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62화 (162/325)

제162화 파이데이 (2)

강우는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강당에까지 불려 나가 열심히 기타 반주를 하는 고현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작년 과학 축제에서 손차희가 녀석의 발라드에 답가해준 적이 있기에 고현성은 손차희의 부탁을 들어줄 명분이 있다. 물론 좋아서 자원했을 게 확실하지만.

노래가 끝나는 순간 학생들은 우레같은 박수를 보냈다.

손차희는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다소곳하게 청중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아! 대단합니다! 무려! 소수점 아래 600자리까지 암기했습니다. 과연 이 기록에 도전할 사람이 있을까요?”

정명욱이 환호성을 지르며 칭찬했고 다음 주자는 안색이 흙빛이 됐다.

“이번 도전자는 작년 입학 랭킹 1위의 이민찬 학생!”

어수선한 가운데 단상에 오른 이민찬은 불과 20여 자리째에서 틀리는 바람에 곧바로 내려와야 했다. 그다음 입학 3위였던 주영식도 나왔으나 별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자! 이번에는 신입생 랭킹 1위! 하은찬 학생!”

하은찬이 단상에 올라갔고 열심히 원주율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하은찬의 암기력도 제법이었다. 무려 100자리를 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대단합니다. 특별히 외웠나요?”

“어제부터 온종일 원주율만 외웠어요. 우리 엄마가 외우라고 했거든요. 지금 토할 것 같아요. 우엑!”

하은찬이 토하는 연기로 소동을 벌이고는 재빨리 단상을 내려갔다.

“자! 다음 도전자는 신입생 랭킹 2위! 유혜림!”

호명된 여학생이 당당하게 올라갔다. 동그란 안경을 쓴 귀여운 여학생이다.

강우는 이 여학생의 인상이 윤수아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안경 때문일지도.

“얼마나 외웠나요?”

“저도 어제부터 정신없이 외웠습니다.”

“오늘 훌륭한 선배를 보니 어떻습니까? 이길 실력이 될까요?”

“나와서 죽 쑤는 어떤 선배를 보고 가볍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듣던 바와 달리 너무 못해서 실망이었거든요. 그런데 손차희 선배님을 보고는 자신감이 팍 꺾였습니다.”

“죽 쑨 그 어떤 선배가 대체 누굽니까?”

“강우 선배요.”

느긋하게 구경하던 강우는 화들짝 놀라 입만 벌렸다. 갑자기 거기에서 자신의 이름이 왜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소수 둘째 자리까지밖에 모르잖아요. 입학하기 전에 강우 선배님이 천재라는 말을 누차 들었는데 완전 실망이에요.”

이어지는 유혜림의 설명에 강우는 더욱 안개에 갇힌 기분이었다. 입학 전부터 그의 명성을 들었다니?

옆에서 윤수아가 강우를 쿡 찔렀다.

“저 여학생이 널 완전히 물 먹이는데?”

“아는 학생이야? 누구지? 입학 전부터 나를 어떻게 알아?”

“아! 혜림이 오빠가 우리랑 같은 학년일걸?”

누군지 모르지만 대충 감이 왔다. 과학고를 준비하면서 또 학교에 입학하면서 오빠에게 학교 사정을 물어봤나 보다.

어쨌든 실망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주 조금 아프지만, 암기에서만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못 미치는 강우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유혜림의 실력도 놀라웠다. 그녀는 무려 소수 165번째 자리까지 외웠다. 손차희에 이어 당당히 두 번째 순위를 차지했다.

한 반당 5명씩 차출된 120명이 모두 한 차례씩 앞으로 나가 암기력을 테스트받았다. 그 누구도 손차희를 능가하지 못했다.

원주율 암기 대회가 끝나자 정명욱이 마이크를 잡고 힘차게 외쳤다.

“모두 암기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파이데이를 맞이하여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분께 사과파이를 대접하겠습니다!”

“와아!”

어디에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사과파이에 음료수가 일 인당 한 개씩 주어졌다.

모든 학생이 싱글벙글이다. 특히 먹는 것을 좋아하는 윤수아는 웃음꽃이 떠날 줄 몰랐다.

