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67화 (167/325)

제167화 화학 교수 (4)

어느새 그가 그린 미래의 장면에는 최대우가 지워지고 다른 인물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차도도!

차도도를 MIT로 데려갈 수 없을까?

그나 최대우는 올림피아드 국가대표 자격을 따면 올해 여름에 MIT에 갈 수 있지만 차도도는 개인 관광이 아니라면 방법이 없다.

“해결책은 있어.”

하지만 꼭 데려가고 싶다. 올해 여름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유학 갈 때도 꼭 데려가고 싶다. 이번 여름은 그 전초전일 뿐.

얼핏 차도도는 집안의 반대로 유학의 꿈을 접었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녀를 곁에 선 연구 동반자로 끌어들이려면 그녀도 석사든 박사든 진학의 길을 열어야 한다.

일전에 한태규 교수가 차도도에게 석사과정을 제안했었으니까 국내에서 학위 과정을 밟으려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강우가 볼 때 차도도에게는 그 이상의 능력이 있었다.

아마 그 능력은 그의 곁에서 더 찬란한 꽃을 피울 것이다.

강우의 상념은 2년 후의 먼 시점에서 다시 올해 여름으로 되돌아왔다.

올해 MIT 교정을 밟게 하면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그녀가 아닌 그녀의 집안이라지만.

“요셉 교수와 만난다면…….”

단순히 요셉 교수와의 연구 관련 미팅을 잡고 출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더 큰 이벤트가 필요하다.

“헌팅턴 프로젝트…….”

프로젝트 체결을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한다면? MIT는 보스턴 부근에 있고 보스턴과 워싱턴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보면 그리 멀지 않다.

빨리 프로젝트를 성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렇게 강우는 올해 여름 목표를 최대우, 차도도와 함께 MIT 교정을 거니는 것으로 결정했다.

덜컥-

문이 벌컥 열리면서 상념에 잡힌 강우를 화들짝 깨웠다.

“형!”

하은찬이다. 이 자식은 잠도 안 자나?

시계를 보니 밤 12시를 조금 넘었다.

“야! 이 녀석아! 밤에 기숙사 돌아다니면 벌점 먹는 거 몰라?”

“이 시간에 사감이 와요?”

“가끔 온다. 너 같은 녀석 때문에.”

규정에 따르면 밤 11시에 야간 점호를 마치고 나면 사생은 이동금지다. 자정이 넘어가면 소등해야 한다. 물론 잘 지켜지지 않기에 학교 측에서도 탄력적으로 규정을 적용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난 자야 하니까…….”

“에이, 형! 아직 안 자는 거 다 알아. 문제 하나만 풀어주고 자면 안 돼요? 우리 엄마가 모르는 거는 그날 해결해야지, 안 하면…….”

이 녀석은 말이 많은 게 문제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

하은찬이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고 문제지를 툭 내밀었다. 복잡한 수학 문제였다.

“이거 뭔데?”

“그때 그…… 고곽 전설 선배가 한다던 팀 과외 교재.”

“너 아직도 거기 다녀?”

“학기 시작하면서 끊었어요.”

“그런데?”

“친구한테 교재만 넘겨받았지. 히히,”

올림피아드용 문제를 구하기 쉽지 않기에 교재를 구해서 직접 풀어보는 방식은 훌륭하다. 다만 그 질문이 하필이면 이 밤에 그에게 날아오는지.

“질문은 쌤한테 해야지. 내일 정명욱 선생님에게 물어봐.”

“이미 했거든요?”

“근데?”

“혼났죠.”

“왜?”

“중간고사 앞두고 엉뚱한 공부한다고…….”

중간고사가 불과 일주일 남았다. 그런데도 내신 공부를 하지 않고 올림피아드 경시를 공부하고 있으니 혼날 만하다.

“내 말도 그 말이야. 이건 잠시 중단하고 교과서 공부해.”

“형? 형도 알잖아? 풀다가 남겨두면 찝찝해서 다른 건 못하는 거. 이 문제 때문에 난 온종일 아무것도 못 했거든. 우리 엄마가 그날 일은 그날…….”

