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화학 교수 (1)
동아리 신입회원 모집 풍경은 작년과 별 차이 없었다.
점심을 부리나케 먹고 강우는 A동 복도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별별 이상한 동아리들이 신입생을 모집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작년에 강우는 최대우에게 이끌려 천체관측반으로 직행했기에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었다. 지금 느긋한 마음으로 둘러보니 그때 보지 못했던 다양한 홍보 광경이 들어왔다.
“이야! 강우! 왔구나!”
지나가는 그를 잽싸게 낚아채는 녀석이 있었다. 권유성이다.
“넌 3학년이잖아? 3학년이 왜 여기에 나와 있어?”
일반적으로 3학년은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다. 임원직은 모두 2학년이 맡고 3학년은 신입생 환영회와 축제 때 잠시 나타나 후배를 격려해주는 역할이 전부다.
“나? 수능 칠 생각이 없으니까.”
권유성의 앞길을 그가 코치할 일은 없기에 대충 넘어갔다.
권유성에게 잡혀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천체관측반 테이블로 끌려갔다.
작년에는 분명히 파리만 날렸는데 박일현에게 들었던 대로 올해는 난리통이 따로 없었다.
“왜 이렇게 신입이 많아?”
“아직 신입 아니야. 가입 원서 받는 중이지.”
“올해도 시험 쳐?”
“경쟁률이 제법 높아서…… 떨어지는 애들이 많을걸?”
선배를 대표해서 신입의 가입을 독려하는 학생은 윤수아다. 강우는 고생하는 윤수아에게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표했다. 윤수아가 좋아하는 과자라도 사 와야겠다.
“강우야, 강우야아! 덕분에 대박이야!”
“내가 왜?”
“여기 입부 희망서를 보면…….”
- 강우 선배를 존경하여 천체관측반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동아리 가입 동기가 이게 뭐야? 괜히 낯이 간지러웠다.
그가 나타나자 신입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한꺼번에 인사했다.
“우와! 강우 선배다!”
“선배님! 어제 강연 정말 멋있었어요!”
“천체관측반 가입하면 선배 자주 볼 수 있죠?”
십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와서 강우를 둘러싸고 난리를 피웠다.
권유성이 재빨리 학생들을 정리하며 혀를 찼다.
“쳇! 난 국가대표 상비군인데 왜 아무도 몰라주는 거지?”
“유성이 너까지 유명하면 우리 동아리에 학생들이 너무 몰려와서 터져버릴걸?”
“킥킥, 그렇지?”
윤수아와 권유성이 잡담하며 학생들을 통제했다.
어쨌든 그가 나타나서 도움이 된 것 같아 강우는 이곳에 온 보람을 느꼈다.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이동하려고 몸을 트는 순간 코앞에 한 여학생이 등장했다.
“강우 선배님?”
안경을 낀 자그마한 여학생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강우는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입학식 날 장학금을 받던, 또 파이데이 때 놀라운 암기력을 발휘하던 여학생이었다.
‘유혜림이라고 했었나…….’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 잠재력이 보였다. 일전에 본 그대로였고 S가 없어 별달리 강우의 눈을 끌지 못했다. 손차희와 비슷한 유형의 학생이다.
모른 척할 수 없어 강우도 인사를 받았다.
“누구?”
“1학년 유혜림이예요.”
“아! 이번에 차석이라고…… 은찬이에게 들었어.”
그가 아는 척하자 유혜림의 입꼬리가 확 올라갔다.
“선배님을 따라 저도 천체관측반에 들려고요.”
유혜림은 물리나 지구과학보다 화학과 생물에 능한 학생이라 천체관측반과 맞지 않아 보이는데 가입하겠다니 오히려 강우가 놀랐다.
“굳이 나 때문에 가입할 필요는…….”
“천체관측반에 가입하면 선배님 강의를 들을 수 있대요.”
“누가?”
“김선호 쌤이…….”
