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라그랑주 포인트 (2)
물리학회지에 실린 강우의 고속전철 논문은 평소라면 상당한 이슈가 되었을 사안이지만 이번에는 전혀 화제가 되지 못했다.
김윤택의 견제로 학교 측에서 대외적인 발표를 자제했고 분위기를 의식한 차도도도 무리해서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나쁘지 않아 강우도 묵인했다.
여기에 중간고사 기간이 겹쳐 학생들 또한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동아리와 과제연구 집중기간이 시작됐다.
천체관측반에서 강우는 김선호의 과제연구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작년에 우리는 사이언스 페스타에 출품해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천체관측반에서만 두 작품이 우수 작품에 선정되었고…….”
김선호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면서 강우는 작년 페스타를 떠올렸다. 얼떨결에 권유성과 대결하느라 페스타에 출품했고 그 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페스타의 강연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올해 3학년인 권유성이 동아리에서 보이지 않으니 어딘지 맥이 빠진 느낌이다. 기분 탓인가? 윤수아도 작년보다 심심해한다.
작년에는 이맘때 달을 관측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에 비하면 올해는 한가하다.
김선호의 페스타 소개가 끝나자 유혜림이 다가왔다.
“강우 선배? 올해도 페스타에 출품하세요?”
“아니. 난 시간 없어.”
프로젝트와 논문이 은근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이제는 예전처럼 취미 삼아 페스타에 출전할 엄두를 낼 수 없다.
“아쉽네요.”
“넌 페스타에 관심이 많나 보네?”
“생각은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학원생이 처음 논문을 쓸 때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 주도적으로 주제를 잡아본 적이 없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고민하다 보면 생각나겠지.”
격려차 응원해 주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리란 점을 안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시키면 잘하지만 스스로 찾아서 해본 경험은 없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지는 유혜림을 바라보다 강우는 최대우를 찾았다.
천체관측반의 실질적인 에이스이자 주도적으로 후배를 챙겨야 할 사람은 최대우다. 그 최대우가 지금 윤수아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한 강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강우가 할까?”
“끌어들여야지.”
“강우 시간 없을걸?”
대화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강우는 둘의 등을 동시에 내려치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뭐해?”
“컥! 깜짝이야!”
윤수아가 기겁하면서 얼굴을 찡그렸고 최대우는 기별도 가지 않는 듯 무덤덤했다.
“사이언스 페스타를 고민하고 있었어.”
최대우의 표정이 다소 심각했다.
“왜?”
“작년에도 2학년이 한 작품 출품했잖아? 올해도 2학년이 하나는 출품해야지.”
지금 2학년 중에 마땅한 사람이라면 최대우가 유일했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생각한 주제 있어?”
“그게…….”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생각해놓은 게 있나 보다. 강우는 주저하지 않고 응원했다.
“해봐. 도와줄게.”
“넌 바쁘잖아?”
“그래도 널 혼자서 고생시킬 수 없지.”
최대우와 윤수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사실 작년이 예외였다. 해마다 천체관측반에서는 2학년이 주축이 되어 한 작품을 출품했었다.
이 두 사람은 작년에 그와 함께 과제연구와 사이언스 페스타를 치르면서 연구에 익숙해졌다. 그러니 독자적으로 주제를 잡고 진행할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강우 너도 할 거지?”
“아니, 내 이름은 넣지 마. 대신에…… 음, 1학년을 끼워 넣어. 그래야 그 후배들이 내년에 주도할 것 아냐?”
“아! 그렇지.”
강우의 생각을 두 사람이 찬성했다. 이처럼 선배가 후배를 지도하면서 대물림한 경험이 동아리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역사 깊은 동아리는 잘 돌아가는 이유가 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윤수아가 벌떡 일어나서 일학년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잠시 후 윤수아가 일학년 두 녀석을 데려왔다. 한 학생은 유혜림이고 다른 학생은 장시윤이라고, 일학년 가운데 가장 천체관측을 열심히 하는 학생이다.
