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과제연구와 R&E (4)
물리 올림피아드 최종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당연하게도 최대우는 시험을 통과했다. 12명을 뽑는 수학과 달리 10명을 뽑는 물리 국가대표 상비군이 되었다. 국가대표로 국제 올림피아드에 출전하는 학생은 절반인 5명이기에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고곽천재는 최대우를 축하했다. 여름방학 시작하자마자 있을 대표 선발 시험에서도 최대우가 선전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이틀 뒤, 국내 수학 올림피아드 최종시험 결과도 발표됐다.
마침 수요일 오후 R&E를 앞둔 점심시간에 고곽천재는 편의점에 모여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때라 편의점은 한산했다. 하지만 R&E 시간에 세미나실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할 예정인 고곽천재는 서두를 일이 없었다.
간식을 느긋하게 고르던 윤수아는 제일 먼저 휴대폰으로 사이트에 접속해서 최종시험 통과자 12명의 명단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우와! 많이 붙었어!”
윤수아의 환호성에 모두가 몰려들었다.
- 강우, 권유성, 박일현, 손차희, 이민찬, 하은찬 (이상 고려 과학고)
12명 가운데 무려 6명이나 통과했다. 당연히 과학영재고 중에서 최다 인원이다.
면면을 확인한 윤수아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강우야 국가대표까지 당연하고, 일현 선배도 마찬가지고…… 나머지는 뭐…….”
무심코 중얼거리던 윤수아는 도끼눈을 뜬 손차희와 눈이 부딪쳤다.
“흐억! 차, 차희는 빼고.”
윤수아가 말을 바꿨으나 손차희의 매서운 공격으로 등에 불이 났다.
“이 숫자면 우리 학교에서도 역대 최다 배출 아니야?”
“그럴걸? 6명 중에 우리 학년만 셋이야. 우리 학년이 천재가 많이 모인 황금 기수잖아?”
“그렇지. 실제로 천재가 유달리…….”
손차희와 말을 주고받던 윤수아가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는 그녀도 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두가 천재처럼 보이지만 정말 천재는 오직 한 명뿐이라는 것을.
결과적으로 고곽천재 중 무려 셋이 국가대표 상비군에 입성했다. 애초에 윤수아는 올림피아드에 뜻이 없었기에 아낌없이 친구들을 축하했다.
정작 강우는 여름방학 때 머물 곳이 없어 학교 기숙사에 또 손을 벌려야 할지 고민에 휩싸였지만.
“강우야! 간식 사라! 이거 다해봐야 얼마 안 돼!”
윤수아가 집어다 놓은 과자 꾸러미를 보며 강우는 기겁했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저 많은 게 어느 배로 들어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차도도 쌤도 불러서 축하 파티하자!”
윤수아의 제안을 모두가 찬성했다.
모두 강우에게 연락을 미뤘고 강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자신 있게 통화연결을 누르고 차도도의 음성을 기다렸다.
- 강우? 무슨 일이니?
“쌤! 오늘 축하파티 어때요? 저랑 차희가 수학 올림피아드 최종시험 통과했거든요.”
- 그래, 잘됐네. 축하해. 근데…… 강우야?
“네?”
어째 차도도의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 나 오늘 카이스트에 출장 간다고 했었잖아? 지금 고속전철 연구팀이랑 같이 있는데…….
“아!”
그제야 기억났다.
오늘 고속전철 위탁연구 관련 회의가 있고 차도도가 참석하러 대전으로 떠났다.
원래 강우와 함께 출장을 가려 했으나 오늘 회의 안건이 연구보다는 행정적인 일이어서 차도도 단독으로 가게 됐다. 힘들게 멀리 가지 말라는 차도도의 배려였다.
대신에 오늘 차도도의 수업이 강우에게 떨어졌다.
원래 차도도가 맡은 이론물리부 과제연구 수업을 강우가 대신 해야 했다. 학생들과 물리학 잡담을 나누고 과제연구 주제를 조금 손봐주면 된다고 했는데…….
정작 강우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 강우? 지금 이론물리부니?
“으악!”
- 지금 편의점에서 땡땡이치고 있는 거지?
