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신입생 앞에서 (2)
기숙사에 있는 지금 가장 마음에 드는 특혜라면 아침 점호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기숙사생은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장에 집합해야 한다. 단지 집합이 문제가 아니다. 모인 후 맨손체조까지 해야 하는 무척 성가신 시간이다.
보통 때라면 강우도 해당이었지만, 지금의 강우는 기숙사에 공식적으로 머무는 학생이 아니었다.
기숙사 사감도 이를 알기에 아침 점호에서 빼주었고 강우는 신입생과 달리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 덕분에 아침을 거르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오늘도 하품하면서 느지막이 세미나실로 출근했다. 출근이란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이 학교가 회사나 마찬가지였다. 매월 따박따박 연구비랍시고 월급이 통장에 꽂히는 것도 똑같다.
어쨌든 오늘도 최대우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세미나실로 이동했다.
“강우야, 하던 일은 끝났어?”
“아니. 끝날 일이 아니지.”
“얼마 전에 논문 다 보냈다고…….”
“수정해달라고 회신 왔어.”
“그럼 어떡해?”
“뭘 어떡해? 수정하면 되지. 흔한 일이야.”
논문은 학술지별로 미묘한 스타일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강우도 단번에 받아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고속철도 논문은 한태규가 직접 일부를 추가해서 수정본을 보내왔다. 프로젝트와 연관된 부분에서 공개할 내용과 비공개 내용을 조율한 수정이다.
특별한 문제는 아니어서 강우와 차도도는 고속철도 논문 수정 관련해서는 한태규의 수정본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상온핵융합 논문은 수정 사항이 조금 더 많다. 훗날 프로젝트 체결을 염두에 둔 요셉 교수가 본론에서 내용 보완을 요청해왔다. 보완 연구가 필요하다는 정중한 지적이었는데 강우는 이미 그 연구를 완성한 상태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단지 이 논문에 싣지 않으려던 내용이기에 고심할 뿐이다.
그의 전략과 요셉 교수의 전략이 미묘하게 상충하는 부분이다. 차도도의 조언을 들어볼 생각이다.
어쨌든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 아니어서 계획대로 이달이 끝나기 전까지 완결할 수 있다.
최대우는 논문을 쓴 경험이 당연히 없다. 그래서 그동안 강우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단지 논문이 되돌아왔으니 염려가 될 뿐이었다.
“논문이 거절된 건 아니지?”
“아직 정식으로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그건 심사에 들어가고 나서 이야기야.”
최대우는 학술지에 논문 게재 절차를 모르니 들어봐야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강우라면 당연히 헤쳐나가리라 여기면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강우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신새벽이었다.
- 강우야! 나 좀 도와줄래?
“뭔데요?”
- 조금 급하거든.
“어딘데요?”
- 교무실.
“지금 갈게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꼭두새벽부터 신새벽이 호출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대우야, 세미나실에 먼저 가 있을래?”
강우는 최대우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흔들고 방향을 바꿨다.
* * *
신새벽의 안색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았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처음인지라 강우는 걱정했다.
“어디 아프세요?”
“응.”
“어디요?”
신새벽이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쩐지 물으면 안 될 분위기다.
“오늘 수업은 없어요?”
“당연히 있어. 오전과 오후.”
“큰일이네요. 어쩔 수 없이 째셔야겠네요.”
“째긴 뭘 째. 내가 째면 학생들은 어떡하고?”
수업을 째는 대학생과 달리 여기는 고등학교이고 그녀는 학생이 아닌 선생이다. 당연히 수업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이 꼭 좋지만은 않네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강우에게 신새벽이 매달렸다.
“강우야, 부탁 좀 해도 될까?”
“뭔데요?”
“내가…… 지난달은 안 이랬는데 이번 달은 유독 심하네. 그래서 말인데…….”
“어? 매달 아프세요?”
신새벽의 주먹이 머리로 날아왔다.
“야! 여자들은 그런 게 있어!”
“크윽.”
아픈 머리를 만지면서 강우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 대신에 네가 수업 좀 해주면 안 될까?”
어차피 예비입학기간이라 수업 내용이 중요하진 않으니 못할 것은 없지만.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다.
“너, 예전에 차도도 선생님 강연도 대신해주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대충 때우면 안 되겠니?”
“쌤, 저 주기율표도 잘 모르는 학생인데요? 그런데 화학을 어떻게 수업해요?”
“야! 너 빼면 지금 이 학교에 대우밖에 없는데…… 대우보고 화학 수업하라고 할까?”
최대우의 화학 성적은 강우보다도 더 못하다.
말을 듣고 보니 최대우의 화학 수업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친구에게 그런 고통의 시간을 떠넘기기는 미안하다.
“음……. 알았어요. 제가 대신 수업할게요.”
“강우야, 고마워!”
감격에 겨워 안으려 드는 신새벽을 강우는 잽싸게 피했다.
“그래서 무슨 수업을 해요?”
“너 하고 싶은 거로 해. 근데 화학이어야 해.”
조건이 세다. 물리나 수학으로 하라면 눈 감고도 하겠지만 화학이라는 단서가 붙으면…….
“곧 수업 들어가야 하거든?”
“끙!”
시간이 다 됐다. 밑지는 기분 속에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하필이면 들어간 반에 하은찬 녀석이 앉아있었다. 그것도 가장 앞에.
