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72화 (172/325)

제172화 라그랑주 포인트 (5)

인터넷을 뒤져 소행성 헥토르의 현재 위치를 손쉽게 찾기보다 그들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으로 계산해서 알아내면 훨씬 자랑스럽고 보람이 있다.

강우는 고곽천재가 만든 프로그램을 오늘 또 활용하는, 뿌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천체망원경이 향한 밤하늘 지점에 강우는 시선을 모았다.

당연히 맨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뿌연 서울의 새벽하늘이다,

비록 도심의 저 하늘은 옛날만큼 별빛의 영감을 내려주지 못하지만 지금도 그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일깨우고 있다.

저 별빛이 최대우를 전진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강우는 모니터 불빛에 음영이 진 최대우를 조용히 지켜봤다.

망원경의 움직임과 CCD가 찍은 먼 우주의 구석을 모니터로 확인하며 위치를 점검하던 최대우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를 확인했어. 어둡고 흐릿한 별이 많아서…… 소행성이 찍혔는지는 자료 사진과 비교해서 확인해야 해.”

일단 성공했다는 뜻이다. 소행성은 망원경에서도 별과 똑같이 보인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소행성의 바위 같은 이미지는 우주탐사선이 근접해서 찍은 것이다.

최대우가 소행성을 제대로 찍으려고 CCD의 노출 시간을 늘렸다. 저렇게 찍은 사진은 간단한 이미지 처리를 통해 훨씬 보기 좋은 사진으로 재탄생한다.

“헥토르만 찍으면 되는 거야?”

“다른 건 찍고 싶어도 만만한 녀석이 없어.”

“그러면 페스타 준비는 끝?”

“아직. 제임스웹 망원경 모형 만들어야지.”

작년에 비하면 그나마 단순했다. 비록 그들이 직접 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1학년들이 그 이상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돔을 닫기 전에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하늘을 쳐다봤다.

봄철 별자리가 넘어가고 하늘 꼭대기엔 여름철 별자리가 떠 있다. 비록 이곳에서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볼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작년에 제주도에 갔을 때 보았던, 하늘을 가로지르던 은하수가 마치 영상처럼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모래사장에 누워 그 별을 보던 최대우와…… 함께 해변을 걷던 차도도까지.

올해 여름에도 그런 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 *

어린이날.

어린 시절이 생각조차 나지 않는 강우에게 어린이날은 그저 쉬는 날일 뿐이었다. 세미나실에 틀어박혀 연구에 집중하겠다고 결심한 지 불과 두 시간 후에 강우는 차도도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차도도의 호출 때문이다. 귀찮다고 담임의 호출을 무시할 수 없어 후다닥 기숙사를 나와 이곳에서 서성이고 있다.

아파트 입구에서 얼쩡거리고 있자니 자동차 경고음 소리가 들렸다. 입구에서 기다리라더니 차로 멀리 가려는 모양이다.

재빨리 차도도의 소형차에 올라탔다.

“어디 가세요?”

“놀러.”

“어디요?”

“그냥…… 서울을 벗어나 볼까 해서.”

급격히 안면이 굳어지는 강우를 발견한 차도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방금 쌤이 운전 못 한다고 쫄았지?”

“아, 그건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차도도의 운전 실력은 처음 만났을 때 비하면 상당히 좋아졌다. 여전히 초보 실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이제는 차선을 바꾸지 못해 목적지를 놓치는 정도는 아니다.

“자, 어디 갈래? 오늘 어린이날이잖아?”

“저 어린이 아닌데요?”

“내가 보기엔 어린애야.”

“으음…….”

한차례 차도도를 째려본 강우는 대충 둘러댔다.

“그러면 놀이공원 가죠.”

“밟혀 죽을 일 있니?”

“그러면 일단 가면서 생각해보는 걸로 해요.”

차가 출발했다. 속도를 내지 못하고 기어가는 차가 예전보다 한결 안정감이 있다.

