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신입생 앞에서 (1)
“오늘 첫날부터 자습실이나 세미나실에 온 학생은 제가 처음일 거예요. 우리 엄마가 고등학생이 되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세미나실에 등장한 하은찬이 수다로 기세를 뿜었다.
당연히 강우도 칭찬해줬다.
“그래, 앞으로도 빠짐없이 여기에 오도록 하여라.”
“예?”
어리둥절한 하은찬에게 강우는 최대우를 가리켰다.
“지난번에 알려줬지? 물리 블로그 도우라고.”
“아! 질문에 대답하는 거요?”
“저 형아 얼굴 봐. 온종일 답변 쓰느라 핼쑥하잖아?”
“저 얼굴이요?”
곰처럼 우직한 최대우의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하은찬이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물리 문제풀이 센터가 더 유명해지는 바람에 최대우는 매우 바빠졌다. 이제는 혼자서 운영하기 버거운 상황.
강우는 그 짐을 덜어줄 겸 하은찬의 물리 실력을 키우고자 녀석을 가담시킬 생각이었다.
“으음, 전 물리 못하는데요? 딱히 물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물리와 화학이 있으면…….”
물론 물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 다른 과목에 비해 못한다는 뜻이다. 녀석의 재능 등급을 확인했던 강우는 그 말뜻을 쉽게 이해했다.
“넌 수학 잘하지?”
“그런데요?”
“그런데 물리를 못 하면 그건 그냥 안 해서 그런 거야.”
정곡을 찔린 하은찬이 버벅대며 반박을 못 했다.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짓는 녀석에게 강우는 최후의 미끼를 던졌다.
“풀다가 안 풀리는 문제는 누구한테 물으면 된댔지?”
“아! 그 과외 누나요?”
“그래, 그 누나! 그 누나에게 묻고.”
“이야! 그럼 할게요! 우리 엄마가 예쁜 여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엄마 말씀이 항상 옳은 건…….”
미안하지만 차도도를 조금 팔았다. 설마 이 녀석이 그 집까지 찾아가서 묻지는 않겠지.
그렇게 녀석에게 임무를 부여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하은찬이 입을 열었다.
“형!”
“왜?”
“혹시 그 누나…… 과외비 얼마예요?”
“푸흡!”
강우는 음료수를 마시다가 한 차례 뿜었다.
“너무 비싸면 과외 힘든데…… 이번에 지난번에 말했던 수학 올림피아드 선생님 팀 과외 들어가느라 돈이 많이 들었거든요. 거기에 과외비가 또 추가되면 그렇다고 우리 집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괜히…….”
고려 과학고 선배이자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에 명문 버클리 대학을 다닌다는 김상학에게 수학 과외를 받기로 했나 보다.
이 녀석은 그동안 사교육으로 이 자리까지 온 건가? 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과 눈을 맞췄다.
“난 예쁜 과외 선생님이 좋거든요. 수학 과외만 아니었으면 그날 봤던 그 동네 누나…… 에게 화학도 과외받는 건데……. 아, 생물 누나는 없나요? 생물은…….”
“응? 아! 그 누나들? 과외비 안 비싸. 네 의지만 있으면 질문을 잘 받아주실 거야.”
학교 선생님이 질문하는 학생을 싫어할 리 없다. 당연히 돈을 받을 일도 없고.
“아, 예.”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하은찬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딱히 얼마라거나 연결해주겠다고 대답하지 않으니 강우가 싫어하는 거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던 하은찬이 가방에서 교재를 꺼냈다.
“그건 뭐냐?”
“그 고곽의 전설이 만든 교재요. 겨울학교 끝나고 일주일 수업을 들었고 앞으로는 주말마다 들어야 하는데…….”
이 녀석도 바쁜 고등학교 생활이다.
교재란 말에 눈이 번쩍 뜨인 강우는 얼른 빼앗았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과거 올림피아드 문제를 모아놓았을 뿐.
“이걸로 수업해?”
“네, 수업은 잘하시는 것 같아요.”
“흠, 그래? 그럼 이 문제 어떻게 배웠는데?”
강우는 교재 앞부분에 있는 문제 하나를 지적했다.
“이 문제는…….”