“아닙니다. 아니에요! 지금 바로 갑니다.”
- 어휴! 올라가면 죽을 줄 알아!
귀신이다. 강우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친구들도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아! 오늘 이론물리부에서 강의해야 한다는 걸 깜박했어. 축하파티고 뭐고 나중에 하자!”
강우는 부리나케 이론물리부가 모인 강의실로 뛰어갔다.
찜해놓은 과자 더미 앞에서 윤수아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
더운 여름이 시작됐다.
겨울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여름으로 바뀌는 기분이다.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기말고사에 매달렸다. 중간고사 이후 여유롭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던 고곽천재에게도 기말고사의 압박이 다가왔다.
물론 시험압박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사자인 강우는 상담실에서 신새벽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신새벽은 이제 참고논문 공부를 거의 마무리한 상태여서 본격적으로 논문 연구에 들어갈 시기가 됐다.
자연스럽게 강우는 앞으로 신새벽이 수행할 연구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었다.
“아아! 강우야! 이거 너무 어렵지 않아?”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쉬울 거예요.”
“벌써 머리가 찌근거리는데?”
“어려운 만큼 논문이 가치 있어지니 보람찬 거죠.”
강우는 살살 달래며 설명을 진행했다.
신새벽은 강우가 수고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무척 고마워하면서도 연신 투덜거렸다.
“아! 기말고사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네.”
“에이, 그건 저한테 해당하는 거고요. 쌤이야 출제하면 되니까 할 일도 없잖아요?”
“난 시험 안 치는 줄 아나 봐?”
“쌤도 시험을…….”
무심코 말하던 강우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고려 과학고에서 신새벽은 선생님이지만 한국대로 가면 학생이다. 석사과정 대학원생. 그러니 당연히 시험의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학점 취득을 모두 끝내지 않았어요? 지금 논문 학기 아니었던가요?”
석사과정은 보통 2년이고 1년은 수업을 1년은 논문에 집중한다. 다만 신새벽은 파트로 다니니까 이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
“난 이번이 마지막 학기야. 두 과목 시험 치면 학점 취득이 끝나서 시험에서 해방이야.”
그가 이 학교에 들어오기 반년 전에 신새벽이 한국대에 입학했으니 그녀는 수업 기간만 2년을 보낸 셈이다. 물론 이번 학기는 논문준비를 겸했으니 온전히 수업만 이수한 학기가 아니지만.
“신기하네요.”
“뭐가?”
“쌤도 시험을 친다는 게…….”
“나도 학생이라니까.”
가끔 신새벽이 학생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 대학교에서는 학생이 되니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학점은 잘 나와요? 대학원생은 성적 잘 주잖아요?”
“성적은…….”
무심코 대답하던 신새벽이 인상을 콱 썼다.
“왜요?”
“지금까지 노창열 교수 과목이 최악이었어.”
그 교수 과목을 수강할 때 발생한 참사를 들었기에 강우는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이번에는 그 과목이 아니니까 잘 치시겠네요.”
“얘는, 내가 넌 줄 알아? 그리고 고등학교 시험이랑 대학교, 그것도 대학원 시험이랑 같아?”
평소 신새벽의 능력을 고려하면 그녀의 대학원 성적이 꽤 우수하리란 예상이 들었다.
“우리 시험 성적으로 내기할까요?”
“내기?”
신새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전에도 내기한 적이 있어 새삼스럽진 않다. 다만 그때는 순수하게 강우의 성적만이었다.
“흐음.”
마음이 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강우를 살피는 얼굴이 음모가 숨어 있지 않은지 고민하는 모습이다.
솔직히 강우도 고현성과의 내기보다 선생님들이랑 내기가 훨씬 재밌다. 특히 신새벽은 놀려 먹는 맛이 있으니까.
“무슨 내기할 건데?”
“서로 목표점수를 정해놓고 내기하는 거죠. 예를 들면 쌤은 그 두 과목 성적 A+, 저는 화학 시험 전교 10등 이내. 어때요?”
“야! A+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대학원은 성적 잘 주잖아요?”
“그냥 A로 하면 안 될까?”
“노노. 그건 눈 감고도 하잖아요?”
