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파이데이 (3)
강우의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깨웠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 파이(π)! 오늘 파이의 근삿값을 외우는 것부터 사실 뜬금없었다. 그런데 역대 수학자들의 노력을 찾아보면 더 미친 짓을 확인할 수 있다. 대체 파이의 206조 번째 자리의 수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우리는 이 부분에서 과거에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섰던 모험가처럼 미지의 수를 찾아 닻을 올린 수학자의 광기를 엿볼 수 있어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탐구로 수학은 큰 발전을 거듭했어요.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파이의 성질을 연구하면서 수학자들은 수의 성질과 연결된 여러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죠.”
미지를 탐구하는 사람이 과학자이자 수학자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호기심이 학문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강우의 강연을 듣는 학생들은 유명 과학자들의 그 열정을 지금 전달받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열정이 끓어올랐다.
호기심을 탐구한 선각자와 교감한 학생들은 훗날 자신이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킬 주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날까지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했다. 파이라는 수를 구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던 그 시절 그 수학자처럼.
그 열정을 강우가 학생들에게 전했다.
* * *
단상의 한쪽 구석에서 강연을 지켜보던 정명욱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하! 미친 녀석…….”
보면 볼수록 놀라운 학생이었다. 처음 강우를 수학 시간에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고 눈치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다.
물리에 재능을 보이는 강우가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놀라운 강연을 선보였다고 들었을 때 물리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여행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연에 능한 사람이라면 적당한 주제를 한 개 정도는 품고 있어서 돌발적인 상황에서 그 강연을 훌륭하게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물리가 아닌 수학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강우가 보인 수학적인 재능은 내신 수학에서 탁월한 점수를 받은 일이 전부였다.
“오늘 강우는 준비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오늘 강우를 불러낸 것은 사실 그의 계략이었다. 강우의 천재성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강연은 단순히 문제를 잘 푼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우는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파이란 수의 설명뿐 아니라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수학자, 과학자의 사명감을 불어 넣었다.
이 학교의 어떤 선생님이라도 오늘처럼 돌발적인 상황에서 강연을 맡기면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미리 주제를 던져주더라도 쉽지 않을 수준의 강연이었다.
“대체 저 녀석의 수학적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알 수 없군.”
정명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환호하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오늘 신입생들은 강우를 통해 커다란 자극을 얻었다. 그 자극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 학생들의 능력을 키울 것이기에 정명욱은 강우에게 감사했다.
* * *
강연을 들은 신입생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단상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는 강당에서 행해지는 수업 아닌 수업에 적잖게 짜증이 났었다. 그것도 선생님도 아닌 같은 학생의 수업이었으니.
그런데 강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몰입했고 강연이 끝났을 때는 마치 웅장한 오페라 콘서트를 관람한 것처럼 가슴이 뿌듯해졌다. 수학에서 이런 감동은 처음이었다.
그 신입생 가운데 차석으로 입학한 유혜림도 있었다.
작년부터 오빠는 집에 올 때마다 학교의 천재 학생을 자랑했었다. 그 천재는 다른 천재와 다르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자랐던 유혜림도 당연히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고려 과학고에 입학하면 꼭 승부를 겨뤄보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그 학생을 만났다.
“겨우 둘째 자리까지 밖에 못 외우다니!”
둘째 자리까지는 누구나 아는 것이기에 이것은 성의 없이 경기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며칠간 파이를 외우느라 시간을 쏟은 그녀는 배신감을 느꼈다.
저런 천재라면, 앞으로도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천재여도 노력과 성실이 빠지면 그 꽃을 피울 수 없다고 믿으니까.
그리고 이 대회에서 그녀는 보란 듯이 당당히 2등을 차지했다.
2학년의 그 기이한 천재를 압도적으로 눌렀다는 기쁨을 만끽했다.
그런데 그 기분이 불과 몇 분 후에 뒤집혔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교과과목, 아니 과학고 입시 위주로 공부했던 그녀는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 강우에게서 술술 흘러나왔다.
강연을 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강연은 단순히 외운 설명이 아니라 머릿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완전히 체화된 지식이란 것을. 게다가 그 속에는 마치 수십 년 이상 연구에 매진했던 과학자의, 과학사를 통찰하는 깊이가 있었다.
“멋진 강연이었어…….”
어릴 때부터 자주 강연을 들었어도 오늘처럼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강연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강연자 때문인지는 그녀도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최고였다.
유혜림의 시선이 단상을 내려오는 강우를 뒤쫓았다.
학생들이 강우를 환호했고 몇몇 학생들은 강우와 손을 하이파이브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유독 강우 옆에서 미소 짓는 두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 여학생은 오늘 파이데이 우승자였다.
괜히 샘이 난다. 저 옆에 자신이 있고 싶다.
“강우 선배가 가입된 동아리가 어디지?”
강우와 대결을 펼치고 싶었던 마음은 이 순간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에 강우의 옆에서 배우고 싶었다. 천재를 옆에서 관찰하는 즐거움을 그녀도 안다. 이것은 아이돌에 관심을 두는 팬심과 비슷하니까.
무엇보다 그렇게 옆에 있으면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같은 학년이 아니어서 같이 수업을 듣지는 못하지만 유일하게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바로 동아리 시간이다.
* * *
세미나실 탁자에 과자봉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파이데이 우승자인 손차희가 한턱 냈다. 윤수아와 최대우는 두 팔을 벌려 환영했고 강우도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이제는 반이 달라 예전처럼 계속 얼굴을 맞대지 못하지만 이렇게 세미나실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아쉬움을 덜었다.
가끔 세미나실에 오던 신입생 하은찬은 오늘 빠졌다.
윤수아가 미소를 지으며 소감을 말했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좋다.”
