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70화 (170/325)

제170화 라그랑주 포인트 (3)

인근 중학교에서 한국 수학 올림피아드 경시대회 시험이 열렸다.

작년에 경험해봤던 강우는 편안한 기분으로 윤수아, 손차희와 함께 고사장으로 향했다.

그와 손차희는 최종시험 대상자다. 지난겨울에 한국대에서 겨울학교를 수료한 덕분이다. 윤수아는 최종시험 대상자가 아니고 1차 시험 원서도 내지 않았기에 오늘은 순전히 친구를 응원하러 왔다.

고사장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작년처럼 중등부에 응시하는 중학생들이 많았고 고등학생은 드물었다.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학생을 보고 있자니 작년 생각이 났다. 작년에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시험장까지 들어갔다가 윤수아와 함께 시험을 포기하고 병원에 갔었다. 오늘 윤수아가 여기까지 응원 온 이유도 작년에 그가 준 도움 때문이다.

“강우야! 차희야! 열심히 해!”

“그래, 나야 뭐…… 대충 치면 되고 차희가 잘 쳐야지.”

“벌써 합격한 것처럼 말하네? 재수 없게.”

윤수아가 피식 웃었고 손차희는 긴장감에 표정이 굳어 있었다. 강우는 손차희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차희도 열심히 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고마워. 오늘 시험 쳐보면 알겠지. 강우도 잘해!”

최근 몇 주간 강우는 시험 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딱히 준비하지 않았고 단지 프로젝트 보고서와 상온핵융합 연구에 몰두하느라 바빴던 탓이다. 더 풀어볼 마땅한 수학 문제가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대신에 손차희의 공부를 도우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손차희는 중간고사 이후 KMO에 총력을 기울였고 적어도 강우가 보기에는 괄목할 성장을 이루었다. 예전에 비하면 수학적인 접근법과 사고력이 한층 늘었다.

일전에 보았던 손차희의 수학 재능은 B였었다. 최근 손차희가 푼 해답을 살펴보면 이제는 B를 훌쩍 넘어서지 않았는지 의심이 든다. S라 하기에는 부족할지라도 아마 A는 되지 않을까.

다만 그가 보는 그녀의 재능은 바뀌지 않기에 공부해서 지식이 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문자 표시가 현재의 지식수준이 아니라 잠재력을 뜻하기 때문으로 보였다.

후천적인 노력이 고려되지 않은 재능평가이다 보니 강우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노력해도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강우는 본인의 재능을 확인할 수 없음을 감사했다.

그들을 응원하는 수아에게 손을 흔들어준 강우는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났다. 권유성과 하은찬이다. 이 둘도 겨울학교를 무사히 마쳤기에 오늘 최종시험을 친다.

작년에 무사히 통과했던 권유성은 오늘 시험 또한 별일 없으면 통과하겠지만 하은찬은 과연 어떨지 의문이다.

두 사람이 왜 함께 있는지 어리둥절하던 강우는 이 둘이 동년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3학년과 1학년으로 달라 같은 나이란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외모로 보면 같은 나잇대가 확실하지만.

“강우! 드디어 오늘 승부다!”

“강우 형! 오늘 건투를 빌어요!”

권유성은 아직도 반말이고 하은찬은 깍듯하게 선배 대접이다.

“준비는 잘했어?”

“유성이한테 들볶여서…….”

하은찬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보니 중간고사 무렵부터 하은찬이 고곽천재 세미나실을 찾는 날이 줄어들었다. 바빴던 강우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하은찬이 권유성에게 붙잡혀 있었나 보다.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 같이 공부하면 시너지를 높일 수 있다.

“강우! 국가대표가 되어 만나자!”

권유성이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친 후 하은찬과 먼저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강우 형! 안녕하세요!”

지나가는 후배들이 인사했다. 고려 과학고 1학년 가운데 수학 올림피아드 1차 시험에 응시한 학생들이다. 그 수가 제법 많았다. 작년에는 느끼지 못하던 기분 속에서 강우는 그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올림피아드 시험의 득실 유무를 떠나 수학 실력을 테스트하는 용도로 이만한 시험이 없으니까. 올해는 많은 학생이 1차를 통과하기를 기대했다.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두 인물이 있었다.

현 고등부 수학 국가대표이자 후배에게 입지적인 인물로 알려진 고려고의 박일현과 중앙고의 안찬엽이다. 이들은 작년 국제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이지만 올해도 국가대표가 되려면 최종시험을 다시 응시해야 한다.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최종시험 통과는 어렵지 않다.

“왔구나!”

그를 본 안찬엽이 손을 내밀었다.

강우는 그 손을 마주 잡고 친분을 받아들였다.

박일현과 안찬엽은 그를 끌어주는 격려자이자 함께하는 동료다. 이제는 이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들은 진정으로 그가 국가대표에 뽑히기를 바라고 있다.

“겨울학교 이후 처음이네요.”

“너라면 국가대표가 되겠지? 떨어지면 네가 건성으로 시험을 쳐서 그런 거고.”

어쩌다 다른 학교 학생에게까지 그렇게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다. 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겠죠?”

“우리 둘도 변함없이 국가대표가 될 거야. 그럼 벌써 세 자리는 결정 났네. 남은 세 자리는 누가 되려나?”

국가대표 상비군은 모두 12명이며 이 가운데 6명만 국가대표가 되어 국제 올림피아드에 출전할 수 있다.

박일현과 안찬엽은 강우의 국가대표 마크를 당연시했다. 물론 강우도 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자부했다.

