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75화 (175/325)

제175화 과제연구와 R&E (3)

배종민이 과제연구 주제를 정한 후 봇물 터지듯 질문이 쏟아졌다.

학생들은 그들이 고민하던 주제를 털어놓았고 강우는 그때마다 적절한 방향을 제시했다.

때로는 근대 수학자들이 고민했던 수학적 개념을, 때로는 수학의 이슈와 응용 분야를 나열하며 현대 수학의 흐름과 학생들이 집중할 분야를 일깨웠다.

그 모두가 적절한 발상을 유도했기에 학생들은 강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

1학년들은 강우가 수학 과학에 능통하면서 말 잘하는 학생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여주는 조언은 그런 시각을 완전히 벗어났다.

강우는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내용을 알고 있었고 역사를 흐르는 수학과 과학의 통찰력을 보였다.

“우와! 형! 그런 내용은 어떻게 알아요?”

“드모르간이란 이름을 집합에서 들어보긴 했지만, 수학에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현대 수학의 난제가 바로 그 문제였어요?”

“위상 수학이란 게…… 엄청나네요.”

“암호론은 어떻고…….”

학생들은 지금까지 알던 수학 상식보다 오늘 하루에 더 많은 수학적 식견을 가지게 됐다.

강의실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구경하던 정명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녀석, 진짜 난 놈이야. 수학을 제대로 배우면…… 크게 될 인물인데…….”

최근 들어 강우가 수학보다 물리학에 더 치중함을 알기에 정명욱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 * *

사이언스 페스타가 열렸다.

작년과 달리 올해의 강우는 한결 여유로웠다. 올해 지구과학 분야에서는 최대우가 주축이 되어 ‘라그랑주 점의 분석과 이용 방안’이란 작품 하나만 출품했다. 작년에 두 개를 모두 입상한 성적에 비하면 올해는 소소한 참여였다.

페스타가 열리는 당일, 최대우는 1학년들과 함께 전시를 위해 미리 떠났고 강우는 최대우를 배웅한 후 느긋하게 기숙사 방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을 째고 최대우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만류하는 김선호 덕분에 차마 우길 수 없었다.

침대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자니 전화가 왔다. 신새벽이다.

“강우? 일어났니?”

“저야 새 나라의 어린이잖아요?”

“아하! 어린이?”

“근데 왜요?”

“지금 화학실로 와! 손이 모자라.”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밥 먹을 시간을 기다리던 참이라 아쉬움 속에 강우는 재빨리 화학실로 달려갔다.

“이거 좀 들어줄래?”

화학실험실에서는 신새벽과 낯선 학생 한 명이 페스타 출품 판넬을 옮기느라 야단법석이었다.

강우는 그녀를 도우면서 물었다.

“다른 학생은요?”

“원래 이거 두 학생이 출품한 건데…… 한 녀석이 연락이 안 돼.”

대충 들어보니 아직 잠에 빠져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기숙사에 있을 테니 깨우러 가면 되지 않나?

“어젯밤 늦게까지 거의 새다시피 했거든.”

작년에 페스타를 겪어본 강우는 대략 상황을 파악했다. 출품 학생은 첫날 점심시간 직후에는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대회 관계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질문하기 때문이다.

어제 너무 무리했기에 조금이라도 재워서 컨디션을 회복시키려는 신새벽의 배려가 돋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왜 불러낸 걸까? 화학반 학생도 아닌데.

“어쭈? 불만이 많은 표정이다?”

“아닌데요. 불만은 무슨. 학생은 까라면 까야죠.”

“그래, 잘 아네. 그러니까 그거 들고 따라와.”

강우는 판넬을 가득 들고 중얼거렸다.

“대학원생도 까라면 까야 하는데…….”

신새벽이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째려봤다. 강우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동하면서 강우는 자신이 든 판넬의 내용을 살펴봤다.

전반적으로 애쓴 흔적이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미흡해 보인다. 이러니 작년에도 수상하지 못했지.

판넬을 들고 걸으면서 강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차에 짐을 실은 후 강우는 신새벽에게 의견을 말했다.

