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57화 (157/325)

제157화 2학년 (1)

“형?”

“응?”

“오늘 화학 시간에…….”

어렵게 하은찬이 말을 꺼냈다.

강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평소처럼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탁자 위에 놓인 과자로 손을 뻗었다.

와그작-

과자를 씹으면서 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거 신 쌤이 부탁해서 한 것뿐이야.”

고등학교에서 선생님 대신에 학생이 수업을 진행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에 하은찬은 어리둥절했다.

“형? 화학 잘해요?”

“화학? 주기율표 복사해서 제출했다는 사람이 바로 나야.”

그때 옆에서 윤수아가 끼어들었다.

“작년 진단고사에서 전설적인 꼴찌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지.”

“꼴찌라니? 엄연히 내 뒤에도 있었어.”

“그건 외국에서 온 학생이고.”

하은찬은 신새벽이 이야기했던 그 의문의 사건이 모두 강우랑 관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무지 이 형은 천재인지 바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형? 수학 잘해요?”

“나?”

“잘해.”

“잘해.”

“잘해!”

손차희를 비롯한 윤수아와 최대우가 합창했다.

진위를 모르지만 강우가 친구들에게 천재로 인식되는 것만은 사실 같았다. 하은찬은 비장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교재를 꺼냈다.

“어? 그거 그때 그…… 누구더라? 하여튼 고려 과학고 천재였다던 그 선배가 가르치는 교재 아냐?”

“네. 그거 맞아요.”

“그런데?”

“형! 이 문제로 나랑 수학 한번 붙어봐요.”

“에이, 넌 풀어본 거잖아!”

“아뇨, 푼 적 없어요! 우리 엄마가 거짓말하면 혼난다고…….”

하은찬이 교재를 뒤적이다가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쳤다.

“여기 이 페이지 하나씩 풀기. 모두 8문제. 어때요?”

가만히 교재를 들여다보는 강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고 하은찬을 쳐다봤다.

하은찬은 강우가 도대체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아니고 눈보다 위쪽 머리끝 지점을 보는 듯했다.

“후회 안 하겠니?”

“후회는 무슨.”

“알았어.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하은찬은 강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하죠.”

“그럼 내가 심판!”

손차희가 가담했다.

바로 결전의 장이 차려졌다.

하은찬은 연필을 손으로 돌리며 강우를 주시했다. 적어도 천재라는 타이틀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두가 천재라고 여겼던 권유성에게도 교과 전체 성적과 수학에서 밀리지 않았었다. 단지 그는 권유성처럼 조기 입학을 하지 않았을 뿐.

그렇기에 고려 과학고의 천재는 자신이어야 했다.

* * *

강우는 하은찬의 도전에 약간은 당황했다. 하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볼 때 하은찬은 우수한 학생이고 잠재력도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정한 자신의 능력을 꽃피우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사교육에 눌려 재능이 오히려 피어나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파고들어 해결할 능력을 품고 있으나 항상 옆에서 누군가가 떠먹여 줬기에 굳이 그런 능력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

더 앞서갈 수 있음에도 사교육이 가르쳐준 지점에서 맴도는 그런 학생이었다. 훗날 진정한 과학자로 피어나려면 의존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강우는 하은찬을 스스럼없이 자신의 관심사로 끌어들였었다.

“그럼 한 문제씩 대결. 모두 열 문제. 첫 번째부터 시작할까?”

손차희가 신호를 넣었고 강우와 하은찬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하은찬 또한 아직 수업을 받지 않은 단원이라 두 사람에게 공평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시작 후 불과 2분 만에 강우가 손을 들었다.

“풀었어.”

증명 문제를 곧바로 쭉 써 내려갔다. 반면 하은찬은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 벌써? 풀어본 문제야?”

“내가 풀어봤을 리가.”

손차희의 질문을 가볍게 일축한 강우는 하은찬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은찬이 손차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뒤쪽 답지와 맞춰본 손차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 그럼 다음 문제.”

다시 두 사람이 두 번째 문제에 집중했다. 이번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풀었는데?”

하은찬은 이제 두 줄 적은 상태였다.

마찬가지로 손차희가 판정을 내렸다.

강우는 이런 식의 스피드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문제를 푸는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정확성도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문제에 숨은 본연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런 식의 대결을 주저했다.

다만 하은찬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천재란 어떤 사람인지, 본인만이 천재라는, 하은찬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자부심을 깨야 했다. 그 변화가 그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하은찬은 믿음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그 시기는 사실 지금이 제일 낫다. 고등학교, 그것도 과학고에 막 들어온 이 시점. 가장 외부에 영향을 적게 미칠 때니까.

대결은 계속됐고 그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모두 여덟 번의 대결을 강우는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과거 올림피아드에 출제된 문제이기에 이러한 결과는 대단히 놀라웠다.

대결이 계속되면서 하은찬은 심리적으로 압도되어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손차희를 비롯한 고곽천재는 강우의 능력을 다시 확인했다.

아마 평소의 강우는 진정한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강우가 작심하고 달려들면 못 풀 문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결은 허무하게 끝났다.

팔 대 빵.

“아아, 그럼 겨울학교 숙제는…….”

하은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명을 요구했다.