신새벽의 고민이 깊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
“원래 내기하는 이유는 더 열심히 하라는 거잖아요? 그러니 달성하기 힘든 목표를 설정하는 게 바람직하죠. 벌칙이나 보상도 어려운 것으로 하고요.”
강우의 말이 틀리지 않기에 신새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 시험이니 신새벽도 이참에 잘 치고픈 욕심이 있었던 걸까. 심사숙고를 거듭하던 신새벽이 미소를 머금으며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좋아, 나는 두 과목 A+로.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넌 너무 쉬워.”
“전교 10등인데요?”
“넌 예전에 화학에서 만점을 받았잖아?”
그렇긴 하다. 강우는 지금도 마음먹고 덤벼들면 10등이 아닌 1등도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뭐로 하죠?”
“넌 수학 국제 올림피아드 금메달. 음, 근데 이것도 해버릴 것 같단 말이지. 게다가 난 두 과목인데 넌 하나이니까 내가 불리해.”
강우는 피식 웃으며 신새벽의 결정을 기다렸다.
“2학기 초에 있을 교내 경시도 걸자.”
“그건 제가 작년에 1등 했던 건데요?”
“그건 수학이었고.”
“물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화학!”
신새벽이 자신 있게 과목을 걸었다. 교내 경시에서는 한 과목만 선택해야 한다. 작년에 강우는 수학을 쳤고 모두의 예상대로 최우수상을 탔다. 그런 강우가 올해도 수학에서 최우수상을 타면 민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올해 출전 과목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신새벽이 난데없이 화학을 들고나왔다.
고려 과학고에서는 화학에서도 국제 올림피아드 국가대표가 있으니 아무리 강우라 하여도 최우수상은 쉽지 않다. 내신이 아닌 경시는 꽤 오랜 시간을 대비하지 않으면 제대로 성적을 받기 어려우니까.
“그렇게 하죠.”
졸지에 신새벽은 두 과목 A+, 강우는 국제 올림피아드 수학 금메달과 교내 경시 화학 최우수상을 걸었다.
솔직히 강우가 훨씬 어려워서 신새벽은 벌써 승리한 기쁨이 얼굴에 가득하다.
“내기 상품은 뭐로 하죠? 상대가 원하는 거 들어주기?”
“당연히 그래야지. 다만 어려운 걸로.”
지난번처럼 하루 데이트를 요구하려 했더니 신새벽이 단단히 작심한 듯 난도를 높였다.
“저야 상관없지만…….”
“나도 괜찮아!”
“쌤부터 먼저 말해 보세요. 쌤이 A+ 두 개 받으면 뭘 요구할 건지.”
“난…….”
한참 고민하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논문 끝날 때까지 네가 옆에서 도와주기.”
예상치 못한 요구가 나왔다.
“그야 뭐…… 어렵지 않지만……. 굳이 내기 아니어도 그렇게 할 생각인데요?”
“잘 생각해. 의외로 어려울 수 있어.”
신새벽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강우는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점검했다. 애초에 그는 신새벽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에 그녀의 논문을 도와주었다. 홀로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졸업했겠지만, 이왕이면 아군으로 만들려고 논문 주제를 유도하고 깊숙이 개입했다.
지금까지 그와 그녀는 윈윈 관계다.
앞으로 닥칠 문제점이라면 예상외로 졸업이 늦춰지는 일이다. 현재 예상하는 논문 통과 및 졸업 시점은 1년 후인 그의 3학년 여름 무렵. 여기에서 더 늦춰진다면?
지금 그는 3학년 졸업 후 해외 유학을 고민하고 있으니 그해 8월에 한국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아직 2년이 남았다. 2년이라면 석사 논문에 충분한 시간이다.
“제게는 너무 쉬운데요?”
“그러면 난 더 좋고. 너만 확실하게 약속한다면.”
신새벽의 눈빛이 반짝였다. 강우는 그 눈빛 속에서 불안과 안도가 교차하는 것을 발견했다. 불과 6개월 만에 예상외로 신새벽이 그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 이게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판단이 모호하지만.
“좋아요. 약속하죠. 제 졸업과 무관하게 쌤 논문을 제가 책임져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