“이 둘이 같이하기로 했어.”
역시 유혜림이 빠질 리가 없다. 1학년의 면면을 확인한 최대우가 출품 계획을 설명했다.
“제임스웹 망원경이라고 알아?”
“들어봤어요.”
“허블 망원경 다음의 차세대 망원경?”
둘의 반응이 비슷하다.
“비록 구경이 6.5m에 불과하지만 우주에 올라간 가장 큰 망원경이자 최고 성능 망원경이야. 이 망원경은 지구 옆에 자리를 잡고 태양을 돌고 있는데…….”
최대우가 제임스웹 망원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흔히 인류 최대의 과학실험기기로 둘을 꼽는다. 바로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설치한, 둘레 27km의 입자가속기(CERN)가 첫 번째다.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이 입자가속기로 힉스입자를 발견하였으며 우주 현상을 17개의 기본입자와 4개의 기본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표준모형을 확립했다.
인류 최대의 망원경이라는 제임스웹 망원경이 두 번째다. 18개의 정육각형 반사거울로 구성된 이 망원경은 빅뱅 후 갓 태어난 태초의 우주를 적외선으로 관측하고 있다.
“별을 관측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녀석이 바로 태양이잖아? 제임스웹 망원경은 지구 그림자에 들어가 있어. 정확하게는 지구에서 150만km가량 떨어진 L2 라그랑주 점이야. 난 이번 출품작으로 라그랑주 점을 연구해볼까 해.”
역시 최대우다운 발상이다. 천문과 물리의 관심사를 가볍게 연결했다.
라그랑주 점은 공전하는 두 천체 주변에서 중력과 원심력이 평형을 이루는 안정한 지점을 의미한다. 지구와 달, 태양과 지구, 태양과 목성 등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으며 각각 5개가 있다.
만일 이 지점에 우주정거장이나 스페이스 콜로니를 설치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된다.
“우와! 재밌겠다.”
일학년 두 녀석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교과서 내용이 아닌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런 흥미로운 과제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다만 이건 삼체문제라서…… 고교 과정 밖이야. 아직 내가 약한 분야이기도 하고…….”
최대우가 설명하다가 강우를 힐끔 쳐다봤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다.
“흠흠.”
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세워진 화이트보드를 끌고 왔다.
사이언스 페스타에 출품하겠다는데 모른 척할 수 있나. 특히 이론과 관측을 모두 담당해야 할 최대우의 어깨를 조금 덜어주어야 한다.
마카를 쥐고 강우는 태양과 지구의 공전궤도를 그렸다.
“뉴턴역학에서는 한 개 또는 두 개의 물체만 다루거든? 예를 들면 직선운동하는 자동차라든가 아니면 줄에 매달린 돌멩이라든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라든가…… 물체가 둘이면 손쉽게 계산할 수 있어. 하지만 물체가 3개가 되는 순간 계산이 엄청 복잡해져. 3개 물체에 대해 각각 위치, 속도, 가속도를 모두 구해야 하니까 미지수가 많아지는 거지.”
고등학교 물리를 배운 학생들은 이 설명을 이해한다. 고등학교에서부터는 물리와 수학을 결합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삼체문제를 쉽게 풀 방법을 고민했어. 이를 해결한 사람이 라그랑주이고 이를 뉴턴역학과 달리 라그랑주역학이라고 해. 특별히 어렵진 않아. 이건 따지고 보면 벡터와 스칼라의 문제니까. 가장 단순한 문제부터 다루어 보면…….”
강우는 뉴턴과 라그랑주를 비교하는 지점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뉴턴 방식 대비 훨씬 손쉽게 풀리는 새로운 개념에 학생들이 눈을 반짝였다. 사실 딱히 새로운 개념도 고교 과정을 완전히 벗어나는 내용도 아니다. 조금 심화한 내용이기에 학생들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우의 강의는 이중진자를 비롯한 라그랑주 역학의 대표적인 문제로 넘어갔고 학생들은 강우의 탁월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처음 이 기법을 알게 되었을 때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맛보았으니까.
