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과제연구와 R&E (2)
과제연구 시간을 맞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이민찬과 그 친구들도 세미나실 한 곳을 빌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네 명으로 물리에 소질 있는 학생들이었고 1학년 때부터 김윤택에게서 과제연구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만일 손차희가 계속 김윤택과 과제연구를 했었다면 이 팀에 속했을 것이다.
강우도 그 네 학생의 면면이 익숙했다. 네 학생 모두 공부를 잘하는 데다 특히 물리에 재능이 있어서 강우와 인연이 많았다.
당연히 강우는 그 학생들의 재능을 확인한 적이 있었고 그들의 물리 재능은 S가 아닌 B였다. 그렇기에 관심을 끊었던 학생들이다.
“이거거든.”
이민찬이 두툼한 프로젝트 계획서를 꺼냈다.
표지에는 ‘인공태양 생성을 위한 소형 핵융합 원자로 개발 기초연구’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강우는 대략적인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한핵융합센터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국형 초전도 핵융합 장치, 토카막을 개발하여 실용화 연구를 해왔다. 오래전에 손강우도 관여한 적이 있는 국가적 프로젝트다.
현재는 1억K의 수소 플라스마를 오랜 시간 가두어두는 기술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강우가 추구하는 상온핵융합과 비슷하면서도 방향이 다르다.
보고서를 건성으로 쓱 훑어본 손차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렵네.”
“그렇지? 하나도 모르겠지? 이제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걸 연구한다 이 말이지.”
이민찬이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으스대듯 말했다.
손차희가 넘겨준 연구 계획서를 이번에는 강우가 받아서 살폈다.
몇 쪽 넘기던 강우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 계획서는 대한핵융합센터와 마도환 교수 간에 체결된 프로젝트다. 다만 연구 제목과는 그 내용이 조금 상이했다. 대한핵융합센터가 추진하는 초고온 토카막 장치와는 별개로 이것은 상온핵융합과 관련된 기초연구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실상 손강우의 피씨에 담겨 있던 자료 그대로였다. 즉 마도환은 손강우가 예전에 연구했던 자료를 기초로 이 프로젝트를 체결했다. 즉 앞으로 3년 후 연구 보고서에는 손강우가 이미 개발해 놓았던 내용이 대부분 담길 것이다.
‘마도환 이 자식, 연구할 생각은 없고 이미 완성된 손강우의 연구결과로 3년을 땜질할 생각인가 보군.’
그렇다 보니 강우는 이 연구가 끝났을 시점의 결과를 이미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연구 계획서에서 고려 과학고가 수행할 부분을 확인했다.
당연히 고등학생에게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기에 내용은 비교적 단순했다. 초고온 수소 플라스마의 거동 예측 모델을 비교 분석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연구하려면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기존 모델을 비교하는 정도라면 고등학생도 충분히 가능하다.
연구 계획서는 강우의 관점에서는 매우 실망이었다. 역시 마도환이 제대로 연구에 정진할 리가 없다.
어쨌든 마도환의 속셈을 이 계획서로 다시 확인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손차희가 강우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때?”
“그저 그렇네.”
이 계획서의 평가는 강우가 나설 일이 아니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이런 강우의 태도를 이민찬이 오해했다. 강우가 이 내용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강우가 물리를 잘한다지만 이런 전문적인 분야까지 알 수는 없다. 그렇다 보니 이민찬의 반응은 평소 성격대로 나왔다.
“크크, 어렵지? 적어도 우리는 너희보다 훨씬 어려운 연구를 하거든? 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최첨단을 걷는 수준이란 말이지.”
비웃음을 보다 못한 손차희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최첨단이든 뭐든 강우에게는 아무것도 아냐.”
“강우가 왜?”
“강우는 이번에 세계적인 학술지인 뉴클리어 퓨전에 상온핵융합 논문을 실었거든?”
“거…… 거짓말.”
“찾아봐. 정말인지.”
이민찬의 몸이 휘청했다.
손차희는 이민찬에게 한바탕 퍼붓고는 강우의 팔을 끌었다.
“우린 그만 가자.”