“쌤, 이 주제 말인데요.”

“이거 쌈박하지?”

“그렇긴 한데…… 최종 결과에 추가해서 넣으면 어때요?”

“무슨 말이야?”

“여기에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추가로 넣으면…… 물론 특별한 의미가 없는 건 아는데 내용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잖아요?”

신새벽의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어? 그런 방법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신새벽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피어났다.

“이미 늦었으려나요?”

“아냐, 판넬 옆에 추가하면 돼. 재료 준비해서 현장서 만들어야지!”

신새벽이 다시 화학실험실로 뛰어갔다. 역시 신새벽도 열정 하나는 끝내주는 선생님이다.

신새벽의 차를 타고 페스타가 열리는 전시장을 향했다.

작년에는 김선호 선생님의 승합차를 타고 갔었는데. 최대우는 지금 잘하고 있으려나? 전시장에 가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어쨌든 결론은 올해도 페스타로 수업을 쨌다는 거다.

“쌤은 이제 운전 좀 늘었어요?”

그날 생일 때 경험했던 신새벽의 운전을 떠올리며 가슴을 졸았다.

“연습 많이 했어.”

“정말요?”

“흐악!”

갑자기 차가 급정거했다. 오늘도 그날처럼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순전히…… 네가 말을 걸어서야.”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는 다시 조심해서 차가 엉금엉금 기어갔다.

옆에서 말을 걸면 목숨이 위험할 듯하여 강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올해 페스타에서 강우가 가장 바란 행사가 있다면 바로 차도도의 강연이다.

작년에 차도도는 길이 막혀 늦는 바람에 강연에 나서지 못하고 강우가 대신했다. 덕분에 강우는 페스타의 인기인이 됐고 강연 실력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다만 그 바람에 아쉬운 점이 생겼다. 정작 차도도의 강연을 듣지 못했다. 평소 수업시간에 차도도의 설명을 항상 듣지만,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수업과 수많은 청중을 앞에 둔 강연은 엄연히 다르니까.

청중 앞의 차도도는 어떨지 사뭇 기대됐다.

토요일 오후, 차도도의 강연 시간에 맞춰 고곽천재가 모였다. 담임 또는 물리 선생님이자 R&E 지도교사의 시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수백 명은 족히 되는 학생 사이에 앉아 단상을 주시했다.

윤수아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차 쌤은 올해도 늦으시려나?”

“설마, 올해 또 늦기야 하겠어?”

강우의 대답에 손차희가 말을 받았다.

“이번에도 늦으면 강우가 대신하면 되지.”

“난 사양이야. 땜빵 인생은 그만하고 싶어.”

“차 쌤도 강연 잘하려나? 신 쌤이 더 잘하실 것 같지 않아?”

올해 담임이 신새벽이라고 벌써 차도도를 배신한 윤수아에게 눈총을 주면서 강우는 신새벽의 강연 모습을 상상해봤다.

차도도와 마찬가지로 신새벽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신새벽의 강연을 학생들이 더 재미있어할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작년에도 올해도 신새벽의 강연은 없다.

시간이 되고 정시에 차도도가 연단에 올라왔다.

평소처럼 말끔한 치마 정장을 입은 차도도가 청중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 차도도의 강연 주제는 ‘생활 속의 물리학’. 학생들에게 딱 적합한 수준의 주제와 내용이다.

낭랑하게 울리는 차도도의 목소리가 강우를 강연에 빠트렸다.

차도도의 강연 실력도 제법이다. 열심히 물리 법칙과 원리를 설명하는 그녀가 매우 멋졌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강우는 집중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손짓과 그녀의 표정까지.

지금 강연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차도도는 그와 비슷한 부류였다. 물리를 좋아하고 과학적인 호기심에 집중하며 학생을 과학의 길로 인도하기를 즐기는. 지금 강연하는 차도도에게서 강우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작년 그날에 차도도도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차도도와는 모든 면에서 어긋남 없이 잘 맞았다.