“먹을 게 있으니 좋은 거지.”
손차희가 핀잔을 줬고 최대우는 연신 윤수아의 말에 찬성하며 과자를 입에 넣기 바빴다.
오늘 화제의 중심은 강우였다.
“강연 언제 준비했어?”
“강연? 나도 몰랐는데?”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어떻게 알아?”
“원래 알던 거.”
강우의 저런 태도가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예전처럼 어젯밤에 책을 폈더니 우연히 그 내용을 봤다는 변명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으니까.
과자를 먹으면서 윤수아가 감상을 말했다.
“오늘 신입생들 표정 봤어?”
“그냥 박수 치는 건 봤는데. 표정까지는…….”
“신입생들 모두 정신이 나갔더라. 오늘 강연이 공식적인 첫 강연이었잖아? 그것도 수학 잘한다는 학생들만 모아 놓은.”
“그렇지.”
“그런데 대부분 눈을 못 떼더라고.”
윤수아의 소감을 손차희는 금방 이해했다. 이제는 강우의 강연을 많이 들었기에 다소 무덤덤해졌지만 처음 사이언스 페스타에서 들었던 강우의 강연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오늘 신입생들은 그때의 그녀와 비슷한 감동을 맛보았을 것이다.
“강우가 인기 스타가 되겠네?”
“신입생들도 이미 알고 들어왔을걸? 작년에 워낙 사고를 많이 쳐놓아서.”
강우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민망해졌다.
강우가 얼른 공부하자며 책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저녁 자습시간이고 세미나실을 방문할 사람이 없기에 일순간 침묵으로 문을 주시했다.
문이 열리고 박일현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3학년 선배라 고곽천재 모두가 일어나서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쩐 일이세요?”
“강우한테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마련해준 후 고곽천재는 탁자를 빙 둘러앉았다. 마치 접대용처럼 남은 과자를 박일현 앞에 놓았다.
“요즘 동아리 신입부원 모집이 한창이잖아?”
해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동아리에서 신입생을 모집한다.
“그런데요?”
“오늘 낮부터 신입생들이 강우 네가 가입한 동아리가 어디인지 묻더라고.”
금시초문이라 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전 천체관측반인데요?”
“그래서 천체관측반이 지금 난리도 아니야. 올해 거기는 신입 부원이 넘쳐서 골치 아파졌어. 강우 너 때문에.”
천체관측반은 창의적 체험활동 동아리라 받아들일 수 있는 회원 명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야 뭐…….”
정작 강우는 천체관측반에서 열심히 활동하진 않았다. 물론 과제연구를 천문 주제로 했고 최대우를 따라다니느라 보낸 시간이 절대 적지 않긴 하지만. 아무래도 올해는 조금 소원해질 예정이다.
“그거 말고 자율동아리 말이야.”
취미동아리인 자율동아리는 몇 개든 가입할 수 있다. 강우는 별도로 가입한 자율동아리가 없다. 수학연구반, 물리실험반은 체험활동 동아리여서 한 곳만 가입할 수 있고 회원 수도 정해져 있다. 반면 이론물리부, 이론수학부는 자율 동아리여서 여러 곳 가입이 가능하고 회원 수도 제한이 없다.
박일현은 수학연구반과 이론수학부 양쪽에서 모두 활동하고 있다.
“강우 네가 당연히 수학연구반 소속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가 아니라고 하자 실망하고 돌아간 학생이 한둘이 아니야. 이게 오늘부터 벌어진 현상이거든.”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 파이데이 강연에 감동한 신입생들이 강우를 찾기 시작했다는 거다.
정작 강우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박일현의 말을 듣고 보니 오늘 강연 여파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정작 박일현이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요?”
“하나 부탁 좀 하지. 넌 천체관측반이니까 수학연구반을 들어올 수 없지만 이론수학부는 가능하잖아? 이름만이라도 올려두면 어떨까? 특별회원.”
대충 그의 이름으로 부원을 많이 끌어모으겠다는 뜻이다.
“신입생을 속이는 거잖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가끔 와서 수학 강연해주고 학생들 문제 푸는 것 봐주고 그러면 되지. 너라면 별로 부담 없을걸? 지금까진 내가 했었는데 이젠 보다시피 3학년이라…… 어차피 너도 올해 국제 올림피아드에 나가려면 수학을 신경 써야 하잖아? 혼자 하지 말고 수학부원들이랑 같이 하는 게 더 편해.”
굳이 동아리에 가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손차희도 나섰다.
“강우가 들어오면 학생들이 아주 좋아할 거야. 그러잖아도 나한테 와서 너 끌고 오라던 애들도 많았고…….”
손차희는 수학연구반이다. 그래서 상황을 더 잘 안다.
“강우가 이론수학부에 들어가면 나도 들어갈래.”
윤수아가 거들었다.
나쁘지 않을 듯하여 강우는 순순히 수긍했다.
“알았어요. 내일 낮에 이론수학부에 가입할게요. 하지만 많이 기대하지 말라고 해주세요. 요즘 조금 바빠서요.”
“너 바쁜 거야 잘 알고 있지. 아무튼 고맙다.”
박일현이 미소로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올해는 동아리 활동을 대폭 줄이려 했는데 생각과 달라졌다.
지금까지 조용하던 최대우가 끼어들었다.
“강우야! 아무리 그래도 천체관측반은 계속해야 해. 밤에 천문대는 같이 가 줘야지.”
“당연하지. 밤에 기숙사를 나갈 수 있는데.”
생각해보니 예전에 최대우랑 새벽에 기숙사를 빠져나왔는데도 지금까지 어떤 경고도 받지 않았다. 일탈할 수 있는 출구를 스스로 막을 이유가 없다.
새벽에 보았던 하늘을 떠올리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힐링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