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66화 (166/325)

제166화 화학 교수 (3)

강당을 벗어나고 있을 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 선배!”

뒤를 돌아보니 하은찬과 유혜림이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겠지만, 지금은 노창열 교수와 신새벽의 갑을 관계를 고민하느라 이 둘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대학원 생활을 했던 그는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신새벽의 위험을 간과할 수 없었다.

적이 뜬금없이 공격해와서 반격한다는 것이 너무 심하게 받아쳤다.

“강우 선배! 역시 대단하세요!”

유혜림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강연에서의 활약을 칭찬했다.

“뭘 그걸 가지고. 질문해야 강사도 기분이 좋아. 질문이 전혀 없으면 강사도 제대로 전달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약간은 샛길로 빠진 소감이었어도 두 학생은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선배님, 근데요! 오늘 질문한 거 엄청 어렵던데…… 그런 건 어떻게 아세요?”

“음, 관심 있으면…….”

유혜림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하은찬이 끼어들었다.

“강우 형은 겨울부터 그 분야를 열심히 공부했어. 동네 누나, 아, 아니 신새벽 쌤이랑. 어떨 때는 신새벽 쌤을 가르치더라.”

유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 내가 강우 형 따라 차도도 쌤 댁에 갔다가 신새벽 쌤도 만났는데…… 강우 형이랑 차도도 쌤, 신새벽 쌤 셋이서 엄청 어려운 걸 토론하면서 공부하더라고. 근데 그 두 누나…… 아니 선생님이 엄청 예뻐서 강우 형이 공부를…….”

하은찬이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대충 알아들은 유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역시 그렇게 하니까 다르구나. 아! 부럽다. 난 언제 쌤들이랑 맞먹는 수준까지 갈까.”

“그래서 내가 생각해보니까…… 과제연구 쌤을 잘 만나야 해. 난 차도도 쌤이나 신새벽 쌤이랑 할 거야.”

“나도 그래야겠어. 강우 선배! 선배도 1학년 때 그 두 선생님이랑 같이 했죠?”

강우는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두 학생을 향해 씽긋 미소를 지었다.

“나? 김선호 쌤이랑 했는데? 2학기부터는 차도도 쌤이랑.”

“윽! 김선호 쌤…….”

이 두 녀석은 천문이랑은 거리가 있나 보다. 유혜림은 기껏 천체관측반까지 따라와서 가입하더니.

“올해 R&E는 누구랑 하세요?”

“차도도 쌤.”

“우와! 그럼 나도 차도도 쌤이랑 해야겠어요.”

강우는 하은찬과 유혜림의 재능을 다시 확인했다. 둘은 물리보다 화학이 더 낫다.

“너희는 신새벽 쌤이랑 해.”

“그럼 선배랑 자주 보기 어렵잖아요?”

이 녀석들은 과제연구를 지도교사가 아닌 선배를 만나는 시간으로 착각하는 건가? 강우는 후배들의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열심히 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신새벽 쌤이랑 과제연구를 해도 나랑 만날 수 있어. 내가 신 쌤이랑 주기적으로 함께 연구하는 게 있으니까.”

“우와! 그럴게요. 저도 물리보단 화학이 편하거든요.”

유혜림이 바로 수긍했다.

어차피 하은찬은 고곽천재 세미나실에 자주 오기에 유혜림만큼 절실하지 않았으나 그도 화학이 더 편했기에 유혜림과 같이 과제연구를 하기로 했다.

강우는 신입생 수석과 차석인 두 학생의 모습에서 이민찬과 손차희를 연상했다. 그 둘도 하은찬, 유혜림과 매우 비슷했다. 다만 둘 사이를 따지면 이 두 사람이 더 서로에게 협조적이긴 하다.

구상을 끝낸 유혜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쌤! 과제연구 신청할 때 선배 이름 팔아도 되죠?”

“내 이름을 왜 팔아?”

“과제연구 신청했다가 떨어질 수도 있다던데요?”

이 두 녀석은 미래가 창창한 녀석들이니 신새벽이 떨어트릴 일은 없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팔 필요가 전혀 없지만 이럴 때 생색 안 내면 언제 낼까.