강우는 맞은편의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하은찬이 보드에 수식을 써 내려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런 유형의 문제는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대요. 이렇게 생긴 수식은 반드시 치환해서 풀어야 하기 때문에…….”
하은찬의 설명을 강우는 건성으로 들었다.
솔직히 실망이었다. 그래도 고곽 전설이라면 천재가 분명한데 수업 방식은 학생들의 천재성을 키우는 쪽이 아니라 단순 암기 형태로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저런 방식을 대부분 학생이 더 좋아한다. 하지만 학생의 상상력이나 창조력을 말살한다.
강우는 하은찬이 염려됐다.
이 땅의 수많은 천재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 속에 쓰러져갔었다. 하은찬이 계속 사교육에 매달린다면 어쩌면 그 끝이 뻔할 수도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강우는 천천히 하은찬의 태도를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날 화학 수업시간이 되었을 때 하은찬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여러분! 반가워요! 전 화학을 담당한 신새벽이에요. 전 2학년 담당이고 여러분 화학 선생님은 방학 기간에 연수를 나가셔서…….”
신새벽을 보고 넋이 나간 하은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누나가 여기에서 왜 나와…….”
분명히 저 누나는 동네 누나라고 했는데? 과외로 화학을 가르친다고 했는데? 설마 여기가 팀 과외하는 곳인가?
하은찬은 순간적으로 이곳이 학원인지 학교인지 혼란스러웠다.
신새벽의 외모에 반쯤 넋이 나간 상황이라 더더욱 상황판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원소주기율표를 말씀드리려고 해요. 주기율표 잘 알죠? 이것 모르면 화학을 한다고 말할 수가 없죠. 자, 어…… 저기, 너!”
신새벽이 하은찬을 지목했다.
놀란 하은찬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너! 그때 그 학생 맞지?”
“예?”
“이름이?”
“하, 하은찬요.”
“그래, 하은찬 학생…… 어? 하은찬?”
신새벽은 이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작년에 선생님들이 이민찬과 손차희를 주목했었다면 올해는 하은찬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즉 하은찬은 이번 신입생 가운데 1등으로 입학한 학생이었다. 모든 선생님이 주목하는 학생이기도 하고.
그런 학생을 마침 콕 찍어서 강우가 차도도네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강우 눈썰미도 보통이 아니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신새벽이 물었다.
“내가 누구라고?”
“도, 동네 누나요.”
“푸하하!”
학생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신새벽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너! 지난번에도 나보고 동네 누나라고 했지?”
“크큭큭!”
웃음이 터진 학생들이 책상을 치며 난리였다.
“너! 주기율표 알아? 몰라?”
“예?”
말문이 막힌 하은찬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신새벽이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안 되겠다. 너도 특별 지도 좀 받아야겠어. 다음 시간까지 주기율표 20장 써와, 알았지?”
“예?”
“너랑 친한 그 학생 있잖아? 너 선배.”
“아! 강우 형요?”
“그래, 강우 그 자식! 그 자식도 딱 작년 이맘때 똑같은 숙제 받았거든? 근데 어떻게 낸 줄 알아? 20장을 복사해서 냈더라고!”
“큭큭큭!”
“주기율표라도 잘 알면 내가 말을 안 해! 딱 원소 10개밖에 몰라. 10개밖에!”
학생들은 웃느라 눈물마저 찔끔거렸다.
“너도 복사해서 내면 죽을 줄 알아!”
“저, 저는 절대…….”
“유유상종, 근묵자흑이라고 몰라? 내가 볼 때 너도 딱 그대로 닮았어! 그 자식도 나에게 누나라 부르더니 너도 그렇게 부르잖아?”
하은찬은 도무지 수습 불가능했다.
‘불쌍한 강우 형…… 이 누나한테 단단히 찍혔나? 화학 오지게 못 하나 본데…….’
그 와중에도 하은찬은 강우를 걱정했다.
* * *
예비입학 기간이 되면서 대부분의 학교 시설이 정상화되자 고곽천재는 다시 세미나실에 모였다.
실로 오랜만에 네 사람이 함께 모여 공부하게 됐다.