호기심 하나에 집착하는 것은 천재들의 특성이다. 하은찬도 다르지 않다. 특히 이 녀석은 수학이 S급이니 수학 문제라면 더욱 심하겠지.

녀석의 눈동자를 보니 아득한 갈망이 보인다. 이 수학 문제를 꼭 풀고 싶다는 의지에 진리를 향한 욕망이 결합해 있다.

이 녀석이 팀 과외를 하지 않도록 유도한 사람이 그이기에 강우는 일말의 책임을 느꼈다.

“알았다. 딱 5분만 가르쳐줄 테니까 금방 듣고 돌아가.”

강우는 녀석의 교재를 넘겨받고 문제를 살폈다. 제법 난도가 있다.

“피! 아무리 형이라도 5분 만에는 어렵지. 난 온종일 고민했는데…….”

핀잔을 주던 하은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쓱- 쓱-

강우가 설명과 함께 답을 쓰기 시작했다.

“어? 형? 이거 미리 풀어봤던 문제야?”

“내가 너냐? 경시 문제 풀어보게?”

“그, 그런데 어떻게…….”

하은찬은 지난 강연회에서 강연 교수와 질의응답으로 다투던 강우를 본 이후로 강우의 실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강우의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처음 접한 이 어려운 문제를 보자마자 바로 풀기 시작하다니! 그가 온종일 고민해도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던 문제를!

‘이 형은 나와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천재구나…….’

하은찬은 자신이 천재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급의 천재를 본 적은 있지만 능가하는 천재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강우의 행동은 그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귀신이다…… 수학 귀신!’

강우의 손끝에 그려지는 수식을 따라가던 하은찬의 시선이 어느새 강우의 얼굴로 옮겨졌다. 잘생긴, 능력 넘치는 형이었다.

하은찬은 강우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뿌듯했다. 강우만 따라가면 그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었다.

하은찬이 이 문제를 이해하기까지 그때부터 대략 한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강우는 잠을 설쳐야 했다.

* * *

바람이 불자 꽃잎이 휘날렸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연둣빛이 점차 짙은 녹색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분홍색 벚꽃이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고려 과학고 교정에도 분홍빛이 넘쳤다. A동과 C동을 지나는 길목이 벚꽃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가끔 비처럼 떨어지는 분홍빛 꽃잎은 이곳이 학교가 아닌 유명한 벚꽃놀이 길로 착각하게 했다.

“아! 예쁘다!”

차도도는 환한 미소로 벚꽃을 만끽했다.

강우도 주위를 둘러보며 화사한 봄기운을 가슴에 품었다.

지금 두 사람은 나란히 교정을 걸으며 방금 먹은 점심을 소화하고 있었다.

얼핏 오해를 살 수도 있는 행동이었으나 이런 일이 자주 있었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이 R&E와 카이스트 프로젝트로 묶여 있고 상담실에서 둘만의 회의와 연구를 자주 하곤 했기에 이제는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게다가 담임이 자기 반 학생과 상담하는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꼭 이상할 일도 아니었으니.

“작년에는 학교가 이렇게 예쁜 줄도 몰랐어요.”

작년 이맘때,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에 강우는 정신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데다 공부에도 익숙하지 않았고 친구들과도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계획을 세우지 못한 그의 앞날도 오리무중이었기에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때보다 한층 편해진 올해는 학교 교정이 철마다 색을 바꾸는 풍경이 눈에 보였다. 그만큼 삶의 여유가 생겼다.

“우리 학교는 조경을 잘해두는 편이어서…… 이맘 때가 유독 예쁘지.”

“정말 그래요. 저도 시험에 열중하고 있었다면 이 장관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예요.”

“이번 중간고사도…… 대충 치를 생각인가 보구나?”

“저에겐 내신 성적보다 논문이 더 중요하거든요.”

강우의 계획을 이해한 차도도는 과거처럼 내신을 닦달하지 않았다. 이제는 강우의 처신을 이해했다. 아무리 강우라지만 양쪽 모두 최고일 수는 없다.

“그래도 적당히는 안 돼. 하는 이상 최선을 다해야지.”

“알아요. 수학과 물리는 잘 치를게요.”