이 녀석은 그와 비슷한 과이니까 맨 뒤에 숨어서 졸고 있어야 정상인데?
“너 왜 맨 앞에 앉아있어?”
“동네 누나 수업 시간이잖아요. 근데 쌤 안 오시면 전 맨 뒤로 갈래요.”
역시 이 녀석은 같은 부류다. 예쁜 선생님 수업은 맨 앞에 앉고 아니면 맨 뒤에 앉겠다니.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이 신새벽이 그를 소개했다.
“앞에 있는 학생은 여러분 선배인 2학년 강우예요.”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강우에게 쏟아졌다.
“이미 들은 사람은 알겠지만…… 위 학년에서 가장 천재라고 소문난 학생이죠. 성적은…….”
무심코 성적을 이야기하려던 신새벽은 금방 강우의 내신 성적이 첫 중간고사를 제외하고는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빨리 말을 바꾼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놀라운 학생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 선배에게 이 시간을 맡겨볼까 해요.”
대충 마무리한 신새벽은 강우에게 넘기고 재빨리 강의실 뒤에 앉아 아픈 배를 달랬다.
교탁에 혼자 선 강우는 학생들을 쭉 둘러보면서 말했다.
“후배 여러분, 처음 뵙습니다. 강우입니다.”
강우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시선에 기대가 가득했다. 그를 아는 학생은 사실상 없다. 학원 출신이 아니어서 그와 접점이 있는 학생이 없고 아직은 선배와 만날 시기가 아니어서 그의 기행을 들었을 리도 없었다.
그나마 그와 시간을 보낸 사람은 하은찬이 유일했다. 물론 하은찬에게 강우는 조금 이상한 선배였다. 예쁜 누나를 끌고 다니면서 쉬운 수학 숙제도 못 해서 그에게 부탁하는 조금 덜떨어진 형이었다.
오늘 동네 누나, 아니 화학 선생님과 함께 수업에 들어온 것도 이상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형이었다. 이 형도 누나들처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후배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접하면서 강우는 이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냥 잡담하면서 넘겨 버리기엔 무척 귀중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을 잘 잡아야 했다.
그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수업 자료를 뒤졌다. 화학이기에 여지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신새벽과 머리를 싸매고 있는 물리화학, 그것도 수소 원자핵을 다룰 수는 없다.
‘수소라…….’
머리에 떠오르는 분자가 있었다. 수소로 이루어진 아주 중요한 분자이자, 화학 역사에 획을 그었던 중요한 물질.
강우는 칠판에 분자식을 썼다.
“이게 뭘까요?”
“엔에이치쓰리요.”
“암모니아!”
한 학생이 맞췄다. 기초적인 분자식이라 과학고 신입생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안다.
“오늘은 이 암모니아에 얽힌 재미있는 과학을 소개할까 해요. 암모니아는 비료와 폭약의 주원료로 질소 원자 한 개와 수소 원자 세 개가 결합한 물질이죠. 알다시피 공기 중의 질소분자는 삼중결합 상태로 대단히 안정해서 화학반응이 쉽게 일어나지 않아요. 이를 연구한 사람이 바로 독일의 과학자 하버입니다.”
강우의 강의가 시작됐다.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또 수학여행에서 돋보였던 강우의 강연 능력이 어디 가지 않는다. 단 몇 마디의 말을 시작했을 뿐인데도 학생들은 귀를 기울였다.
18세기 이후 인류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맬더스의 인구론에 따르면 기아 문제의 해결이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난제였다.
식량 생산을 늘리려면 비료가 필요했다. 당시 비료는 바닷새 거름을 주원료로 이용했다.
“그 해결사로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등장합니다. 그는 화학 교수 자리를 구하고 있었죠.”
사업가가 되려다 실패한 하버는 당시 유명 물리화학자였던 오스트발트의 조수로 들어가려 노력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무렵 독일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거든요. ‘35세 이전에는 너무 젊어서 교수가 될 수 없었고 45세 이후에는 너무 늙어서 교수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유태인이었다.’ 즉 하버는 유태인이었기에 교수가 되기 힘들었어요.”
오스트발트는 하버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몇 년 후 또 한 명의 유태인 과학자를 거부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다행히 카를슬루에 공과대학에 취직한 하버는 그곳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는 비료를 생산하는 암모니아 문제에 뛰어들었다. 암모니아는 폭약의 원료이기도 했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하버는 훌륭하게 보답했다.
암모니아를 제조하려면 고온 고압이 필요하다. 하버는 촉매로 이 문제를 해결했고 결국 다량의 암모니아를 공업적으로 생산하는 공정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하버-보슈 질소 고정법의 탄생이었다.
이 암모니아는 식량 생산에서 비약적인 성과를 이끌었다.
“그래서 하버법은 공기로 빵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알려졌어요. 하버는 인류를 기아에서 구원했죠. 하지만 반드시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암모니아 생산공정은 곧바로 폭약제조 기술로 둔갑했다. 인류에게 이익을 주면서 반대편으로는 인류를 해치는 과학의 양면성이 극도로 드러났다.
하버가 만든 암모니아 폭약 덕분에 독일은 6개월 만에 패배할 전쟁을 훨씬 오래 계속할 수 있었다. 하버가 암모니아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1차 세계대전의 조기 종결로 적어도 7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살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