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라그랑주 포인트 (4)
저녁을 먹은 후 커피를 마시는 시간.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던 강우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벌써 가게?”
뜨거운 커피를 살살 불던 차도도가 물었다.
“아뇨, 전 서재에 올라가서 일 좀 하려고요.”
“바쁜 일 있어?”
“항상 바쁘죠.”
강우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한 다음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신새벽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시험을 못 쳤나?”
“그럴 리가 있겠어?”
부정하는 차도도의 안면에도 근심이 떠올랐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반드시 시험을 잘 치는 법은 없으니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오늘 KMO 시험이 강우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외국 유학을 갈 때 그 대학에 실력을 직접 어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이고 올여름 미국행 성사를 위해서도 필수다.
올해 수학 올림피아드가 MIT에서 열리고 MIT에는 요셉 교수가 있으니 그 중요성을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금 강우의 계획을 명확히 몰라도 차도도는 이번 여름방학 때 강우가 어떤 일을 벌일지 대략 감을 잡고 있었다. 여름에 반드시 MIT를 방문하려면 오늘 시험을 잘 쳐야만 했다.
“강우 기분이 별로인가 봐.”
“그러게. 열심히 요리까지 했는데…….”
“어린애는 원래 맛있는 거 주면 제일 좋아하는 거 아냐?”
“어린애 아니라니까.”
어린애라고 우기는 신새벽과 아니라는 차도도 사이에 잠시 입씨름이 벌어졌다.
비록 강우가 수학과 물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아는 것도 선생님인 그들보다 더 많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달라지지 않는다. 가끔은 학생인지 능구렁이인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아직 그들에게는 어린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원래 저렇게 열심이야? 요즘 할 일 많아?”
차도도는 강우에게 주어진 임무를 계산했다. 남들은 논문 한 편을 쓰려면 최소한 일 년씩 걸린다. 그런 논문이나 보고서가 지금 강우 앞에 네 가지나 쌓여 있다. 고속전철, 프로야구, 상온핵융합, 신새벽 논문.
진짜 교수라도 헉 소리가 나올 연구 분량인데 강우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생일 뿐이다. 거기에다 내신을 공부하고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도 하니 바쁘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할 일이 많아. 우리보다도 훨씬 더.”
강우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차도도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이름만 얹지 않고 실질적인 역할을 하려고. 전반적인 연구 내용을 파악하긴 했으나 아직 강우를 따라잡으려면 까마득한 기분이다.
신새벽이 한숨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잘난 인간인 건 확실하네.”
“천재 맞아.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 천재성을 꽃 피우게 돕는 거야.”
차도도도 안다. 지금까지 수많은 천재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미적분을 푼 신동도 있었고 아이큐 200이 넘는다면서 뉴스에 오르내린 사람도 많았다.
천재 그룹이라는 멘사 회원도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의 강우처럼 진정한 천재성을 보이진 않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오래지 않아 강우의 구체적인 업적이 드러나면 한차례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괜히 옆에 있으면 방해만 되니까…… 난 그만 가볼게.”
신새벽이 옷과 소지품을 챙겼다.
“내일 일요일이니까…… 오늘 데리고 있으면서 잘 달래봐. 그래도 우리 교수님을 우리가 챙겨야지, 어떡하니?”
“그럴게. 내일 올 거니?”
“강우 있으면.”
“그래, 연락할게.”
신새벽을 보낸 차도도는 물끄러미 위층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강우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다지만 강우는 그 도를 넘어섰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강우가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예전에 고곽천재가 놀이공원을 갔던 것도 실험 리포트 때문이었다고 했었나?
학교를 벗어난 때가 그녀가 불러낸 시간 이외에는 없으니 정말 학교에서 갇힌 생활을 하는 강우다.
“너무 저렇게 자신을 몰아치지 않아도 될 텐데…….”
능력이 달리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조금은 쉬어가면서 해도 될 것을. 조만간 강우의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열심히 연구하다가 번아웃이라도 오면 그야말로 큰일이니까.
한숨을 쉬던 차도도는 과일을 준비해서 위층으로 들고 올라갔다.
* * *
강우는 십여 장의 복사지 용지에 정신없이 수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상온핵융합에 표준모델을 도입하여 이를 수학적으로 검증하는 연구다. 상온핵융합 관련 두 번째 논문으로 준비하던 주제이고 오늘 수학 시험을 친 직후 그 아이디어가 떠올랐었다.
차도도의 집에 와서도 밥을 먹으면서 고민에 잠겼고 지금 수식을 풀면서 그 타당성 여부를 검증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수식을 쓰던 그의 손놀림이 어느 순간 멈췄다. 자신이 쓴 수식을 다시 검산하면서 강우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 이 방향이 옳아.”
한 단계 문턱을 넘었다는 희열이 온몸을 적셨다. 이런 기쁨 때문에 과학자는 연구에 매달릴지도 모른다. 미지를 탐구하다가 새로운 문을 열었을 때의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최근 들어 강우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다만 그 중심이 연구보다 차도도 육성에 있었을 뿐이다.
최근 6개월간 강우는 연구 동료로서 차도도를 키우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를 연구 프로젝트에 끌어들였고 단순히 이름만 빌리는 게 아니라 그녀가 실질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도왔다.
그 결과 이제 차도도는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만큼 발전했다. 고속전철 프로젝트를 맡겨 놓아도 될 수준에 도달했고 핵융합 쪽도 새로운 연구는 어려울지라도 기존 연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최신 학술지에 올라온 논문을 무리 없이 확인하고 자신의 연구에 접목하는 수준이니까.
이 모든 발전이 강우의 의도였다. 다만 그가 차도도에게 집중하는 바람에 정작 자신의 연구에서 지지부진했던 것도 사실이다.
