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2학년 (3)
함께 구경하던 공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궤적이 미묘하게 다른데? 스플리터인 것 같으면서도 약간 달라.”
“저 선수의 스플리터에 익숙한 타자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되죠. 같은 구질이라고 생각하고 휘두르면 무조건 땅볼이 되니까요.”
“그렇지. 흠, 이거 꽤 재미 보겠는데?”
이미 강우의 코치로 효과를 봤던 공정혁은 믿음이 있어 금방 그 의도를 파악했다.
무려 십여 개의 공을 던진 후에 신재균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신재균이 공정혁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궤적이 달라. 네가 던지는 폼은 똑같은데.”
“그야 똑같은 폼으로 던졌으니까.”
“홈 플레이트 부근에서 공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차이가 나. 타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어.”
“그래? 그럼 다시…….”
신재균이 다시 투수판에 섰다.
이번에는 스플리터와 신 구종을 번갈아 던졌다.
강우가 보기에도 공의 궤적이 확실히 차이가 났다. 의도한 그대로였다.
“궤적 차이를 더 크게 할 수도 있는데…….”
“아, 그럴 필요 없어. 차이가 작을수록 타자들이 더 잘 속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때 홍 감독이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쁜 일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홍 감독이 신재균이 던지는 공의 궤적을 한참 지켜봤다.
“어? 재균이 새로운 구종 장착한 거냐? 언제 했지?”
“방금요. 이 선생님들께서 투구 모습 보고는 바로 알려주셨죠.”
“어? 지금 바로?”
믿을 수 없다는 듯 홍 감독이 강우와 차도도를 보다가 다시 신재균이 던지는 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팡-
“미묘한 궤적 차이가…… 실전에서 굉장히 효과적이겠는데?”
홍 감독이 입을 쩍 벌렸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프로젝트에 투입한 비용을 뽑았다는 생각에 홍 감독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야구인이라면 누구도 이런 식으로 손쉽게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공정혁의 경우는 남달리 변화구에 소질 있는 녀석의 특별한 케이스라 여겼다.
그런데 신재균도 달라졌다. 직구와 스플리터밖에 던지지 못하는 녀석이 비슷한 구종을 금세 장착했다. 불과 한나절 만에. 그것도 당장 실전에 투입해서 쓸 수 있을 만큼 완벽하다.
“홍 감독님 어때요?”
신재균이 투수판에 서서 물었다.
“완벽해!”
홍 감독이 엄지를 척 내밀었다.
신재균은 신이 나서 새로운 구종을 계속 연습했다.
강우와 차도도를 보는 홍 감독과 신재균의 시선이 확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야구가 아닌 타 분야의 특별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야구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됐다.
강우와 차도도는 구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프로구단을 방문한 기념으로 선수들이 먹는 식단을 경험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강우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줄을 선 사람들을 만났다.
“이거 뭐예요?”
아무리 차도도가 예뻐도 사인받으려고 이렇게 줄을 서지는 않을 텐데?
공정혁이 옆에서 속삭였다.
“쟤들 모두 투수야. 밥 먹는 동안 재균이의 성과가 알려졌거든. 모두 너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허억!”
강우는 차도도의 손을 잡고 어디로 도망칠지 눈을 굴렸다.
긴 줄의 맨 뒤에 선 백동수마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무시하며 가더니…… 역시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다.
* * *
2월의 마지막 날, 예비입학기간이 끝난 학교는 다시 북적였다.
신학기를 맞아 재학생들의 기숙사 입주가 시작된 탓이다. 수업은 없었으나 집에 가지 않은 신입생과 막 입주한 재학생으로 학교는 활기찬 새봄을 맞이했다.
강우는 이번에도 최대우와 같은 방을 사용했다.
몇몇 학생들이 은근히 같은 방을 쓰자는 제안을 해왔으나 강우는 굳이 룸메이트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최대우와 이래저래 마음이 잘 맞는 데다가 옮기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다.
그는 예비입학기간에 미리 기숙사에 들어와 있었기에 이사할 필요조차 없어 아침을 먹은 후 곧장 세미나실로 향했다.
최대우와 함께 세미나실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폭죽이 터졌다.
“강우야! 생일 축하해!”
“어? 뭔 생일?”
탁자에는 작은 케이크가 놓여 있고 그 옆에서 손차희와 윤수아가 연달아 폭죽을 터트렸다.
“뭔 생일이라니? 네 생일이잖아? 작년에 못 챙겼으니 올해는 챙겨야지.”
생각해보니 생일을 챙긴 기억이 없다. 고곽천재는 조원이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간단하게 축하파티를 열었었다. 대부분 조각 케이크에 작은 초를 꼽은, 무늬만 파티였지만.
손차희를 비롯한 팀원의 생일이 2학기 때여서 연달아 파티를 열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우는 자신의 생일을 챙긴 기억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2월 마지막 날이라 작년에는 아직 친해지기 전이었고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바빠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친구에게 생일을 챙겨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 생일인지 언제인지 알아야 말이지.’
강우의 생일이 오늘이었나? 태어나서 생일에 관심을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손강우 시절에도, 강우로 새 삶을 살게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손강우가 강우의 생일을 무슨 재주로 안단 말인가? 아무리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도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여력이 닿지 않았다.
“이런? 몰랐나 보네?”
“과, 관심이 없어서.”
“어휴, 공부하느라 정신없나 보다. 오늘 네 생일 맞아. 외우기도 쉽네. 2월의 마지막 날! 29일이 아닌 걸 다행이라 생각해.”
