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화학 교수 (2)
처음에는 신새벽이 수업 중인 줄 알았다.
문제 학생이나 학습이 처지는 학생을 상담실에 불러놓고 별도로 가르치는 일은 드물지 않으니까. 학생의 이해도를 확인하려고 가르친 내용을 학생에게 설명해보라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용이 지나치게 어려웠다. 이건 고등학교에서 다룰 내용이 아니었다.
“전자가 떨어져 나간 플라스마 상태의 핵자 움직임은 아래의 식을 만족하므로…….”
낭랑한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창열의 눈길이 저절로 화이트보드를 향했다.
순간 그는 수학과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놀랍게도 남학생이 설명하는 내용은 신새벽이 얼마 전에 제안했던 논문 내용이었다. 파트로 학교에 다니면서 다룰 수준이 아니었기에 신새벽의 앞날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그에게 더 의존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에 허락했던 기억이 났다.
“저 녀석은 대체 누구지?”
고등학생처럼 보이지만 설명이 고등학생 수준이 아니다. 대학생, 아니 대학교 교수라 해도 의심하지 않을 수준이다. 반대로 신새벽은 마치 수강하는 학생처럼 노트에 필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국내에서 저 내용을 저렇게 깊이 다루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자 노창열은 상담실 문을 노크했다.
똑- 똑-
남학생이 설명을 멈췄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노창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교수님!”
신새벽이 벌떡 일어났다.
노창열은 어색한 표정으로 상담실 내부를 둘러봤다. 특별할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일찍 오셨네요? 전화하시지…….”
“지금 뭐 하는 거죠?”
“아! 제 논문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쉽지 않네요.”
교묘하게 대답을 피해 가는 신새벽의 화법에 노창열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 남학생이 대체 누구인지 묻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계속하게.”
노창열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는데 그 남학생이 마카를 놓고는 신새벽에게 꾸벅 인사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강우야, 잘 가. 강연회 들으러 와라.”
“그럴게요.”
남학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창열이 멍한 표정으로 남학생을 쳐다보고 있자니 신새벽이 미소를 지으며 밖을 가리켰다.
“일단 교장 선생님부터 만나보시고…… 다음에 학교를 안내해 드릴게요.”
노창열은 찜찜한 마음으로 상담실을 떠났다.
* * *
강당 청중석에 앉아 강우는 강연회 시작을 기다렸다.
방금 상담실로 찾아온 사람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신새벽의 논문을 지도한다던 화학과 교수일 것이다.
일전에 들었던 차도도와 신새벽의 대화를 떠올렸다. 신새벽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차인 이후로 권력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갑질을 일삼고 있다나.
오늘 이곳에 온 그 교수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신새벽에게 잘 보이면서 그녀를 예속화하려는 마음이 가득하겠지.
“질이 안 좋은 놈이군.”
“누가? 누가 괴롭혀?”
옆에 앉아있던 최대우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니. 그런 녀석 있어.”
“나쁜 놈 있으면 혼쭐을 내야지.”
최대우가 웃으며 주먹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역시 이 나이 때의 고등학생은 정의감에 불타서 사고방식이 단순하다.
괜히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강우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한참 주시했다.
차도도가 반지를 왜 끼느냐고 연신 타박을 주곤 하지만 선생님이 준 선물을 무시할 수 없다며 반지를 빼지는 않았다. 다행히 며칠 나무라던 차도도도 이제는 모른 척했다.
다만 최근에는 윤수아가 이 반지에 관심을 가졌다. 무슨 반지냐? 어디에서 샀느냐? 커플링처럼 보인다. 등등의 반응이었다.
강우는 부모님이 보내신 거라며 적당히 무마했다. 신새벽과 같은 반지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 문제는 없다. 설사 알더라도 상관없나? 신새벽과 커플링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테니.
어쨌든 이대로 두면 신새벽은 학위 때문에 더 수렁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어려운 논문 주제를 잡아준 죄로 그가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직 신새벽이 졸업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오늘은 그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조용히 지켜볼 생각이다.
시간이 되자 단상에 신새벽이 올라왔다.
“올해 첫 외부 강연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국대 화학과 노창열 교수님을 모시고 물리화학이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은 강연이 끝난 후에 해주시고 강연 중에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자제하기 바랍니다. 그럼 담당 교수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방금 상담실 앞에서 보았던 남자가 단상에 올라왔다.
“노창열이라…….”
사람을 외모로 평가할 수 없지만 노창열은 도무지 여자들이 호감을 느낄 인물이 아니었다. 키가 작고 얼굴이 얍삽하게 생긴데다 나이 든 인상이었다. 40대라고 해도 믿을 판이다.
지금 옆에 나란히 선 신새벽과 비교해보면 도무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남자는 재력이나 능력이 먼저라지만.
상대에게서 강우가 알 수 없는 우월감을 느끼는 사이 단상에서 노창열이 강연을 시작했다.
“한국대 교수 노창열입니다. 물리화학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얼핏 물리인지 화학인지 혼란스럽죠? 물리와 화학의 중간 성격이지만 엄연히 화학의 한 분야죠. 오늘은 이 물리화학에서 무엇을 다루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강연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화려한 강연은 아니나 대학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교재만 읽는 그런 지루한 스타일도 아니다. 그럭저럭 강연을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청중의 반응을 살펴보니 입학 후 첫 강연인 신입생의 집중도가 대단했다. 반면 2학년의 절반은 강연을 듣고 절반은 졸고 있다.