“알았어. 그렇게 해. 내가 신 쌤에게 너희 둘 받으라고 적극적으로 부탁드릴게.”

“이야! 강우 선배 최고!”

후배들과 툭탁거리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같은 학년 동료와 달리 능력 있는 후배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 *

“쌤, 혹시 오늘 혼나지 않으셨어요?”

저녁 자습시간에 상담실을 찾은 강우는 신새벽에게 강연 후 노창열의 동정을 물었다. 노창열의 기분이 별로였을 테니 신새벽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별말씀은 없었어. 그냥 너 누구냐고, 이름 묻고…… 공부 잘하냐고, R&E를 누구랑 하냐고 그런 것만 묻던데?”

별일 없었다는 듯 주절대는 신새벽을 보니 문제가 될 일은 없었나 보다. 다행이다.

“논문 관련해서는 묻지 않던가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상담실에서 신새벽과 열심히 논문을 떠들고 있을 때 들어왔었으니 노창열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별말 없었다면 아직 상대의 작전이 수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긴 오늘 그를 처음 접했고 강연에서는 탐색만 했으니 당장 신새벽을 다그치기엔 부담스러웠을 테지.

“다행이네요.”

“강우야! 너 오늘 정말 멋있더라! 네가 강당에서 질문하면서 교수님을 들이받았을 때…… 내 속이 다 후련하더라.”

“에이, 아무리 쌤이 내 편이라지만 교수님과 그렇게 담을 쌓으시면 안 되죠.”

“아냐, 나 그 교수 엄청 싫어하거든? 안 엮였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이 자꾸 엮이는 거야.”

노창열이 신새벽에게 두 번이나 데이트를 신청했다던가? 신새벽이 싫어할 만하다. 정확히 왜 싫어하는지 모르지만 원래 남녀 사이란 반드시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싫어하지 않았다면 교수와 제자라는 갑을 관계 때문에라도 적당히 데이트를 수락했겠지.

완곡하게 퇴짜를 놓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찝쩍거리는 그 교수도 인간성이 별로이긴 하다만.

“어쨌든 난 강우만 믿고 그 교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설마 나 졸업 못 하게 방해야 하겠어?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긴 한데 교수의 자존심을 잘못 건드리면 끝이 좋지 않다. 적당히 몸을 사리는 전략도 필요한 법이다.

일단 오늘은 노창열과 신새벽이 아무 사이도 아니고 신새벽이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했다.

노창열을 엿 먹인 것과는 별개로 신새벽의 신뢰를 확인했으니 성과가 작진 않다.

신새벽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강우의 손과 나란히 두었다.

“이야! 예쁘다! 우리 커플링 보면 볼수록 어울린단 말이야.”

사실 별생각 없이 커플링을 받긴 했다. 순금이니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비슷한 또래가 아니어서 오히려 커플링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반지를 끼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유대감이 깊어진다. 그날 이후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신새벽과 농담 따먹기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가끔은 선생과 학생에서 교수와 대학원생이나 연구 동료가 되기도 한다.

나란히 앉아서 커플링을 비교하고 있자니 차도도가 상담실로 들어왔다.

“으구, 잘하는 짓이다.”

“쌤! 오셨어요?”

“강우! 커플링 팔아버리라니까.”

“어? 내가 준 반지를 왜 팔아?”

“금값 또 올랐거든!”

차도도와 신새벽이 서로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이 선생님들이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워서 강우는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이, 얼른 앉으세요.”

마지못해 미적대며 앉은 차도도가 그에게 일거리를 늘어놓았다.

“강우야, 한태규 교수님에게서 연락 왔어. 다음 달 학회지에 논문 실린다고.”

기다리던 소식이다. 드디어 출발이다. 그 논문으로 강우와 차도도의 이름이 물리학 관계자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뉴클리어 퓨전 학술지에서 심사 위원들의 질문서가 날아왔어.”

요셉 교수가 강우가 보낸 논문을 뉴클리어 퓨전에 제출했나 보다. 뉴클리어 퓨전은 핵융합 관련 유명한 학술지다. 이제 심사 위원들의 질문과 요구 사항에 적절한 답변을 보내고 이 답이 통과되면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다. 얼마나 빨리 답하느냐에 따라 논문 게재일도 빨라진다.