그제야 차도도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화사한 봄날에 딱 맞는 원피스다. 흰색과 분홍색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맞춰봐.”

“어린이날.”

“그것 말고.”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차도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작년 어린이날에는 뭐 했니?”

“그냥 기숙사에 있었는데요?”

사이언스 페스타 준비로 바빴을 때였다. 그러니 천문대에서 고곽천재와 함께 열심히 전시 물품을 제작하고 있었겠지.

그의 생각을 꿰뚫은 듯 차도도가 물었다.

“올해도 페스타에 출품하니?”

“하긴 하는데…… 대우가 주축이고 저는 할 일이 거의 없어요.”

“여전하구나.”

오늘이 무슨 날일지 수십 번 고민하던 강우는 마침내 정답을 찾아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쌤 생일이었네요?”

“이거 완전히 엎드려 절 받기인데?”

“쌤! 생일이면 남자 친구랑 데이트도 하시고…….”

“여기서 내릴래?”

차도도가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강우는 바로 입을 닫았다.

오늘 차도도가 그를 데리고 멀리 여행을 떠난 이유를 알 것 같다. 최근 들어 그가 연구에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으니 기분전환 겸 놀러 갈 계획을 세웠나 보다. 좁은 세미나실, 자습실과 기숙사 룸을 벗어나 정신적인 편안함을 주려는 그녀의 의도가 엿보였다.

요즘 그녀는 천천히 쉬면서 하라는 조언을 유달리 자주 한다. 그가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나 보다.

사실 최근 들어 강우는 과거 손강우 시절 대학원생 때처럼 연구 기분을 내긴 했다. 의문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맛보는 성취감 때문에 더욱 연구에 매진하다 보니 때때로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조심했는데 차도도가 눈치챘나?

그렇다고 당장 생활 패턴을 바꿀 생각은 없다. 실제로 바쁘기도 하고 스스로 다그치면 일의 능률도 좋아지니까.

어쨌든 그를 염려해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어떡하죠? 선물 준비를 못 했는데…….”

일전에 생일 선물로 받은 태블릿을 떠올렸다. 같은 가격대 선물은 아니더라도 그 절반을 해줘야 하는데…….

“선물은 괜찮아. 내년에 받으면 되지.”

쿨한 대답에 강우는 나중에라도 케이크를 준비해서 축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차선 변경을 못 해서가 아닌데도 그들이 탄 차는 끝없이 남쪽을 향했다. 어린이날이라 다소 막히던 도로가 어느 순간부터 한산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한 곳은 충남 청양 칠갑산. 나지막하여 등산하기 어렵지 않은 산이다.

콩밭 매는 아가씨로 유명한 칠갑산 길에는 멋지게 지어진 펜션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산을 올려다보는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강우는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거봐, 학교 벗어나니 좋지?”

“네.”

“가끔 쉬어야 해.”

“저도 알아요.”

“어휴, 말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강우를 못 말리겠다는 듯 차도도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전면에 산봉우리가 보였다.

“정말 올라가실 거예요?”

“너만 괜찮다면.”

차도도의 옷차림새를 보니 등산이 어려워 높이 올라갈 수는 없을 듯했다. 가볍게 둘레길을 걷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바람이 좋아. 머리도 맑아지고. 자주 나오자. 넌 너무 학교에 처박혀 있어.”

“쌤만 좋다면요.”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지.”

두 사람 모두 바쁜 일상 때문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 같은 한가로움이 더욱 소중했다.

반 시간가량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인근 볼거리를 검색했다.

10여 분 떨어진 곳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위를 지나는 출렁다리가 있었다.

천장호 출렁다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손을 잡고 출렁다리를 걸었다.

확 트인 호수가 가슴을 편안하게 했다. 꽤 긴 출렁다리 중간에 청양고추를 의미하는 붉은 고추 기둥이 눈길을 끌었다. 호수에 비친 다리가 장관이다.