“어? 오늘은 안 자네?”
평소 강연 시간에 자주 졸았던 강우가 오늘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자 최대우가 놀리듯 물었다.
“나랑 조금 관련이 있잖아?”
“아!”
평소 그가 신새벽과 수소 원자를 연구하는 장면을 자주 보았던 최대우가 곧바로 납득했다. 지금 노창열이 수소 원자의 전자구름 모형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강연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강연 내용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흥미를 잃은 학생들의 딴짓도 속출했다. 청중의 수준을 오판한 강연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 이상할 것도 없었다.
대략 한 시간에 걸쳤던 강연이 끝이 났다.
신새벽이 앞으로 나와 강연을 마무리했다.
“질문 있나요? 꼭 오늘 강연 내용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방법이라든가 아니면 한국대 관련 내용이라든가…….”
질문하는 학생은 없었다. 잠시 싸늘한 시간이 지나갔다.
신새벽이 강연 마감을 외치려 할 때 노창열이 마이크를 요구했다.
“질문이 없으니 제가 반대로 질문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도발에 학생들이 뜨악 놀라는 사이 노창열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청중을 쭉 훑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갑자기 강우는 노창열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실에서 얼핏 봤어도 입은 옷이 바뀌지 않았으니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찾을 수 있다.
“흠, 그렇게 궁금했나?”
그 궁금증이 상담실에서의 어려운 강의 때문인지 아니면 신새벽 옆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인지 의문이다.
역시 두리번거리던 노창열의 시선이 강우와 만났다.
빙그레 미소를 띠며 노창열이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흠, 거기! 거기 파란색 옷 입은 학생? 아니, 거기 말고 그 뒤에!”
최대우가 깜짝 놀라 강우를 흔들었다.
“강우야? 널 부르는데?”
젠장.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저요?”
강우는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학생들의 시선이 강우에게 몰렸다. 강우를 아는 학생들은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어떤 학생은 작년 이맘때의 요셉 교수 강연에서 등장했던 강우의 활약상을 떠올렸다.
“그래, 학생! 이름이?”
“강우입니다. 2학년이고요.”
“그래, 강우 군. 오늘 강연 어땠나?”
“흥미로웠습니다. 설명을 잘하시더군요.”
강우는 예의상 칭찬해줬다.
하지만 그의 예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잘 들었다니까 내가 질문 하나 하지. 내가 말미에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 수소 원자의 거동을 설명했었네. 하나의 입자가 돌아다니는 거대한 계를 가정하고 그 입자나 파동이 가지는 운동량, 에너지, 각운동량을 포함하는 함수를 생각할 수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현실에서는 입자는 하나가 아니지 않나? 그 경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강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창열의 강연을 이해한다고 해서 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고등학생에게 질문할 수준도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강우를 물 먹이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질문이다.
‘거참, 잠시 상담실에서 봤다고 이런 질문이라니!’
학생들 대부분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질문부터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
그들은 강우가 대답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비록 강우가 수학과 물리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화학에서는 아니었다. 게다가 강우가 많이 알아봐야 한국대 교수에 비할까. 그렇기에 노창열의 공격을 받은 강우를 불쌍하게 여겼다.
강우는 적이 강하면 더 즐거워진다. 노창열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게 훤히 보였다.
저 아래에서 퍼지는 희열을 억누르면서 강우는 작전을 구상했다.
공격이 들어오면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방어에서 그칠 수는 없다. 공격하는 상대를 제압하지 않으면 공격을 끝없이 반복할 테니까. 일단 잽부터 날려볼까.
빙그레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강우는 대답했다.
“원자의 파동함수는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이 파동함수는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편미분 연산 형태로 표현되죠. 양자역학에서는 고전역학처럼 절대적인 값으로 계산하지 않고 확률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수소 원자 파동함수는 어떻게 풀 수 있지?”
또 선을 넘었다. 걸려들었다. 강우는 웃으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가장 단순한 방식이라면…… 구면 좌표계로 표현된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을 반지름 알과 세타, 파이 항으로 변수 분리한 다음 세타 항에 대해 해를 구합니다. 르장드르 미분 방정식인 이 방정식의 해는 폴리노미얼 형태로 표현하죠. 이를 이용해서 반지름에 대한 해와 에너지를 구하면 파동방정식 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식은 주양자수, 각운동량 양자수, 자기양자수의 함수로…….”
강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뜻하지 않은 대답에 노창열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강우는 한발 나아가 반격의 태세를 취했다. 마지막 카운터 펀치다.
“그런데 교수님, 슈뢰딩거 방정식은 헬륨 원자부터는 해석적인 해를 구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죠. 이를 해결하려고 과학자들은 변분법이나 섭동 이론 등을 도입하죠? 그렇다면 반도체 결정의 파동함수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노창열이 넘은 선을 강우는 두 배로 넘었다.
이제 이 질문은 양자물리학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양자화학을 다루는 노창열이 다룰 내용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고등학생인 강우와 이런 심화 이론을 놓고 다투면 대학교수인 노창열의 체면만 깎인다.
속으로 이를 갈면서 난감해진 노창열이 발을 뺐다.
“다른 학생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이쯤에서 마무리합시다.”
겉으로는 무난하게 끝맺었으나 학생들은 강우의 반격을 성공으로 판정했다.
강우의 승전보가 추가되었다.
신새벽이 강연의 끝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