이것은 이차함수의 접선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하다가 미분을 배우면서 훨씬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기분과 비슷하다.
라그랑주 역학의 소개에 이어 그의 설명은 라그랑주 점으로 넘어갔다.
“중력적으로 안정한 지점인 L1은 지구에서 태양을 바라보는 방향, 즉 지구 조금 앞에 있고 L2는 그 반대인 지구 뒤편에 있어. 세 번째 라그랑주 점인 L3는 태양 건너편에 있고, 가장 안정한 두 지점인 L4와 L5는 지구 궤도에서 60도 선행한 지점과 후행한 지점에 있어.”
화이트 보드에 복잡한 수식이 쭉 나열됐다. 수학적으로 증명한 각 라그랑주 점의 위치를 학생들은 강우의 설명으로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이 지점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과학 상식이 추가됐다.
“L1에는 태양 관측 망원경인 SOHO가 있고 L2에는 제임스웹 망원경이 자리 잡았어. 지구와 달 사이에도 L2 지점을 설정할 수 있는데…… 기동전사 건담이란 애니메이션 알지? 거기에서는 콜로니 국가인 지온 공국이 L2에 건설되어 있기도 해. 그곳에서 콜로니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안정하니까. 과학적 사실이 반영된 결과야.”
강우는 각 지점의 특징을 설명하며 위치를 표시했다.
“만일 L4와 L5 지점에 소행성이 지나가다가 붙잡히면 어떻게 될까? 지구 공전궤도에는 이 지점에 특별히 큰 소행성이 없지만, 목성 주변에는 엄청 많아. 이를 트로이군 소행성이라 불러.”
각 라그랑주 지점의 설명이 끝이 났다.
놀랍게도 그들 주위에 지금 천문대에 있는 대부분 학생이 모여 있었다. 1학년과 2학년 할 것 없이 학생들은 강우의 강연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김선호 선생님마저 한쪽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학생들의 눈빛은 또렷했고 표정은 밝았다. 수업시간과 달리 모두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설명을 마치고 마카를 내려놓으며 강우는 학생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학생들이 요란한 박수를 터트렸다.
“천체관측반에 가입하면 강우 선배의 강연을 들을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어!”
유혜림이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흡사 로또를 맞은 사람 같았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들 신입생 중에는 지난 파이데이 때 강우의 강연을 들었던 학생도 있지만, 절반은 오늘 강우의 강연을 처음 들었다. 말로만 듣던 전설적인 존재의 강연에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강우는 평범한 학생과 달랐다. 이 순간 신입생들은 이 학교의 전설이자 우상인 강우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래서 출품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김선호의 질문에 이번에는 최대우가 앞으로 나섰다.
“라그랑주 점을 물리 이론으로 설명하고 그 활용 방법의 예시를 들 겁니다. 그리고 트로이군에 속한 소행성을 관측하여 그 결과를 제시하고…… 여차하면 제임스웹 망원경 모형을 제작하면…….”
최대우가 다양한 방법을 설명했다. 역시 페스타에 출품한 경험이 있어 제대로 맥을 짚고 있었다.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어떻게 볼거리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후속 설명이 쭉 이어졌다.
최대우의 제안이 끝나자 강우는 올해 사이언스 페스타에서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예상했다. 최소한 다른 과학 동아리나 다른 학교 동아리에 뒤처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과제를 예상대로 끝내면 최대우는 한층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제를 돕는 1학년도 그 과정을 겪으면서 성장의 계기를 얻을 것이다. 아마 이 작업만으로도 천체관측반에 가입한 성과를 달성하지 않을까.
“……대우도 바쁘겠군.”
어쩌면 새벽에 일어나 소행성을 관측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