차도도가 앞서서 다리를 건넜다.

꽃 피는 봄날의 기운을 가르는 그녀의 발걸음이 우아했다. 그 걸음이 봄을 열어주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다리는 이름만큼 출렁이지 않았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 허공에서 내려와 다리를 지지하는 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시선을 끌었다.

“쌤, 저 선을 뭐라고 할까요?”

“어떤 거?”

“원호처럼 휘어진…….”

“현수선.”

“에이, 아시네.”

“나, 그래도 물리 선생님이야.”

“그럼 현수선을 처음 구한 사람이 누구게요?”

차도도가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어쩔 수 없는 연구자네. 머리 식히라고 여기까지 데려왔더니 여기에서도 복잡한 수학과 물리를 떠올리고 있잖아?”

“천성인데 어떡해요?”

차도도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현수선을 그었다.

“그럼 현수선을 설명해봐. 난 잘 몰라서.”

모르는 게 아니라 그의 설명을 듣고 싶었나 보다. 판이 깔리자 강우는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차도도 한 사람을 위한 해설이다.

“현수선은 밀도가 균일한 선의 양 끝을 고정했을 때 전체 퍼텐셜 에너지가 최소가 되는 곡선이죠. 포물선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고요, 수학적으로는 하이퍼블릭코사인 곡선으로 표현돼요.”

“그런데?”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굴까요? 17세기 스위스에는 무려 150년간 수학자를 배출했던 유명한 가문이 있어요. 바로 베르누이 가문이죠. 확률론, 베르누이 방정식으로 유명한 수학자 야곱 베르누이는 양쪽을 고정한 실이 그리는 곡선이 무엇인지 고민했었죠.”

야곱 베르누이는 기존에 알려진 포물선을 이용하여 이 곡선의 정체를 밝히고자 무려 1년 동안 연구를 거듭했으나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동생인 요한 베르누이가 고민을 물었을 때 야곱은 장난삼아 이 문제를 제시했다.

평소 수학과 과학에서 서로 우월하다고 경쟁했던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놓고 내기를 벌이게 된다.

야곱과 달리 요한은 이 문제를 수학이 아닌 물리적 현상으로 접근했고 불과 하루 만에 당시 새롭게 알려진 미적분을 사용해서 이 곡선이 포물선과 다른 곡선임을 증명했다. 이것이 바로 현수선이 알려진 배경이다.

강우가 재미있게 이 내기를 포장해서 설명하자 차도도는 넋을 잃고 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설명을 끝냈을 때 차도도는 학생처럼 좋아했다.

“그 베르누이 가문 사람들은 너랑 성향이 비슷한가 봐. 내기를 즐긴 걸 보니.”

“제가 왜요?”

“나도 다 들었거든? 작년에 현성이랑 상철이랑 내기를 자주 했다며?”

“아! 그건 밥값 벌려고 그런 건데요.”

차도도가 그런 사소한 일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대답을 차도도가 바로 수긍했다.

“그렇구나. 작년에 나랑 신새벽 쌤과도 내기했었지? 그 대가로 밥 얻어먹었었고?”

“헤헤, 맞아요. 또 내기할까요?”

“이젠 너랑 안 해. 질 게 뻔하니까.”

단박에 거절하는 차도도의 안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저런 표정의 차도도는 그의 마음을 흔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를 놓고 그녀와 내기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내기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최후의 승부다.

다시 출렁다리를 걸으며 차도도가 투덜댔다.

“어쨌든 놀러 와서도 출렁다리를 보고 현수선을 떠올리는 너는 정말 희한한 녀석이야.”

“이 설명에 장단을 맞춰주시는 쌤도 보통이 아니죠.”

“어휴, 그래.”

차도도가 졌다는 듯 손을 들었다.

때마침 출렁다리가 흔들렸고 차도도는 쓰러지듯 강우를 붙잡았다.

한바탕 웃음이 호수 위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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