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파이데이 (1)
1등 하은찬.
2등 유혜림.
3등 문우주.
놀랍게도 하은찬이 신입생 수석으로 입학했다. 일전에 녀석의 재능을 확인한 적이 있던 강우에게는 그리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다.
유혜림은 여학생이었고 문우주는 남학생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강우는 학생들의 머리 위에서 드러나는 재능을 읽을 수 있었다.
- 유혜림, 수학 B, 물리 B, 화학 A, 생물 A, 지구과학 B.
- 문우주, 수학 B, 물리 A, 화학 B, 생물 C, 지구과학 A.
아쉽게도 두 사람에게는 S가 보이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손차희와 비슷한 수준. 저 두 학생은 손차희처럼 꼼꼼함과 성실함으로 성적을 유지하는 유형이었다.
저 신입생 가운데 S급을 가진 학생이 한둘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이로써 S급이 희귀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어쨌든 하은찬과는 이미 친목을 다졌으니 할 일을 덜었다.
그사이 세 학생이 차례로 장학금을 전달받았다. 강우는 힘껏 박수로 축하했다.
* * *
3월 14일은 파이데이다.
수학에서 원주율(π)이 3.14임에 착안한 과학행사다.
원주율은 원의 둘레를 원의 지름으로 나눈 값으로 무한소수다. 흔히 3.14로 알려졌으나 실제 값은 그 아래로도 끝이 없다.
파이데이에는 원주율을 어디까지 외우는지 경쟁하는 대회가 열린다.
당연히 암기력이 우선이고 강우는 천재성이 암기와 거의 연관성이 없다고 믿기에 다른 행사와 달리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파이데이 날 아침에 조회에 들어온 차도도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원주율 잘 외우는 학생?”
오늘이 파이데이란 사실 자체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은 어리둥절 당황했다.
“고현성? 원주율 외워봐.”
“3.14.”
“그다음?”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다 보면 그 이후로도 저절로 외우게 되어 있다. 가끔 그 아래까지 계산하라는 문제가 있으니까.
“3.141592.”
“흠, 많이 기억하네. 그 이후엔?”
“모르는데요?”
“아는 학생?”
어떤 학생이 재빨리 휴대폰에서 공학용 계산기를 눌렀다. 그 뒤로 숫자가 주르륵 나왔다.
“3.1415926535.”
“많이 아네. 너 나오고.”
의도를 몰라 학생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또 더 외우는 학생?”
한 학생이 손을 들고 그 뒤까지 외웠다. 그 학생은 소수점 아래 12자리까지 암기했다.
“그래, 너도 나오고. 또 외울 수 있는 학생?”
두 학생이 더 손들었다.
차도도가 손짓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모두 네 학생이 앞으로 나갔다.
“더 없니?”
학생들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파이데이인 건 알지?”
“예? 뭔 데이요? 빼빼로데이, 삼겹살데이는 들어봤어도 파이데이는 처음 듣는데요?”
최대우가 뒤에 앉은 강우에게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파인애플 먹는 날인가 봐.”
이 자식은 어째 먹는 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간다.
차도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파이데이여서 강당에서 파이데이 행사를 해. 원주율 많이 외우는 학생에게 상금을 지급하거든. 나갈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귀찮다는 뜻이다.
당연히 강우도 귀찮아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상에 얼굴을 바짝 대고 숨어 있자니 차도도가 호명했다.
“강우! 출전해.”
“예? 제가요? 전 암기 못 하는데요?”
“너 아니면 누가 나가니? 수학 행사에는 수학 올킬 용사가 나가야지. 안 그래?”
“올킬! 올킬!”
학생들이 합창하며 강우를 떠밀었다.
“아아! 하늘이 나에게 시련을 내리는구나.”
강우는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일어나 앞으로 나가면서 차도도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나에게 그럴 필요 없어. 정명욱 선생님께서 넌 꼭 내보내라고 했으니까.”
“정명욱 쌤이요?”
