히 숨이 고르다.

차도도는 이불까지 꺼내와서 강우와 최대우를 덮어줬다. 편하진 않더라도 그럭저럭 잠잘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을 끝낸 차도도는 창밖을 바라봤다. 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야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건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조금 들떠 있었다.

“강우가 서두르자고 했지…….”

빨리 그녀가 끝내야 할 논문이 두 개다. 이미 강우는 할 일을 끝낸 상태에서 그녀가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서둘러야 일정에서 차질이 발생하지 않는다.

“서두르면 둘 다 며칠 내로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어.”

차도도는 머릿속에서 진도를 가늠하고는 결의를 다졌다. 잠이나 잘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연구자료를 주워들고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 날이 샐 때까지 서재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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