“그거? 두 가지 때문이야. 하나는 내가 한가하게 숙제할 시간이 없었고, 다른 하나는 너를 트레이닝하려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하은찬은 강우가 못 풀어서 숙제를 그에게 맡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은찬이 넌 수학에 재능이 있어. 다만 아직 그 재능을 제대로 피우지 못했지. 그래서 앞으로는 사고력을 더 길러야 해. 답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은찬은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었다. 지금까지 여러 학원에 다녔고 모든 학원이 비슷하게 평가했다. 수학 천재라고. 다만 그 뒷이야기가 달랐다. 그 학원에 다니면 그 천재성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다고, 학원 프로그램에 맞춰 열심히 수강하고 숙제하면 된다고.

그 누구도 능동적으로 사고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무난하게 올림피아드에서 성적을 거뒀으니까. 사실 중학생이 고등부에서 성적을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번 과외도 비슷했다. 전설이라는 그 선배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고 했었다.

그런데 강우는 다른 말을 했다. 일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강우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하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란 속에서도 하은찬은 한 가지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눈앞의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고. 최근 과외를 맡은, 전설의 천재 김상학도 강우에게는 못 미칠 거라고.

“틀에 박힌 사고로 문제를 풀면 풀어본 문제만 잘 풀게 되는 거야. 그러면 성적이야 잘 나오겠지만…… 새로운 분야의 연구에서는 벽에 부딪히지.”

잔잔한 말로 설명하는 강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하은찬은 막 시작한 수학 과외를 이번 달로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했다.

* * *

다음 날 강우는 상담실에 들렀다.

오늘 신새벽은 수업이 없는 날이어서 낮부터 차도도와 상담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어제 강우 정말 강의 잘하더라.”

“이 녀석이야 뭐…… 강연 재주를 타고났으니까.”

연신 칭찬하는 신새벽과 달리 차도도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화학마저 잘할 줄은 몰랐지.”

“겉보기만 화학이었겠지.”

차가운 차도도의 반응에 신새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엄밀하게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완벽하게 화학의 한 분야로 들어왔지만 애초에 하버는 물리화학자였으니까 절반은 물리에 발을 걸친 과학자다.

무슨 강의였는지 듣지도 않고 짐작하는 차도도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다.

둘 사이의 가벼운 대립은 강우의 출현과 동시에 사라졌다.

강우는 곧바로 핵융합 논문 수정 의견을 물었다.

“음, 그 정도는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

강우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일을 맡겼다.

예전이라면 차도도는 스스로 논문을 보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셉 교수의 요구를 스스로 처리할 수준에 이르렀으니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과적으로 차도도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기쁜 마음으로 일을 털어낸 강우에게 차도도가 눈썹을 살짝 모았다.

“그럼 넌 뭐 하는데?”

“저요? 전 프로야구단 프로젝트 고민해야죠.”

“아! 그것도 있었지.”

할 일이 쌓여 있다. 방학이 방학이 아님을 깨달은 차도도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알았어.”

“조만간 야구단 방문 일정을 잡아볼까 하는데요?”

“그래, 그렇게 해.”

“3월 되기 전에 모두 끝내자고요.”

강우의 독려에 차도도도 찬성했다. 3월이 되어 신학기가 시작되면 논문에 매달릴 시간이 줄어드니까.

상담실 내부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세 사람이 각자의 일을 맡아서 한다. 지금 당장은 차도도가 가장 바쁘다. 예전이라면 버벅대며 힘들어했을 일을 지금의 차도도는 어려움 없이 홀로 처리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강우는 접어두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차도도 선생님의 능력이 불과 몇 달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했어. 그녀 본래의 재능이 개화한 것이라지만 옆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유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고곽천재 가운데 그가 가장 신경 쓴 이는 최대우다. 최대우의 S급 능력을 블로그를 통해 끌어냈다. 물리에서 최대우의 성장은 눈부시다.

그런데 차도도의 성장 속도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생각하지 못한 다른 능력이 있는 걸까.’

이것은 지금까지 천재성이라고 생각했던 이해력, 암기력, 응용력이나 아니면 창조력과는 다른 분야다. 타인의 천재성을 끌어내는 능력. 문득 강우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일 년을 돌이켜 보면 그와 함께했던 모든 사람이 성장했다.

손차희는 중학교 내내 이민찬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1년 성적은 이민찬을 능가했다. 최대우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물리학에서 새로운 눈을 떴고 하다못해 윤수아도 성적이 올랐다. 게다가 윤수아는 그와 상관없는 전산 프로그래밍에서도 성장했다.

‘고곽천재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차도도는 말할 것도 없고 신새벽은…… 그와 논문을 함께 쓰면서 달라졌다. 신새벽의 능력은 특히 수학에서 예전 대비 괄목할 향상을 이뤘다.

이 모든 일이 단지 그들이 열심히 해서인지 아니면 그가 영향을 미쳐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냥 넘어갔을 이런 일들을 다시 의미 있게 들여다보자 단순한 우연이 아닌 듯했다.

강우로 빙의한 이후 그의 천재성은 점차 발전했다. 그 영향인가. 그 혼자만이 아니라 주변 천재들도 동시에 천재성이 계발되는 걸까. 그에게 가르치는 능력이 있나?

장기적으로 확인해봐야 할 부분이다. 손강우 시절과 달리 연구 동료 확보에 애를 쓰는 그에게 이런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고민에 잠겨 있자니 옆에서 누가 툭 건드렸다.

“네?”

“강우야, 내가 보여준다던 거…… 지금 보여줄까?”

신새벽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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