“자, 5명 됐지? 한 반에 5명 출전이니까 지금 강당으로 가봐. 좋은 결과 기대할게.”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의 뒤를 따라 나가려 할 때 갑자기 고현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쌤! 저도 가면 안 될까요?”
“넌 또 왜?”
“응원해야 하는데요?”
“강우 응원하는 거야?”
“아뇨. 차희 응원할 건데요?”
“다른 곳으로 새지 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현성을 훑어보던 차도도가 수락했다.
강우는 가장 마지막에 강의실을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음모에 휘말린 기분이다.
어차피 상관없나? 강의실에서 자나 강당에서 자나 달라질 건 없으니까.
* * *
강당에 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미리 놓인 간이의자에 앉았다.
한 반에 5명씩이어서 3개 학년 모두 120명이다. 그곳에서 강우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손차희와 윤수아다. 최근에 반이 달라서 세미나실에서만 얼굴을 봤는데 수업시간 중에 강당에서 이렇게 만나니 작년 기억이 솔솔 났다.
“강우야, 강우야아! 원주율 잘 외워?”
반갑게 맞이하는 윤수아에게 강우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잘 외우겠니? 담임에게 말린 거지. 근데 넌 잘 외우니?”
“나? 그럭저럭. 외우는 거는 별로 안 밀리지.”
윤수아가 자신감을 드러냈고 옆에서 손차희가 실실 웃고 있었다. 대충 강우가 짐작해보니 손차희도 암기력에서 절대 밀릴 녀석이 아니다.
셋이서 나란히 앉아있자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최대우도 데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단상에 두 선생님이 올라왔다.
불빛에 대머리가 번쩍이는 선생님은 정명욱이고 그 옆에서 열심히 보조하는 선생님은 이름을 모른다. 대충 작년에 3학년을 맡은 선생님이었다고 기억했다. 올해도 2학년 담당은 아니다.
정명욱이 마이크를 들고 단상에서 경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수학의 날, 파이데이입니다. 원래는 오늘 새벽 1시 59분에 개최해야 하는데 야밤에 할 수는 없으니 이 시간에 열게 되었습니다.”
순간 왜 1시 59분인지 궁금해하던 학생들이 원주율을 떠올리고 금방 수긍했다.
“파이가 뭔지는 다 알죠? 그리스 문자 페리메트로스에서 온 거예요. 원주율이죠!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 문제 풀다가 3.14를 곱하느라 엄청 귀찮아서 욕을 퍼부었던 기억이 날 겁니다. 그렇죠?”
학생들의 웃음 속에 정명욱이 계속 말했다.
“알다시피 원주율은 무한소수입니다. 즉 끝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원주율 암기왕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5분 후부터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원주율을 암기합니다. 가장 많이 암기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자! 5분 드릴 테니 얼른 외우세요!”
어리둥절 두서없는 가운데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늦게 할수록 유리하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외워 보면 그게 아님을 알 거예요.”
정명욱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학생들이 휴대폰을 꺼내 원주율을 찾아 외우기 시작했다.
“강우야? 얼마나 외웠어?”
윤수아의 질문에 강우는 손을 저었다.
“외우긴 뭘 외워? 평소 실력으로 쳐야지. 원래 시험은 평소 실력이 중요한 거야.”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
“성의는 무슨.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상금 준대잖아?”
“그건 1등 했을 때 이야기지.”
툭탁거리며 불평을 토하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정명욱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자! 준비됐나요?”
“예!”
학생들이 함성을 질렀다.
“좋습니다! 시작해 보죠.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정명욱이 한 사람을 호명했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 박일현!”
역시 수학이 관련된 날이라고 박일현이 제일 먼저 호명됐다.
박일현이 단상으로 나가자 정명욱이 물었다.
“원주율 잘 외우나요?”
“아뇨.”
“그래도 금메달의 자존심을 챙겨야겠죠? 금메달인데 못하면 쪽팔리잖아요?”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겠습니다.”
박일현이 웃으며 손사래 쳤다.
“자! 시작합니다!”
“3.1415926535897932…….”