김선호 선생님마저 그의 이름을 팔아먹을 줄 꿈에도 몰랐다.
나직이 한숨을 쉰 강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인데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저 모르는 문제 있으면 질문하러 찾아가도 되죠?”
“응? 질문은 선생님한테…….”
“기숙사 식당에서 시험 전날에도 질문받아 주신다던데…….”
신입생이 어떻게 그런 일까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차마 질문을 말릴 수 없어서 강우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대충 천체관측반을 얼쩡거리던 강우는 오늘 여기에 온 이유가 수학반 때문임을 상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유혜림이 졸졸 따라왔다.
조금 걸음을 빨리했더니 그녀의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속도를 늦췄더니 그녀도 보폭이 줄었다.
‘찰거머리를 만난 기분인데?’
어쨌든 신경 쓰지 않고 수학 동아리를 찾았다.
수학연구반은 이론수학부와 함께 입부 원서를 받고 있었다. 학교 행정 문제 때문에 두 개의 동아리로 나뉘어 있으나 거의 같은 동아리라고 볼 수 있었다. 과학고이니만큼 수학이 인기여서 테이블 앞은 신입생으로 북적였다.
“차희야!”
“강우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친한 손차희가 맞아주었기에 강우는 어색함이 사라졌다. 작년 고중전 때 함께 수학 퀴즈에서 뛰거나 응원했던 학생들이 그를 반겼다. 사실 그날 이후 강우는 이론수학부 소속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를 찾는 학생이 엄청 많아. 그래서 너도 회원이라고 홍보하는 중이야.”
차희랑 떠드는 사이에도 여러 학생이 다가와서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새삼 요즘에는 이런 뉴스가 빨리 퍼진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덕분이다.
비록 강우는 학교 홈페이지나 커뮤니티 게시판을 거의 방문하지 않지만 아마도 파이데이의 강연이 화제였음이 틀림없다.
그때 옆에서 어떤 학생이 강우에게 물었다.
“선배님도 이론수학부세요?”
“그, 그렇죠?”
이제는 특별회원이니까 어중간하게 대답했다.
물어본 학생이 잽싸게 이론수학부의 지원서를 받아갔다.
“어? 정말인가 보네? 그럼 나도…….”
뒤를 따라온 유혜림이 덩달아 지원서를 썼다.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어차피 강우가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라면 지금 곳곳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미래를 명확하게 설계했으니 인기인이 된다고 나쁠 일은 없다. 적어도 학생이나 선생님의 눈치 때문에 그의 앞날이 영향을 받을 시기는 지났다.
혼자서 피식 웃는 강우를 보고는 손차희가 물었다.
“이론수학부 가입하는 게 어색하진 않지?”
“그럴 일은 없지.”
“그렇다면 이론물리부에도 가입하는 게 어때?”
“이론물리부?”
“친구가 너 섭외해 달라고 하더라. 싫으면 말고.”
이론물리부와도 인연이 없지는 않다. 예전에 차도도의 주관으로 대입 과학논술 문제를 푸는 대결을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고중전에서는 물리 퀴즈에 나갈 뻔하기도 했고. 이론물리부 학생들과도 안면이 꽤 있다.
“그러지 뭐.”
예전과 달리 강우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제대로 활동하지 않으리란 점을 모두가 아니까. 그의 명성에 영향을 받아 더 많은 학생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주도적인 탐구학습을 해나간다면 좋은 일 아닌가.
강우는 손차희를 따라 이론물리부로 이동했다.
“나도 가입해야지.”
바로 뒤에 유혜림이 신이 나서 따라왔다.
무슨 심보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강우는 빙그레 미소로 응답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니 꿈이 피어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 * *
월말에 외부 초청 인사 강연회가 열렸다.
오늘 초청 인사는 한국대 화학과 노창열 교수. 미국 주립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한국대로 들어와서 이제 3년 차다. 정확히는 전임강사 1년, 조교수 2년 차인 나이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다.