강연장을 감동으로 이끄는 차도도에게 빠져들면서 강우는 그녀를 연구의 동반자로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잘하시네.”

강우가 감탄사를 내뱉자 윤수아가 옆에서 귓속말했다.

“주변 남자애들 좀 봐. 완전 넋이 나갔어.”

그제야 강우도 청중의 반응을 살폈다. 과연 윤수아의 말 그대로였다. 학생들은 홀린 듯 차도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남학생들이 그런 경향이 심했다.

오늘도 강연이 끝난 후 차도도와 주변 공원을 산책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강우는 얼른 강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 *

전시장에서 작년에 만났던 중앙고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려고와 중앙고는 서로 호적수다. 작년에 페스타에서 만났던, 고중전에서 겨뤘던 중앙고 학생들이 이제는 눈에 익었다.

그들의 눈빛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 강우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일종의 경외심이 서려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그가 누군지 알 테니까. 모르는 학생도 이래저래 소문을 들었고.

“강우 왔어?”

중앙고에서 그를 반겨줄 학생은 오직 하나다. 바로 남동훈. 물리 재능이 S인 학생이다.

“구경 왔어. 넌?”

강우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난 올해도 출품했어. 올해 네가 뭘 출품할지 기대했었는데…… 아쉽네.”

“요즘 이것저것 바쁜 일이 많아서…….”

“수학을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라? 찬엽이 형이 그러던데?”

“수학과 물리 둘 다 하고 있지.”

남동훈과 이야기를 나누면 왠지 모르게 편하다.

강우는 남동훈이 출품한 작품의 설명을 들었다. 과연 물리 S급다운 주제이고 그 재능은 결과로 드러났다. 최대우와 비교해도 질적인 면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올해는 이 둘이 최우수상을 다툴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어느새 R&E로 넘어왔다.

“R&E 주제는 뭐야?”

“난 고속전철. 넌?”

“나는 초전도 현상을 연구해.”

초전도 현상은 20세기 말에 물리학에서 큰 획을 그었던 분야다. 물론 현재까지 꾸준히 연구되고 있긴 하다. 다만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기술적인 난제 때문에 그 기대감이 다소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어느 대학이랑?”

“한국대 물리학과.”

“아! 난 카이스트랑 하는데…….”

한국대에서 초전도 현상을 연구하는 교수라면 그도 안면이 있다. 꼼꼼하고 연구 열정이 뛰어난 교수이니 고등학생이 연구에 참여하기에 나쁘지 않다.

“프로젝트도 연결되어 있어?”

“아니. 연구비를 받지는 않아.”

가장 일반적인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협동연구 방식이다.

작년 그때처럼 두 사람은 전시장 구석 카페에서 음료를 마셨다. 오랜만이라 대화 주제도 뜬금없이 다방면으로 흘렀다.

“아! 수학 올림피아드 최종시험 발표 났어?”

“아직. 넌 물리 시험 쳤지?”

“물리는 어제 발표했어.”

“너야 당연히 붙었겠지.”

강우는 웃으며 최대우를 떠올렸다. 최대우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페스타 전시 준비 때문에 바빠서 확인하지 못했나? 아직 최대우에게서 붙었다는 소식이 없다.

“그럼 여름에 MIT 가는 거야?”

“국가대표까지 붙으면.”

최종선발은 수학과 뽑는 방식이 비슷한 모양이다.

“너야 당연히 붙겠지. 그럼 여름에 MIT에서 만나겠네.”

“크, 이 자식, 벌써 국가대표 뽑힌 것처럼 말하네? 하긴 강우 너라면 당연히 붙겠지. 그런데…… 조금 아쉬워. 물리에서 같이 나갔으면 더 좋았을 건데.”

남동훈이 강우가 수학으로 옮겨간 것을 아쉬워했다.

“네가 수학으로 와도 됐을 텐데.”

그래도 타국인 MIT에서 만나면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다.

수학과 물리에서 각자 국가대표로 뛰는 모습이 그려졌다. 국가의 명예까지는 거창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꼭 노려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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