놀랍게도 박일현이 한참을 외웠다.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진 가운데 어느 순간 정명욱이 신호를 울렸다.
“땡! 거기서 틀렸습니다. 아! 몇 자리까지 외웠나…… 총 서른두 번째 자리까지 외웠네요. 놀랍습니다.”
강우도 놀랐다. 저렇게 많이 외우는 학생이 존재하다니!
“자! 다음은 누가 할까요?”
“국가대표…….”
“아! 그렇죠! 국가대표 상비군! 딱 대표 문턱까지만 가본 학생이 있군요. 권유성!”
권유성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랐다.
“원주율 얼마나 외우죠?”
“잘 외웁니다.”
“어? 잘 외운다고 장담하는데요,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권유성이 원주율을 외웠다. 권유성은 박일현보다 더 놀라웠다. 의미 없어 보이는 숫자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강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괴물이네.”
“유성이는 중학교 때 학원에서도 원주율을 열심히 외웠어.”
“그거 외워서 어디에 쓰게?”
“몰라. 그냥 머리 좋다고 과시하는 거 아닐까?”
놀라운 권유성의 암기력에 학생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윽고 권유성이 멈췄다.
“거기까지입니까? 더 외워 보죠?”
“더는 모르는데요.”
“그럼, 거기까지! 모두 85자리까지였습니다!”
놀라웠다. 권유성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을 줄은.
혀를 내두르는 사이 다른 학생이 단상에 올라갔다. 예전에 이론수학부에서 학습부장을 맡았다던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불과 20자리도 넘기지 못했다.
“자, 다른 올림피아드도 있죠. 물리 올림피아드 금상!”
김창식이 올라가서 원주율을 외웠다. 이 학생도 끝없이 외웠으나 권유성을 본 터라 그리 놀랍지 않았다. 김창식은 54자리에서 끝났다.
그렇게 진행하던 정명욱이 강우를 호명했다.
“자! 고중전에서 역올킬을 달성했던 강우 학생!”
어쩔 수 없이 강우도 단상에 올라갔다.
“자! 암기해봐요. 학생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는 없겠죠?”
“3.14.”
“네? 그 뒤는?”
“모르는데요?”
“아아! 우째 이런 일이!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당당하게 꼴찌를 하다니! 딱 초등생이 외우는 지점까지 아는군요.”
“모르는 건 죄가 아니란 말 모르세요? 근데…… 제가 팬이 어디 있다고…….”
“내가 너 팬이거든!”
“아! 죄송합니다.”
강우는 본능적으로 꾸벅 인사했다.
강우가 내려가자 정명욱이 다음 학생을 호명했다.
“현재 2학년 내신 1위! 손차희 학생!”
손차희가 의기양양하게 단상에 올랐다. 놀랍게도 그녀의 뒤에 고현성이 따라붙었다. 고현성은 기타를 쥐고 있었다.
“넌 왜 올라와?”
정명욱의 제지에 고현성이 재빨리 대답했다.
“차희 응원하려고요.”
마치 축제 때 그날처럼 두 사람이 단상에 섰다. 아쉽게도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고현성이 먼저 기타로 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기타 음이 강당을 울렸다. 바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곡이다.
전주가 끝나자 손차희가 기타 음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원래의 가사가 아닌 원주율을 가사로 넣은 노래다.
“3.1415926535897993238462…….”
강당을 메운 학생들은 손차희의 기발한 방법에 경악했다. 노래를 이용하여 암기하는 방법은 널리 사용되지만 그 방법을 여기에서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다.
한국을 빛낸 위인들 노래에서 위인 이름만 100명이다. 하지만 이름에만 원주율 숫자를 붙인 게 아니다. 모든 가사에 숫자를 붙였으니 대체 몇 개인가? 총 5절인 이 노래는 1절 가사의 글자만 120개이니 1절을 부른 손차희는 단번에 소수 120번째 자리까지 암기했다.
고현성의 반주에 맞춰 손차희는 원곡처럼 무려 5절까지 반복했고 단숨에 600자리까지 암기하는 기염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