“대우를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사과파이를 먹으면서도 강우는 최대우에게 미안했다. 콩 한 조각도 나눠 먹어야 하는데. 대회 출전자에게 사과파이를 준다고 공고했으면 최대우도 옆에 있었겠지.

사과파이를 먹고 나자 정명욱이 다시 단상으로 나왔다.

“자! 방금 신입생 유혜림 학생이 죽 쒀서 실망했다던 사람 있죠? 강우 앞으로!”

“어?”

예기치 못한 호명에 강우는 어쩔 수 없이 부스스 일어났다. 정명욱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고 있자니 정명욱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후배에게 실망만 안겨줄 수는 없잖아?”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지. 마지 못해 강우는 단상에 올라갔다.

그를 단상에 세워 놓고 정명욱이 다시 소개했다.

“이 학생이 바로 강우라는 학생입니다. 누구냐 하면…… 작년 고중전 OX 퀴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특별 퀴즈를 혼자서 맞췄으며 수학 퀴즈에서는 중앙고 선수 다섯을 단칼에 제압해버린 학생이죠. 들어봤나요?”

“예!”

의외로 신입생에서 상당수 반응이 나왔다.

“현 2학년 학생에게 고려 과학고 최고 천재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모두가 강우 군이라고 답한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예!”

정명욱이 마이크를 청중 쪽으로 돌리자 학생들이 반 장난삼아 합창으로 호응했다.

“천재! 천재!”

“그런데 오늘 실망이죠? 겨우 소수 둘째 자리까지만 말하고 내려가다니! 이걸 그냥 두면 안 되겠죠?”

“예!”

대체 정명욱이 무엇을 하려는지 강우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원주율을 암기하지 못하니 특별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자! 강우 군! 파이데이를 맞이해서 저 학생들의 호응에 답해야죠?”

“네?”

“후배들을 깜짝 놀라게 할 재주가 있나요?”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래도 명예 회복해야죠. 후배를 실망시킬 수 없잖아요? 자, 기회를 줄 테니 무엇이든 해봐요! 재주 없으면 노래라도 부르고요!”

강우에게 마이크가 넘어왔다. 단상을 내려가는 정명욱이 눈을 찡긋했다.

‘대체 뭘 하라는 거지?’

청중을 둘러보니 기대하는 눈빛이 가득하다. 특히 신입생들의 눈빛이 무척 초롱초롱했다.

정말 손차희처럼 노래하라는 뜻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실망을 줄 수도 없으니.

당황해서 단상을 쓱 훑어보는 강우에게 한쪽 옆에 세워진 화이트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알 것 같다.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강우는 단상 바로 아래에 앉아있는 유혜림과 시선을 마주쳤다. 지금 이 사태를 초래한 학생이다. 저 학생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강우는 순식간에 주제를 잡았다.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간단한 강연을 해보라는 정명욱의 의도를 깨달았다.

강우는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 자리에 서게 되어 혼란스럽지만, 여러분들이 원하시니 특별한 강연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파이데이! 원주율 파이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죠!”

강우는 화이트보드에 원을 크게 그리고 그 옆에 파이(π)라고 썼다.

지금 청중들이 이 나라를 빛낼 과학고 학생이기에, 그중 신입생이 많기에 강우는 결심을 굳히고 마카를 들었다. 오늘 강연을 계기로 한 사람이라도 더 과학에 몰입한다면 이 시간은 보람 있다. 그렇기에 강우는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비록 저는 원주율을 암기하지 못하지만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압니다.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먼저, 파인만이라고 아세요?”

“수학 물리 학원 이름요!”

어떤 학생의 대답에 웃음이 넘쳤다.

“파인만은 입자물리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천재 과학자죠. 어릴 때부터 천재로 불린 그는 역사적 관점에서도 유럽을 넘은 미국의 첫 과학자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당연히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요. 그 파인만도 파이를 암기했어요. 파인만은 소수점 아래 767번째 자리까지 외웠답니다. 놀랍죠?”