이민찬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쓸데없는 논쟁으로 심력을 소모하는 이민찬과 손차희를 보면서 강우는 역시 아직 어린 학생이란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마도환이 굳이 고려 과학고와 기초연구를 수행하겠다는데 딴지를 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제 피어나는 이민찬의 자부심을 굳이 꺾을 필요도 없다.
고곽천재의 본거지로 돌아가면서 손차희가 물었다.
“강우야, 저쪽 팀 프로젝트는 어때?”
“그냥 무난한 수준이야.”
“나쁘진 않나 보네.”
손차희의 아쉬워하는 표정이 그녀와 이민찬의 경쟁 관계를 잘 대변해줬다. 이 둘은 지난 중간고사에서도 치열하게 선두다툼을 벌였었다. 결과는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손차희의 승리로 끝났다.
“그, 근데 강우야…… 우리 다음 학기부터는 R&E를 어떻게 해?”
“내가 이미 준비하고 있어.”
“응? 그래, 난 너만 믿어.”
손차희가 만족한 미소를 날렸다.
손차희는 R&E에서도 이민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았다.
* * *
세미나실로 돌아오니 윤수아와 최대우 옆에서 한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은찬이다.
“형! 어디 갔다 왔어요?”
“뭘 어디가? 그냥 산책 좀 했지.”
“과제연구 시간에 갑자기 산책을 왜 해요?”
“연구하려면 머리를 비워야지.”
강우는 대충 대답하고는 책상에 놓인 과자에 손을 뻗었다. 역시 최대우와 윤수아의 책상에는 항상 과자가 빠지지 않는다.
초콜릿을 쪼개어 입에 넣으면서 강우는 자신의 입맛을 고민했다. 분명히 손강우 시절에는 이렇게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초콜릿에 손이 가고 커피보다 핫초코를 더 자주 마시게 되었으니 입맛도 어려졌다.
그런데 여전히 국밥이나 설렁탕을 찾는 식성은 그대로이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넌 왜 왔니?”
“정명욱 선생님께서 찾으시는데요?”
“왜?”
“저도 몰라요.”
지금 당장 급한 일이 없는 데다 선생님이 부르시니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담임 쌤이나 신새벽 쌤이 부르면 전화해.”
강우는 친구들에게 부탁한 다음 수학강의실로 향했다.
수학강의실에는 정명욱에게 과제연구를 지도받는 1학년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대부분 수학연구반이나 이론수학부 학생들이다.
현재는 강우도 이론수학부에 이름을 올린 부원이기에 이곳이 어색하지 않다.
그를 발견한 학생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1학년에게 이렇게 인기가 있었나? 강우는 알지 못하던 사실을 깨달은 기분이다.
“강우야, 잘 왔다. 한참 찾았어.”
“쌤 무슨 일이신데요?”
그가 들어가자마자 정명욱이 그를 교탁 중앙으로 불렀다.
“요즘 1학년들이 과제연구 주제 잡는다고 정신없잖아?”
“네, 그렇죠.”
과제연구의 성공은 주제를 무엇으로 잡느냐다. 한번 경험해본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춰서 적절하게 선택하지만 1학년은 아직 감이 없다. 그렇다 보니 터무니없이 어려운 주제를 잡거나 시간이 걸리는 주제로 고생하기도 한다.
강우는 정명욱의 말뜻을 알아챘다. 1학년들의 수학 과제연구 주제 선정에 도움을 주란 뜻이다.
정작 강우는 수학으로 과제연구를 한 경험이 없어 고민에 잠겼다.
“흠, 그럼 질문부터 받아볼게요. 과제연구 주제를 정한 학생 있어요?”
안타깝게도 아직 아무도 없었다.
강우는 바로 질문을 바꿨다.
“그럼 생각해본 주제는 있겠죠? 정하진 않았어도 이런 주제도 가능할까? 자유롭게 생각해봤잖아요? 지금 바로 그 가능성을 살펴보죠.”
강우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초롱초롱하다. 머뭇거리던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는…… 카드놀이에서 승리할 확률을 계산해보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과제연구에 갑자기 카드놀이가 끼어들어서다.
