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73화 (173/325)

제173화 과제연구와 R&E (1)

막히는 길을 뚫고 밤늦게 서울로 돌아왔을 즈음 강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공정혁 선수인데요?”

현재 프로야구는 시즌 중이고 DD 파이터즈의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는 기한이 많이 남았기에 특별하게 연락 올 일이 없었다.

“받아봐.”

아무래도 프로젝트 관련 일일 것 같아 스피커폰으로 연결했다.

- 강우? 나 공정혁인데…… 야구선수.

“아! 형?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 덕분에 잘 지내. 오늘 어린이날이었잖아? 오늘 경기에서 내가 드디어 홀드를 올렸거든.

홀드란 구원투수로 나가서 잘 막았다는 뜻이다. 방출되었다가 재입단한 선수가 1군에 입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제대로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이라 반가웠다.

“잘하셨네요.”

- 이게 모두 네 덕분이다. 네가 알려준 서클 커브로 타자를 딱 삼진으로 잡았어!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데 짜릿하더라!

“축하드려요.”

- 아, 그리고…… 그때 네가 잠깐 지도해줬던 신재균 선수 있잖아? 직구와 스플리터만 던지던 투 피치 필승조.

“아, 기억나요.”

구단을 방문했던 날, 강우 덕분에 스플리터와 유사한 신 구종을 새로 장착했던 선수다. DD 파이터즈의 유망주이자 필승조 선수인데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던.

- 재균이가 요즘 잘 나가. 네 덕분에. 재균이가 구위는 좋은데 구종이 단조로워서 선발투수를 못 하고 있었거든. 이번에 신 구종을 하나 더 장착하면서 선발투수로 전향했다. 벌써 3승째 올렸어. 신 구종이 제대로 먹혔다고! 감독님께서 엄청 좋아하셔.

“제 덕분이라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 그래서 난리도 아니야. 1군 감독님께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고…… 선수들도 너랑 미팅 한번 가지자고 구단에 요청할 정도니까. 언제 한번 와줬으면 좋겠다. 시즌 중간에라도.

공정혁과 신재균의 성공이 구단과 선수들을 자극했나 보다. 과학 이론이 실전에서 먹혔다는 소식에 강우는 뿌듯한 기쁨을 느꼈다.

- 그때 오셨던 프로젝트 책임 선생님 있잖아? 미녀 선생님. 그 선생님도 소개해달라고 선수들이 난리야. 꼭 같이 와야 해.

“알았어요. 시간 나면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자 차도도가 웃음을 터트렸다.

“당분간 가지 말아야겠어요.”

“왜?”

“쌤을 노리는 선수가 이리 많을 줄이야.”

“프로야구 선수라면…… 연봉도 높고 돈도 많이 벌지 않아?”

나쁘지 않다는 듯 반문하는 차도도를 강우는 화가 나서 째려봤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제야 그녀의 술수에 속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강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왕이면 FA로 떼돈 번 나이 많은 선수를 잡으시죠?”

“킥킥,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런 장난을 치는 차도도를 보면 어느새 신새벽에게 물이 든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그녀도 그를 편하게 대하게 되었거나.

요즘 핵융합 논문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당분간 DD 파이터즈를 방문할 일은 없다. 빠르면 여름방학 때, 늦으면 프로젝트가 끝나는 올해 겨울쯤에나 가능할 것 같다.

* * *

마다하는 차도도를 설득해서 케이크를 사 들고 아파트로 갔다.

거실 한 가운데 소파용 유리 탁자에 케이크를 올렸다.

“선생님 연세가?”

“그냥 하나만 꽂아. 초 하나 더 꽂을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

차도도의 나이가 그와 딱 10년 차이였었나? 손강우와 강우의 나이 차는 20년이고 정확히 그 중간에 차도도가 있었다. 한때 이것이 신의 계시가 아닌가 생각했으나 신새벽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깨달은 후로 그런 생각을 접었다.

굳이 더 따졌다가는 얻어맞을 것 같아서 큰 초 하나로 대신했다.

거실의 불을 끄자 창으로 도심의 불빛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케이크에 꽂은 초에 불을 붙이고 제법 그럴싸한 분위기에 함께 취했다.