오늘 손차희는 무려 600자리까지 외웠다. 그런데 과학자 파인만은 그보다 더 많이 외웠다니 학생들은 아연실색했다.

“자, 파인만이 여기까지 외운 이유가 있겠죠? 파이를 쭉 써보면 소수점 아래 762번째부터 767번째까지 9가 연달아 6개가 나옵니다. 이 자리는 원주율에서 같은 수가 연달아 4개 이상 나오는 첫 번째 위치이고요. 자! 정명욱 선생님께서 확인해주셔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정명욱이 파이를 쭉 써놓은 답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강우 학생의 말이 맞습니다.”

“파인만은 9가 연속되는 이 지점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암기했다네요. 이 지점을 원주율에서 파인만 포인트라 부릅니다.”

과학적인 새로운 내용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강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비록 저는 3.14까지밖에 외우지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도 외울 수 있어요.”

강우가 화이트 보드에 영어로 문장을 썼다.

- How I want a drink, alcoholic of course after the heavy lectures involving quantum mechanics!

“저게 뭐야?”

“번역하면…… 양자역학을 포함한 어려운 강의 후에는 얼마나 한잔하고 싶은가!”

문장을 나열한 강우가 다시 설명했다.

“이 문장의 철자를 세어보세요. How는 3, I는 1, want는 4…….”

문장의 철자를 쭉 적어보니 3.141592…… 가 나왔다.

“우와! 신기하다!”

학생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자, 이제 조금 더 수학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원주율 파이값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요?”

“원의 넓이요!”

“네, 맞습니다. 원의 넓이에서 파이가 나오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파이를 계산했죠. 근대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해석학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원방정식을 적분해서 정확한 원의 넓이를 구할 수 있어요. 바로 이렇게.”

강우는 적분식을 나열했다. 고등학교 이과 수학에서 배우는 적분식이다.

“이 식을 테일러 급수 전개하면 파이의 값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 테일러 급수 전개? 아직 안 배웠나요? 과학고니까 졸업 전까지 배울 거예요. 그래서 이 식을 전개해보면…….”

강우가 칠판에 수식을 전개했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

전개한 수식의 각 항을 더하자 어느새 파이의 근삿값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이를 구하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수학자가 별별 이상한 방법을 고안해냈죠.”

순식간에 화이트 보드에 복잡한 수식들을 쭉 나열했다.

물론 학생들은 곧바로 강우의 수식 전개를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파이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수학자가 고민하며 문제에 접근했는지 이해했다. 그 방식은 하나하나가 독창적이었고 제안자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다.

“4000년 전 그리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학자들은 파이의 참값을 구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썼어요. 앞에서 설명한 비에트 공식은 무한곱이 서서히 수렴하기 때문에 값을 구하기에는 부적합하죠. 월리스나 라이프니쯔 공식도 같은 이유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확인한 강우는 말을 이었다.

“천재 뉴턴도 파이를 연구했어요. 그는 역삼각함수를 사용했고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근삿값을 얻을 수 있었죠.”

파이의 값을 구하려는 인류의 장대한 역사를 소개했다. 이는 곧 수학 발전의 역사였다.

“18세기에도 수학자들은 누가 더 정확히 파이를 구하는지 경쟁했고 이 무렵 이미 파이의 값은 소수 100번째 자릿수를 넘어섰죠. 20세기 중반에는 계산기를 이용해서 소수점 아래 808번째 자리까지 구했답니다.”

학생들은 수학자들의 끈기에 놀랐다.

그 이후 손으로 계산하는 시대의 종말이 왔다. 컴퓨터를 이용하면서 파이의 값은 더욱 정확해져 1973년에는 100만 번째 자리까지 값을 구해냈다. 이제는 역삼각함수에 기반을 둔 급수가 아닌 가우스의 대수적-해석학적 수열을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의 수학자들은 앞의 숫자를 구하지 않고도 뒤의 숫자를 알아낼 수 있게 됐다. 이 방법으로 1990년대 말까지 파이는 소수점 아래 206조 번째 숫자까지 밝혀졌다.

“206조? 미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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