“학생 이름이?”
“배종민인데요?”
학생들의 반응에 배종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는 본의 아니게 배종민의 잠재력을 확인했다. 다른 과목은 별로였으나 수학만은 B였다. 천재는 아니어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마카를 들고 학생들에게 전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 모습에 정명욱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사실 확률은 도박에서 발전했어요. 지금 배종민 군이 카드놀이에서 수학을 떠올린 것처럼 말이죠.”
“푸하하.”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보는 확률은 바로 주사위죠. 고대에는 주사위를 신의 뜻을 헤아리기는 도구로 간주했기에 그런 주사위에서 확률을 논한다? 신에게 불경을 범하는 것이어서 누구도 확률을 연구할 수 없었죠. 덕분에 발전이 늦었어요. 확률을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은 16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인데…….”
강우의 유창한 강의가 시작됐다.
“카르다노 알아요?”
아는 학생이 없다.
“3차 방정식의 근을 증명한 그 카르다노인데…….”
강우는 작년에 그가 신입생이었을 때 정명욱 선생님의 수학 첫 시간을 기억했다. 그때 카르다노와 타르탈리아의 역사적인 분쟁을 설명했었다.
“……어쨌든 도박 중독자였던 수학자 카르다노는 도박에서 이기려고 확률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어요. 이것이 바로 수학에서 확률론의 시작입니다.”
이 확률론은 18세기에 들어와서 도박사 드 메르가 파스칼에게 도박 문제를 의뢰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문제를 파스칼은 페르마와 상의했고 그 후에 야곱 베르누이, 다니엘 베르누이, 라그랑주 등을 거쳐 라플라스에 이르러 마침내 학문으로 집대성되었다.
순식간에 강우의 입에서 유명한 수학자들이 주르르 튀어나왔다.
“결론적으로 확률론은 도박에서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200년 전의 일이 현대와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강우의 강의는 순식간에 현대로 넘어왔다.
“그게 또 그렇지 않아요. 고등학생 때 카지노 룰렛과 블랙잭을 분석하여 카지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 있어요. 그는 실제로 카지노에서 많은 돈을 벌기도 했죠.”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드놀이와 확률론 이야기가 나왔을 때 시큰둥하던 학생들도 실제로 이를 연구해서 돈을 번 고등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 고등학생은 훗날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석사,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 MIT에서 수학 교수로 근무한 에드워드 소프란 사람이죠. 이력이 참 특이하죠? 이 사람의 일생이 할리우드 영화로 나왔거든요?”
강우는 소프의 일생과 확률론을 설명했다. 카지노에서 확률을 논했던 소프는 훗날 무위험 차익거래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헤지펀드를 운용하며 주식시장을 좌우했다. 그는 일평생 카지노를 이기는 법, 주식시장을 이기는 법을 수학적으로 연구했다.
“금융시장이 발전할수록 투자예측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죠. 오늘날 수학자들은 복잡한 기법을 도입해서 상품의 가격을 확률적으로 계산해요. 이를 바탕으로 주식 및 파생상품을 거래하는 자를 퀀트라 하는데 21세기 최대 유망직종이죠. 소프가 바로 퀀트의 아버지입니다.”
학생들은 솔깃한 내용에 관심을 집중했다. 세계에서 연봉이 가장 높은 사람이 금융에서 수학으로 돈을 버는 퀀트란 사실에 모두가 고무됐다.
“그래서 방금 배종민 군이 질문한 카드놀이 확률론은 훌륭한 연구 주제가 됩니다. 카드놀이는 다소 고전적인 문제이지만 여기에 현대 경제학을 도입하면 뜨거운 주제가 될 수 있어요.”
배종민이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그 표정에서 아마도 저 학생은 훗날 유명한 퀀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 도박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경험이 적은 학생들은 과학과 인생을 보는 시야가 좁다.
그래서 목표물을 보지 못하고 길을 잃기 쉽다. 이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선생님이나 선구적인 과학자가 해야 한다. 강우는 오늘도 그 역할에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