차도도와 마주 앉아 불타는 초를 바라봤다. 촛불에 진 음영이 그녀의 얼굴 윤곽을 뚜렷하게 했다. 은은한 불빛에 빛나는 그녀의 얼굴이 환상적이다.

“강우야? 노래 불러야지?”

어린애도 아니고 생일 축하 노래를 꼭 불러야 하나? 이 순간만은 고곽천재를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노래에 소질 있는 그가 아니기에 적당히 손뼉 치며 불렀다. 중간에 차도도가 합창을 했고 역시 그녀의 음색은 무척 고왔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노래방에서 제대로 들어봐야겠다.

불이 꺼진 거실이었으나 어둡지는 않았다.

케이크를 적당히 나누어 그에게 한 조각을 넘긴 차도도가 자신의 앞에도 한 조각을 올려놓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강우는 휴대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요셉 교수에게서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요셉 교수가 메일을 보냈어요.”

“확인해봐.”

차도도도 이 메일을 확인했다. 역시 그녀에게도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에게 온 메일 내용은 조금 달랐다.

차도도에게는 뉴클리어 퓨전 최신호에 정상적으로 논문이 게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논문 제출 후 대단히 빨리 실린 이유가 이 논문의 중요성 때문이라는 축하 인사였다.

이 논문 게재는 핵융합 학계에 그와 차도도의 이름을 등장시킨 신호탄이다.

차도도에게 보낸 메일은 여기까지였고 강우에게는 추가로 메일이 하나 더 도착해 있었다. 향후 계획을 묻는 내용이다.

원한다면 헌팅턴사에 프로젝트 관련 의향을 물어볼 생각이며 이를 위해 추가 논문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또 여름방학 때 한번 만나서 향후 연구 방향을 논의하기를 원한다는 내용까지. 미국으로 올 수 없다면 자신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강우가 의도한 대로였다.

“요셉 교수가 너를 완전히 믿고 있나 보다.”

차도도가 보기에 세계적인 석학인 요셉 교수가 고등학생인 강우를 이렇게 중요한 인물로 대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정작 강우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뛰어난 전문가일수록 상대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이다. 핵융합 쪽 그의 지식을 확신한 요셉 교수에게 고등학생이란 신분 자체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준비하고 있으니까 새삼스러울 건 없어요. 후속 논문은 벌써 쓰고 있고 여름방학 때 미국 방문도 현재로 보면 가능하니까요.”

올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가 MIT에서 열리니까 이를 기회 삼아 요셉을 만날 계획임을 차도도도 알고 있다.

“그럼 나도 미국에 갈 준비해야 하는 거야?”

연구 책임자는 차도도이기에 그녀도 요셉을 만나야 한다. 또 헌팅턴사와의 프로젝트도 행정적으로는 그녀가 앞에 나서야 한다.

“그렇겠죠? 같이 미국 가시죠?”

“음, 같이는 아니고 그곳에서 만나야지.”

강우는 올림피아드 팀과 함께 움직일 테니까.

차도도와 함께 가는 미국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 * *

매주 수요일 오후는 과제연구 및 R&E의 날이다.

현재 카이스트와 R&E를 진행 중인 고곽천재는 수요일이면 공식적으로 학교를 빠질 수 있었지만, 작년에 카이스트를 다녀온 후로 학교를 떠난 적이 없었다.

카이스트의 협조를 받아 KTX를 제작하는 업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마저 강우와 차도도가 바빠서 무산됐다.

덕분에 오후에 잠시 가우스 카페에 들러 노닥거린 정도가 딴짓한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에는 프로젝트 연구 및 보고서를 쓰거나 그도 아니면 개인 공부를 했다.

점심을 먹은 후 아지트인 세미나실로 향하기 전 고곽천재는 벤치에 앉아 한가로움을 즐겼다. 어찌 됐든 오늘 남은 일정은 R&E뿐이었기에 마음이 한없이 여유로웠다.

심심함을 날리며 윤수아가 제안했다.

“카이스트 한 번 더 갈까?”

“어차피 최종 보고서를 발표하려면 가야 해.”

“그 전엔 갈 일 없어?”

“없어.”

“우웅, 농땡이 치려 했더니 그것도 힘드네.”