차도도는 이 정도 결심을 받아낸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수학이나 물리마저 답지에 예술작품을 그리면 여러모로 골치 아프니까.

머리 위로 드리운 벚꽃 터널을 지나면서 차도도가 화제를 돌렸다.

“뉴클리어 퓨전에서 답신이 날아왔어. 논문 게재 확정이라고. 아마 다음 달이 되지 않을까.”

“잘됐네요. 조만간 다른 곳에 또 논문 하나를 넣어야 해요.”

이 논문은 상온핵융합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물론 핵심은 빠져있다. 플라스마의 거동을 수학적으로 해석하고 핵융합 반응을 더 쉽게 끌어내기 위해 어떤 시도가 필요한지 제시한 논문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준 초안을 읽어봤는데…… 이전 논문이 현재의 연구 동향을 종합한 논문에 가깝다면 이번 논문은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는 독자적인 논문이야. 내 생각에 이번 논문이 출간되면 학계에서 큰 반응을 불러올 거야.”

“그렇죠. 그걸 노리는 거니까요.”

“이미…… 최종 연구 결과를 거의 준비해 놓은 거지?”

“네. 연구하면서 하나씩 정리해서 논문으로 내야죠.”

“정말 논문 실적 때문에 하는 거야?”

차도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확인했다.

강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요. 연구 프로젝트 때문이죠. 앞으로 국제적으로 프로젝트를 따내야죠.”

“금액도?”

“첫 프로젝트는 그리 크지 않을 거예요. 그쪽에서 우리를 믿지 못할 테니까. 아무리 요셉 교수를 끼운다고 해도 우리는 한국의 일개 고등학교잖아요? 실적도 없고. 첫 프로젝트는 작지만 두 번째 프로젝트는 엄청 클 거예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

차도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강우는 그녀의 염려를 이해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연구 프로젝트는 수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초개념 연구에서 시작해서 탐색개발, 실용개발 등 십 년 이상 걸리는 과제가 수두룩하다.

그녀와 강우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2년이다. 그런데 지금 강우의 계획은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니 뜬구름처럼 들릴 것이다.

“프로젝트 결정까지는 금방 될 거예요. 늦어도 올해면 충분하죠.”

“그럼 그 이후는?”

“연구자의 길은 끝이 없으니까…… 선생님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선생님께서 10년 뒤에 어디에 있건 선생님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을 거니까요.”

강우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차도도를 바라봤다.

벚꽃의 붉은 그림자가 차도도의 얼굴에 드리워져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그 모습에 매혹된 강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오늘따라 봄꽃에 어울린 그녀의 미모가 강렬했다.

무슨 뜻인지 그녀가 이해했을까. 두 사람의 인연이 여기 고려 과학고에 한정되지 않고 앞으로도 이어지리란 뜻인데…….

그가 궁극적으로 추진하는 과제는 인류를 에너지의 난에서 해방하는 프로젝트다. 상온핵융합 연구에 다시 뛰어들면서 손강우에서 강우로 빙의한 하늘의 뜻이 이 과제의 완성이라고 여기게 됐다.

어떤 천재라도 일이 년 사이에 인류의 숙원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도 먼 미래를 보고 있다. 그 연구자의 길 끝에는…… 적어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 있을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바로 그와 차도도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그 길을 함께하기를 바라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들을 끌어주고 옆에 자리를 비워둘 순 있어도 그 이후부터는 자신이 아닌 그들의 의지이자 몫이니까.

“알았어. 네 뜻이 그렇다면 다음 논문도 빨리 완성하도록 해. 하지만 중간고사를 너무 무시하지 마. 김윤택 선생님이 벼르고 있으니까.”

“주임 쌤이요?”

“그래, 네가 프로젝트를 두 개나 한다고 말이 많으셔. 학업에 소홀히 한다고.”

김윤택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행동이다. 이번 과제연구에서 물 먹었으니까. 그는 신입생 중에서 우수학생을 과제연구로 낚아채지 못했다. 그 원인이 강우에게 있음을 김윤택도 짐작하겠지.

차도도는 강우에게 미소를 날리고는 홀로 교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봄바람에 벚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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