“어, 어떻게 알았어?”
“쌤이 기억하시던데?”
학생부 기록을 보고 알았을 차도도의 씀씀이가 새삼 대단하게 다가왔다.
“안 챙겨줘도 되는데…….”
“강우야, 너 때문에 우리가 받는 월급이 얼만데…….”
고곽천재는 카이스트 프로젝트로 용돈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 강우에게 감사했다.
조각 케이크에 꽂힌 작은 초에 불을 붙이고 박수를 반주 삼아 강우는 촛불을 껐다.
“작년에도 알았으면 챙겼을 거야. 도서관이라 여기에서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지 못하지만, 다음에는 꼭 불러줄게.”
지난 과학 축제 때 봤듯이 손차희는 노래를 잘 부른다. 손차희의 축하 노래를 들어보고 싶다.
생일 케이크를 받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손강우 시절에도 딱히 기억이 없다. 오늘 받은 이 조각 케이크는 아주 작지만, 그에게는 이 세상 어떤 케이크보다 더 컸다.
아울러 손강우 때와 달리 지금 그의 주변에는 동료가 많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강우로 빙의한 이후 지금까지 그가 심혈을 기울였던, 친구와 연구 동료를 많이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놓였다.
그는 자신을 축하해주는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에게 깊이 감사했다. 그에게 주변 사람의 천재성을 깨우는 능력이, 남을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정말이라면 그들의 행복을 위해 아낌없이 그 능력을 사용하겠다고 다짐했다.
* * *
저녁에 강우는 차도도에게 잡혔다.
“얼른 가자.”
“예? 어디요?”
“신 선생님이 너 데려오라더라.”
차도도에게 잡혀 B동 입구로 갔더니 낯선 하얀 차가 서 있다. 그 차 옆에서 신새벽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긴 코트로 가리고 있으나 안으로 얼핏 보이는 옷차림새가 오늘 한껏 멋을 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뭐예요?”
“타!”
신새벽이 손수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고는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차도도가 조수석에 타려 하자 신새벽이 손으로 가리키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차 선생님은 뒷자리!”
피식 웃으며 차도도가 강우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차에 오른 강우는 차를 타는 신새벽을 지켜봤다.
“우리 쌤보다 차가 좋네요.”
“당연하지. 너희 쌤 차는 차가 아니야. 굴러간다고 모두 차라고 부르진 않아.”
신새벽의 차는 평범한 국산 중형 세단이다.
“뭔 소리야? 내 차도 잘만 가는데. 적어도 강우는…… 차로 사람을 평가하진 않아.”
차도도가 발끈해서 반박했다.
“그래도 나란히 있으면 내 차를 탈걸? 그렇지?”
강우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다툼이 나이답지 않게 어린애 같아서다. 이제는 차도도가 마음을 먹으면 외제차를 굴릴 능력이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사실 차 논쟁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그가 보기에 두 사람 모두 차를 제대로 모르고 운전도 서투르니까.
“거봐. 대답을 회피하잖아? 내 말이 맞는다는 거지.”
신새벽이 자신감을 뿜어냈다.
괜히 곤란해진 강우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근데…… 운전은 잘해요?”
“운전?”
신새벽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떨렸다.
뭔가 불길하다. 강우는 정색하며 다시 물었다.
“저희 쌤보다는 운전 잘하시죠?”
“그럴 리가 있겠니? 이 차가 첫차이고 산 지 두 달밖에 안 됐어. 그것도 주말에 간신히 연습하는 수준.”
차도도가 재빨리 고자질했다.
어쩐지 새 차 냄새가 나더라니. 다시 살펴보니 아직 뜯지 않은 비닐 흔적도 남아있다.
“허억!”
“그래도 여기까지 잘 끌고 왔어!”
예전에 차도도도 학교까지는 끌고 왔었다. 그런데도 차선조차 제대로 바꾸지 못하던데?
강우의 시선을 피하며 신새벽이 시동을 걸었다.
“강우야, 어디로 갈래? 오늘 네가 가자는 대로 어디든 간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네 생일이잖아? 내가 배 터지도록 밥 사줄게.”
질보다 양이 우선인 강우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생각해볼수록 신새벽에게는 얻어먹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가 그녀를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괜찮은 한우 집으로 가요!”
최대우가 없으니 오늘은 돼지고기가 아닌 소고기다.
“좋아!”
하얀 차가 세 사람을 싣고 교문을 벗어났다.
신새벽의 실체는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들통났다. 때마침 퇴근길의 러시아워에 갇혀 신새벽은 차선을 바꾸지 못했다.
“지금 1차선으로 바꿔야 해요!”
“어, 어어…… 지나쳤는데?”
“그럼 이번엔 우측으로.”
“거긴 버스가…… 난 버스가 겁이 나…….”
답이 없다. 차도도와 별반 차이를 모르겠다.
괜찮은 고깃집을 정하고도 갈 수 없는 상태여서 차는 마냥 똑바로 전진했다. 복잡한 길에서 차선을 바꾸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 고난도 작업이었다.
다행히 엉금엉금 기어가던 차는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국도의 고깃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강우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으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왜 하나같이…….”
신새벽과 차도도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자신은 아니라고 무언의 시위를 했다. 아무리 그래 봐야 베테랑 운전사인 손강우의 실력을 기억하는 강우에게는 똑같은 두 사람일 뿐.
강우는 허탈한 신음을 토하면서 얼른 자신이 운전면허를 따기를 고대했다. 아쉽게도 아직 1년이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