차를 몰고 온 노창열은 고려 과학고 안까지 들어와서 주차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2시. 3시부터 강연이니 아직 1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고등학교라…… 젊어진 기분이야.”
그는 심호흡하면서 넓은 학교 운동장을 바라봤다. 인조잔디가 덮인 깔끔한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그를 초청한 사람을 떠올리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신새벽의 의뢰로 이 고등학교 강연을 수락했다.
“B동 교무실로 오라고 했었지?”
노창열은 신새벽에게 연락을 할지 아니면 자신이 교무실로 찾아갈지 고민했다.
대학원에서 교수와 대학원생은 갑을 관계가 명확하다. 교수가 골프 치러가면 대학원생은 연구실을 지켜야 한다. 교수의 집이 이사하면 대학원생은 이삿짐을 날라야 한다. 교수 자녀가 학원에 가면 대학원생은 차로 실어날라야 한다. 심하게 비유하면 대학원생인 신새벽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다.
물론 신새벽은 그가 지도하는 학생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수업을 들었고 그녀의 지도교수가 그에게 논문지도를 의뢰했다. 비록 행정상으로는 타과 학생이더라도 그는 신새벽의 운명을 손에 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논문지도를 하고 마지막에는 심사 위원이 될 사람이니 신새벽이 그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여자가 자존심마저 없으면 재미없지.”
아직은 콧대를 세우고 있는 신새벽일지라도 그 마지막 승자가 누구일지는 명확했다.
먼 훗날을 생각하자 그는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작년 초였던가.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 중에 유독 예쁜 학생이 있었다. 바로 신새벽이었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엄연히 자신은 미혼이다. 게다가 신새벽은 직장인 신분이며 파트로 대학원을 다닌다. 그렇기에 평범한 학생과 교수 관계와는 상황이 다르다.
어느 날 작심하고 신새벽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한 방에 거절당했다. 그 수모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감히 한국대 교수인 자신을 일개 고등학교 교사가 퇴짜놓다니. 뒤끝이 작렬한 그는 당연히 학점을 좋게 주지 않았다.
의외로 빠르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신새벽의 지도교수 의뢰로 그가 신새벽의 석사 논문에 비공식적인 도움을 주게 됐다. 화학교육과에 물리화학 논문을 지도할 마땅한 교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지. 신새벽은 더 이상 내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거야.”
신새벽만 좋다면 결혼할 생각도 있다. 계속 거절한다면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버리면 된다. 갑인 그가 아쉬울 건 없었다.
그래서 신새벽이 고려 과학고 강연을 의뢰했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친분을 쌓고 빚을 지워 놓으면 그 그물이 점점 더 촘촘해지는 법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고려 과학고 건물을 쓱 훑어본 그는 2학년 교무실이 있다는 B동을 찾았다.
커다란 돔이 세워진 건물 아래 B자가 보였다.
“3층이랬나?”
노창열은 발걸음 가볍게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안타깝게도 교무실에는 신새벽이 없었다.
“수업 들어가셨나요?”
“아뇨, 지금 상담실에 계실 거예요. 상담실은 복도 저쪽으로 가시면…….”
지나가던 어떤 선생님이 그에게 상담실 위치를 알려줬다.
신새벽을 떠올리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신새벽이 대학원을 졸업하려면 최소한 2년을 잡아야 하니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 꼼꼼히 조심해서 그물을 조여가면 된다. 나중에 그녀가 그물에 걸린 불쌍한 물고기임을 인식하게 하면 작전이 끝난다.
상담실에 가까이 갔을 때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소 핵자가 결합해서 중수소가 되면…….”
상담실 내부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용은 그가 전공한 물리화학이다. 그는 상담실 창으로 내부를 슬그머니 들여다봤다.
열심히 고개를 주억이며 몰두한 신새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학생처럼 보이는 어떤 녀석이 화이트 보드에 복잡한 수식을 쓰면서 열강하고 있었다.
미간이 모인 노창열의 이마에 주름이 콱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