현재 그는 손강우가 연구했던 수준을 넘어 그 이후를 탐구하는 상황. 이제는 지금까지처럼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님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나열한 수식을 눈으로 확인하자 저절로 손에 힘이 용솟음친다.
“서둘러야지.”
푼 복사지를 차례대로 정리하고 핵심 수식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과 먹어.”
강우는 무심코 손을 뻗어 포크를 집었다. 사과를 한 조각 베어 물자 그 단맛이 입안을 채웠다.
“바빠?”
“조금요.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요.”
“막혔던 부분이 풀렸나 보네.”
“아주 조금요.”
전체 연구 내용에 비하면 아주 작은 영역의 실마리가 풀렸다. 하지만 작은 구멍이 커져서 둑이 무너지듯 이 실마리가 큰 흐름을 좌우할 수 있다.
수식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깨에 따스한 손이 얹혔다.
“쉬어가면서 해.”
“네.”
강우는 고개만 돌려 뒤에 선 차도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의도한 수준까지 올려놓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할 일에 더욱 매진할 때다. 이번 여름에 요셉 교수를 만나고 헌팅턴 관계자를 불러들여 프로젝트의 불씨를 지펴야 한다. 그래야 한발 앞서가는 마도환을 추격할 수 있다.
눈앞의 수식이 그 길을 열어주리라.
그녀의 기운을 받아 강우는 다시 연구에 빠져들었다.
* * *
열심히 자고 있을 때 몸이 흔들렸다.
“……왜에에?”
“일어나! 관측 가야지.”
최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 녀석! 단잠을 깨우다니! 이놈의 새벽 관측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딱히 잠이 많은 그가 아님에도 그렇다.
강우는 눈을 비비면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어젯밤에 잠이 들 때 최대우가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사이언스 페스타에 ‘라그랑주 점 연구’를 출품하기로 하면서 목성의 라그랑주 점에 있는, 트로이군에 속한 소행성을 관측해야 한다나?
작년에 그들이 관측했던 아스트리아와 달리 그 소행성이 어두워서 엄청 어렵다는 말을 들었었다.
휴대폰을 켜보니 새벽 두 시. 하필 한창 잠에 빠져있을 때다.
“자, 얼른 준비해.”
마치 사관학교 교관처럼 최대우가 그를 독려했다. 다른 일에는 느려터진 굼벵이이지만 먹는 것과 천체관측에서만은 그 누구보다도 빠른 최대우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설사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최대우는 천체관측을 완수할 기세다.
“흐아암, 알았어.”
주섬주섬 옷을 입고 두 사람은 기숙사 룸을 나섰다. 불이 꺼진 복도에 비상구란 초록색 등이 환했다.
“아직도 무단출입할 수 있을까?”
올해 별도로 신청하지 않았기에 이 시간에 기숙사와 천문대 출입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당연히 되지 않을까?”
최대우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출입이 어려우면 이 시간에 김선호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성사할 놈이다. 적어도 천체관측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내버려 둘 최대우가 아니니까.
철컥-
역시 기숙사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5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어찌 보면 출입 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고 황당해할 수 있지만 천체관측을 위한 배려라고 이해했다.
어둠이 깃든 천문대에 올라 하늘을 쳐다봤다. 광해에 찌든 서울 하늘에서도 밝은 별이 몇 개 보인다. 오월 특유의 맑은 하늘이 눈앞에 걸려 있었다. 천체관측 조건은 완벽하다.
천문대 돔을 열고, CCD 카메라를 준비하고, 천체망원경을 가동하는 최대우를 도왔다. 강우와 최대우의 조합이 잘 맞아떨어졌다.
오늘 관측 대상은 트로이군 소행성 가운데 가장 크고 밝다는 헥토르. 역대 624번째로 발견된 소행성이다. 목성의 라그랑주 점 L4에 자리 잡은 이 소행성의 크기는 불과 227km로 가장 밝을 때도 13등급에 불과하다.
소행성의 1번이며 지금은 왜행성으로 분류되는 세레스에 비하면 크기가 1/5에 불과하고 밝기는 무려 100배나 어둡다.
“서울 하늘에서 과연 관측할 수 있을지 의문이야.”
망원경을 겨누면서도 최대우는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흔히 사람이 맨눈으로 관측 가능한 별의 한계등급은 6등급으로 알려져 있다. 망원경을 사용하면 더 어두운 별까지 볼 수 있다. 현재 고려 과학고의 망원경은 구경이 40cm여서 이론적으로는 육안으로 14.8등급까지 볼 수 있다. 다만 이것은 관측환경이 이상적인 경우다.
서울에서는 보이는 별이 훨씬 줄어들어서 이곳에서는 이 망원경으로 대략 12등급 정도가 한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CCD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고 이것이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해준다.
“예전에 테스트했을 때 대략 15등급까지 찍혔어.”
천체관측에서 누구보다도 꼼꼼한 최대우다.
헥토르를 검출하기에 망원경이 충분할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날이 완벽하게 맑은가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소행성 자체가 관측에 최상 조건이 아니다.
소행성이 가장 밝아지는 시기는 태양의 반대편에 위치하는 충의 시기이며 헥토르는 아직 충이 되려면 두 달가량 기다려야 한다.
사이언스 페스타 일정에 쫓기지 않는다면 당연히 기다리겠지만 페스타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늘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 도전할 수밖에 없다.
도전은 위대하고 그 성취는 아름답다.
윤수아가 작년에 만들었던 소행성 검출 프로그램에 헥토르의 궤도요소를 입력했다. 지금 잠이 들어있을 윤수아도 이렇게 관측에 도움을 준다.
헥토르의 위치가 화면에 표시되고 천체망원경이 자동으로 그 하늘을 겨눴다.
그그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