모두의 이름으로 물리학회지에 논문을 실은 기쁨도 잠시 지금 고곽천재는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고속전철 프로젝트는 사실상 마무리 상태라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기 어려웠다. 일반 학생이라면 이렇게 주어진 한가로움을 좋아하겠지만 고곽천재는 갑작스러운 여유에 오히려 적응이 어려웠다.

그나마 손차희는 내신에 집중하느라 항상 바빴고 최대우는 틈틈이 물리 블로그에 매진하느라 평소처럼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핵융합 프로젝트를 체결할 이유가 있어.’

강우는 고곽천재가 뿔뿔이 흩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지금도 반이 달라서 자주 못 만나는 처지인데 R&E마저 달리하면 고곽천재의 의미가 사라진다. 그렇기에 다음 2학기에 핵융합 프로젝트를 반드시 추진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벤치에 앉아있으니 제법 날씨가 덥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세미나실로 이동할 준비를 할 때였다.

음료수 컵에 빨대를 꽂고 쭉쭉 빨면서 한 녀석이 다가왔다.

“차희? 너희는 R&E 잘하고 있어?”

“잘할 게 뭐 있어? 그냥 하는 거지.”

“하하! 이 몸도 요즘 R&E 때문에 바빠.”

이민찬이 거들먹거리면서 손차희 앞에서 짝다리를 짚었다.

강우는 녀석의 속셈이 훤히 보여서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벤치에 앉은 채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다.

“R&E 초반인데 뭐가 바빠?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을 텐데.”

경험자라고 손차희가 바로 물고 늘어졌다.

이민찬이 손을 저으며 둘러댔다.

“아냐, 바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거든.”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민찬에게 쏠렸다. 프로젝트 수행은 2학년 가운데 지금까지 고곽천재의 전유물이었는데 이민찬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고곽천재는 차도도를 지도교사로 해서 카이스트와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이민찬의 R&E 지도교사는 김윤택이다. 김윤택은 한국대 물리학과에 발이 넓으니…….

“한국대랑 R&E 하기로 했어?”

“응. 마도환 교수랑.”

강우의 오감이 저절로 반응을 일으켰다.

마도환이 미국 헌팅턴사와 상온핵융합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했었다. 그 프로젝트를 김윤택 선생님과 같이? 강우는 의문에 싸여 이민찬의 추가 설명을 기다렸다. 해외 프로젝트를 고등학교와 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텐데.

물론 한국대 교수라면 맡은 프로젝트가 한둘이 아니니 핵융합이 아닌 다른 프로젝트일 가능성도 있다.

“무슨 프로젝트인데?”

강우의 마음을 안 듯 손차희가 이민찬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핵융합 프로젝트. 마도환 교수가 대한핵융합센터와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에 우리도 참여하기로 했어.”

대한핵융합센터는 강우도 잘 아는 곳이다. 오래전 손강우 시절에 여러 차례 방문하고 연구정보를 교환하기도 했었다.

헌팅턴사와 체결한 프로젝트와 비슷한 내용으로 대한핵융합센터와도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 내용이 대충 짐작되긴 하지만 궁금함을 참기 어렵다.

“몇 년짜리 프로젝트인데?”

“우린 2년. 프로젝트 전체는 3년이었던 것 같아.”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프로젝트 하나로 R&E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주제에 집중할 수 있고 2년이면 성과도 풍족하게 낼 수 있기에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R&E 형태다.

“좋겠다. 우린 이번 학기 끝나면 프로젝트도 끝나는데 너흰 이제 시작이니 졸업 때까지 걱정 없겠네.”

손차희가 살짝 비꼬는 투로 부러워했다.

이민찬이 목을 빳빳하게 세우며 빨대를 쭉쭉 빨았다.

“하하! 그렇지? 난 앞으로 수요일마다 한국대와 핵융합센터에 놀러 갈 건데 너희는 어떡하냐?”

대한핵융합센터는 대전의 대덕연구단지에 있다.

놀리는 것이 분명하기에 손차희가 뚱한 표정으로 이민찬을 째려보고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강우는 손차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경기를 일으키며 강우를 돌아본 손차희가 그의 의도를 알아챈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프로젝트 계획서 볼 수 있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