물론 정식으로 허락받은 강우나 최대우와 달리 손차희와 윤수아는 학교 식당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윤수아는 세미나실로 올 때 먹을 것을 잔뜩 준비해왔고 세미나실에는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오랜만에 모인 탓에 공부보다 잡담이 주를 이뤘다.
“웅, 그래서 우리가 갈라진 거야?”
“이산가족 됐지.”
신새벽이 반편성 결과를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중요한 결과를 모른 척할 강우가 아니었다.
둘로 쪼개졌다는 말에 일순간 손차희와 윤수아가 낙담했다. 그만큼 지난 일 년간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강우에게 의존했었다.
“그럼 우리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그대로 해야지. 매주 수요일마다.”
“그래도 담임이 신새벽 쌤이면 이해해주시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신새벽이야 손안에 있다고 강우는 생각했다. 그녀를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모두 같은 반이면 더 좋겠지만 뿔뿔이 흩어진 것보다는 백 배 낫다.
손차희가 다시 의욕을 내비쳤다.
“좋아! 올해도 우리 고곽천재는 매일 저녁 여기에서 모이자!”
“그래! 파이팅!”
네 사람은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가끔 한 명 더 올지도 몰라.”
강우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누구?”
“은찬이. 물리 블로그 돕게 하려고.”
눈 아래가 거무죽죽한 최대우의 상태를 확인한 손차희가 쉽게 동의했다.
“똘마니 하나 있으면 좋지.”
손차희와 윤수아는 하은찬과 같은 학원에 다녔기에 잘 아는 사이여서 전혀 불만이 없었다. 게다가 하은찬이 수학에서 강점을 보이는 천재이기에 고곽천재에 충분히 낄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떠들고 있자니 수업이 끝난 하은찬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세미나실로 들어왔다.
“으으, 강우 형…….”
“너 왜 그러냐? 나라가 망한 표정이다?”
“나 오늘 화학 쌤한테 찍혀서…….”
“찍히는 건 강우 특기인데?”
윤수아의 되치기와 달리 정작 강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왜 찍혔는데?”
“쌤을 누나라고 잘못 불러서…….”
“누나?”
손차희와 윤수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강우는 뭔가 섬찟한 기시감을 느꼈다.
“혹시 그 화학 쌤이…….”
“어. 그때 그 동네 누나. 난 과외 쌤인 줄 알고…….”
“큭큭큭.”
강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필 신새벽이 1학년 수업에 왜 들어갔지? 2학년을 맡는다고 하더니?
어쨌든 강우는 하은찬에게 조의를 표했다.
“혹시 그래서 주기율표 써오라고 하지 않던?”
“그랬어.”
“그럼 복사해서 내.”
“그러면 죽여버리겠다던데?”
“어쩔 수 없네. 그러면 제대로 써내야지.”
어깨가 축 처져서 한숨을 내쉬던 하은찬이 중얼거렸다.
“학교 쌤이 그렇게 예쁘면 그건 반칙이잖아? 동네 누나가 딱인데…… 난 그 누나랑 정말 과외 하고 싶었는데…… 학교 쌤에게 과외 해달라는 건 무리겠지?”
“질문은 잘 받아주시지.”
1학년 담당이 아니니 어떨지 모르겠지만 희망을 빼앗을 수는 없다.
“자,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공부를 시작하자. 오늘 할 일이 많거든.”
손차희가 하은찬에게 자리를 지정해주고 고곽천재의 간략한 규칙을 설명했다.
당연히 하은찬도 마다하지 않았다. 선배가 챙겨주는데 마다할 후배는 없다.
그렇게 세미나실에 공부 분위기가 잡혔을 때였다.
일순간 세미나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강우야? 불렀어?”
오늘은 차도도마저 학교로 왔다. 홀로 집에서 고민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연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당연히 강우는 그녀와 할 일이 있었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하은찬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 동네 누나다…….”
예쁜 동네 누나가 왜 여기에서 또 나오는지, 왜 학교에서 돌아다니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은찬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학교는 너무 이상했다. 아니 이 형과 누나가 이상한 건가?
“누나?”
차도도가 눈을 부릅뜨자 하은찬이 기겁해서 푸짐한 최대우의 뒤로 숨었다.
순간 차도도는 이 녀석이 과연 알려진 것처럼 천재가 맞는지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