전국의 과학영재고에서 수학에서 날아다니는 녀석들이 모두 응시하니 어떤 괴물이 등장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들 두 사람이 떨어진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어깨를 툭툭 치는 박일현의 격려가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사실 그들은 오늘 최종시험에서 경쟁하는 처지임에도 서로에게서 동료애를 느꼈다. 승자의 여유를 품고 그들 세 사람의 눈은 최종시험이 아닌 국제 올림피아드가 열리는 미국 MIT를 향해 있었다.

“들어가자!”

박일현이 그를 고사실 안으로 이끌었다.

손차희를 찾아보니 어느새 빨대를 쭉쭉 빨고 있는 녀석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매일 부딪쳐 아웅다웅하면서도 때로는 친한 둘의 관계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저 녀석도 최종시험을 통과하겠지?

1차 시험 대상이라 북적대던 작년과 달리 최종시험 장소는 비교적 한가로웠다.

책상에 앉아서 강우는 눈을 감고 머리를 식혔다. 여기에 올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 채 친구를 따라 1차 시험 원서를 냈고, 정작 당일 1차 시험을 치지 못하고 추천서로 뚫어야 했다.

김윤택의 방해 때문에 교내 수학경시를 쳐야 했고 겨울학교에 다니면서도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다. 그 모든 사건이 바로 이 최종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이 시험을 적당히 칠 순 없다.

아마 강우가 이처럼 비장한 심정으로 시험에 임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바로 나다! 이 과정은 내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디딤돌이 될 테니까.’

강우는 조용히 시험 시작을 기다렸다.

이 시험의 경쟁자는 강우 본인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시험에 몰두했다.

* * *

시험이 끝난 후 휴대폰을 켰을 때 차도도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 차도도 쌤 : 강우야! 우리 집으로 와! 시험 끝난 기념으로 한 턱 쏠게.

기숙사 생활이라 쉬는 날에 밥 먹기가 마땅찮은 그에게 밥은 최고의 선물이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윤수아가 마중 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다음 강우는 재빨리 고사장을 떠났다. 자칫 친구나 후배와 만나면 빠져나가기 골치 아파져서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렸을 때 맛있는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어?”

밥을 먹으러 나갈 줄 알았는데 집에서 해 먹는 것이었나? 차도도의 음식 실력을 익히 알기에 순간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어는 무슨 어야? 내가 한 요리를 먹기 싫다는 표정이다?”

차도도가 뚱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럴 리가요? 자라는 청소년에게는 어떤 음식이라도 다 맛있는 법이죠.”

“이 녀석이 선생님을 물 먹이려고 하네?”

앞치마를 하고 커다란 뒤집개를 휘두르는 차도도의 공격을 피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 강우는 예상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역시 차도도에게 이런 잔칫상을 차릴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강우 왔어?”

신새벽이다. 예전에도 익히 경험했듯이 신새벽의 요리 실력은 대단하다.

강우는 차도도가 만든 이상한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얼굴이 활짝 폈다.

“쌤은 어쩐 일이세요?”

“나? 우리 교수님 진수성찬 차리려고.”

우스개에 한바탕 웃는 강우를 이해한 신새벽도 킥킥 웃으며 차도도에게 말했다.

“어이! 차도도 학생! 빨랑빨랑 서둘러! 그렇게 굼떠서야 어떻게 요리를 배우나?”

신새벽이 차도도를 가르치며 요리하는 모양이다.

강우는 식탁에 앉아 두 사람의 움직임을 관람했다.

“부침개 뒤집어야지!”

“이거?”

“그대로 두면 타!”

“이미 탔어!”

“국은 준비했어? 얼른 파랑 양파 썰어야지!”

“칼이 어디 갔지?”

“주인이 모르면 어떡해? 정신을 어디다 팔아?”

시간이 지날수록 신새벽의 목소리가 점점 기세등등해졌다. 반면 배우는 차도도는 찍소리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강우가 보기에도 차도도는 아직 햇병아리라 제대로 하는 요리가 없어 보였다.

강우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번졌다.

두 선생님이 그를 위해 요리하는 장면이 너무 흡족했다. 어떤 일이든 배우면 잘하게 된다. 신새벽이라는 좋은 선생님이 있으니 차도도도 오래지 않아 요리에 익숙해지겠지.

열심히 툭탁거리더니 차도도가 갑자기 국자를 탁 내려놓았다.

“난 몰라! 더는 못하겠으니 네가 알아서 해!”

구박을 견디다 못한 차도도가 강우에게 피신 왔다.

“어? 저년 봐라?”

신새벽의 거친 입담에 강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새벽도 그에게 다가와서 긴 젓가락으로 차도도를 가리켰다.

“교수님! 반항하는 불량학생 차도도를 어떻게 할까요?”

두 사람 모두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이다. 도무지 학교 선생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떡하긴. 굴려야지!”

강우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자자! 차도도 학생! 들었지? 지금부터 앞뒤로 구른다!”

“나 지금 치마 입었는데?”

이건 예전에 신새벽이 했던 멘트인데? 그새 차도도가 물들었나?

강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새벽이 바로 반응했다.

“치마가 무슨 대수라고? 지금 여기 남자 없어.”

“강우가…….”

“강우? 아직 애야 애. 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치마 입고 막 굴러도 괜찮아.”

“그럼 네가 굴러!”

강우도 말을 보탰다.

“이등병 차도도 대신 이등병 신새벽이 구른다! 실시!”

“허억! 내가 왜?”

비명을 터트리며 신새벽이 앞으로 구르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자연스럽게 강우의 시선이 신새벽에게 모였다.

“어쭈? 강우? 눈이 떨어질 줄을 모르네? 이야! 강우도 다 컸네, 컸어!”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신새벽이다. 도대체 누가 어린애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강우는 얕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에게 진정한 교수의 갑질이 뭔지 보여줄 군기 타임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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