당연히 강우는 만반의 준비를 이미 해두었다.

“얼른 답안을 작성해서 보내죠.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그 논문이 정상적으로 실리면 우리의 존재감을 드디어 세계에 알리는 겁니다.”

“그래, 사실 별다른 질문도 없어서 내 수준에서도 금방 해결할 수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는 차도도 스스로 해낼 만큼 그녀도 물이 올랐다는 뜻이니까. 앞으로 그가 할 일이 대폭 덜어질 가능성이 생겼다.

“그 논문을 빨리 마무리하고 추가 논문을 쓰죠. 이번에는 더 유명한 학술지에 게재해볼게요.”

강우가 서두르는 이유는 헌팅턴과의 프로젝트 때문이다. 논문 하나로 헌팅턴의 시선을 사로잡기는 어렵다. 마도환에게 선수를 빼앗긴 상태에서 계속 뒤처져서는 곤란하다.

“알았어.”

하나씩 성과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앞길이 구만리이고 할 일이 쌓여 있다.

다행스럽게도 차도도는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의욕이 충만했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여름방학 때쯤이면 두 번째 논문의 구체적인 실체가 손에 잡힐 것이다.

두 사람이 의욕적으로 계획을 짜고 있자니 신새벽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아! 난 언제 논문을 쓸까?”

“신 쌤은 올해 내로 국내 학술지 게재실적을 올리셔야 해요. 그래야 내년 1학기 때는 편하게 졸업논문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너만 믿어.”

신새벽이 웃으며 용기를 냈다.

세 사람은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쳤다.

* * *

국내 수학 올림피아드(KMO) 시험 일자가 공고됐다.

작년에 1차 시험을 노렸던 강우는 이번에는 최종시험을 치른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발탁된다. 지난 겨울학교에서 그럭저럭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손차희와 권유성도 같은 시험이다. 지난 겨울학교에서 만났던 하은찬도 마찬가지. 이미 메달리스트인 박일현도 최종시험을 쳐야 한다. 이 시험은 면제되는 학생이 없다.

“이제 같은 출발선에 섰어.”

작년 이맘때는 권유성과 꽤 격차가 있었는데 지금은 같은 위치에 섰다. 심지어 박일현과도.

강우는 최종시험 원서를 제출했다.

할 일을 마무리한 강우의 시선이 건너편 침대의 최대우를 향했다.

최대우도 원서를 내고 있다. 바로 물리 올림피아드 최종시험. 수학 올림피아드와 약간 다른 체계를 거쳐 같은 최종 도착지에 도착한다. 물리 국가대표를 뽑아 여름에 열리는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 국가대표를 선발한다.

강우는 최대우의 실력이라면 무난히 선발되라고 예상했다. 물리 문제풀이 센터에서 갈고닦은 실력이 어디 가지 않으니까.

“냈어?”

“냈지. 강우 넌?”

“나도.”

“강우야, 올해 국제 올림피아드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알아?”

수학이나 물리 올림피아드는 세계 유명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개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개최했던 적이 있다.

“몰라.”

관심이 없어서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다.

“올해는 수학과 물리가 같은 장소에서 열려. 날짜는 조금 다르지만.”

“어딘데?”

“미국 MIT.”

MIT라 하자 요셉 교수가 떠올랐다. MIT는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공과대학이다. 인근에 하버드대학교와 보스턴 칼리지가 있어 유명한 교육 관광지이기도 하다.

“아! 그럼 MIT에서 우리 둘이 만나겠네?”

“당연하지!”

최대우는 두 사람의 합격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을 드러냈다.

강우는 MIT 교정을 거니는 자신과 최대우를 그려봤다. MIT 학생은 아니더라도 그곳으로 진학을 꿈꾸는 두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다. 올해의 목표로서 딱 좋다.

그런데 하나가 아쉽다. 다른 사람이 추가로 필요하다.

올해 MIT를 같이 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대표 가능성이 있는 손차희가 떠오른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더 떠올랐을 때 강우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