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최종선발전 (1)
신새벽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퍼졌다. 귀여운 그녀의 얼굴이 한층 예뻐졌다.
“이제 네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원하는 것을 말해봐.”
강우는 딱히 필요한 것이 없었다.
쉽게 정하지 못하는 강우를 보고 신새벽이 대신 제안했다.
“너에게 필요한 게 있어.”
“뭔데요?”
“이번 여름에 머물 곳 있어?”
여름방학 기간에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 머무를 곳이 없다. 올림피아드를 빌미로 학교에 부탁하든가 아니면 차도도에게 또 신세를 지든가 해야 했다.
“없는데요?”
“만일 다른 곳이 힘들면 우리 집으로 와.”
“제기 목표를 달성하기 전인데요?”
가장 빠른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도 여름방학 중간에 열린다.
“방학이 이번에만 있니?”
금방 이해했다. 올여름은 목표 달성과 무관하게 재워주고 겨울부터는 목표 달성하면 머물 곳을 제공해주겠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그에게 무척 필요한 제안이다.
“좋아요, 저희 쌤이 안 된다면 쌤 집으로 갈게요.”
차도도와 신새벽의 미묘한 경쟁심을 고려하면 차도도가 거절할 일이 없어 보이지만.
좋아하던 강우는 금세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대우도 함께여야 하는데요?”
그와 마찬가지로 최대우도 갈 곳이 없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항상 함께 움직이기도 했고.
신새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락했다.
“알았어. 대우도 함께. 그리고 만일 너희 쌤 집에 머무르면…….”
잠시 고민하던 신새벽이 추가 소원을 제시했다.
“그때는…… 내가 데이트해줄게.”
“알았어요.”
그가 마다할 필요 없는 제안이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학생과 선생님 사이이니 기껏 밥 먹고 영화 보는 정도지만 하다못해 밥값 절약과 힐링에 도움이 된다.
차도도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말이 데이트지 특별한 관계는 아니니까.
여러모로 만족이다. 무엇보다 신새벽을 확실하게 그의 편으로 끌어들인 성과가 크고 방학 때 머무를 곳을 확보했으니 안심이다. 거기에 경시라면 내기로 인해 피해 보는 다른 학생이 없다. 국제 올림피아드나 교내 화학경시는 적어도 내신과 무관하다.
입가에 뜬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강우를 보고는 신새벽이 웃으며 물었다.
“좋은가 보네?”
“당연하죠. 그런데…….”
“뭐?”
“수영복 사진은 안 줘요?”
물론 농담이다. 신새벽을 놀려 먹는 맛이 있으니까.
신새벽의 안면이 확 구겨졌다.
“이 자식이!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능구렁이야!”
신새벽이 밀쳐 두었던 논문을 가져왔다.
강우는 신새벽이 정리한 자료를 살피며 문제 부분을 지적했다.
“이 저자가 푼 방식을 접근 시각을 달리하면…….”
힌트를 준 강우는 신새벽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찬찬히 지켜봤다. 역시 신새벽은 똑똑하다. 한국대 출신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새 강우의 머릿속은 다시 차도도로 돌아갔다.
“쌤, 저희 담임 쌤은…… 진학하실 생각 없데요?”
“왜 없겠어? 내가 석사과정 들어갔을 때 부러워 죽으려고 하던데.”
“근데 왜 안 하신데요?”
“나도 잘은 몰라.”
차도도에게서 들었던 가정사가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차도도가 다른 사람에게 깊이 말한 적은 없나 보다.
“이번에 카이스트에 갔을 때 한태규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권했나 보더라.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들어오라고. 원한다면 학교 선생님 신분에 파트로 다니는 것도 가능하다고.”
“저희 쌤 반응은요?”
“아직은 생각 없나 봐.”
차도도와의 협력 관계를 훗날까지 유지하려면 그녀를 대학원 과정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것도 국내보다 해외 유학을 택하도록 말이다.
이 문제는 그에게 남은 최후의 난관이라고 강우는 생각했다.
* * *
날이 더워지며 녹음이 짙어졌다.
여름과 함께 온 장마로 비 오는 날이 이어지면서 기말고사도 함께 다가왔다.
이제는 마치 일상인 것처럼 강우는 무덤덤하게 시험을 쳤다. 정작 손차희는 무척 힘들어했고 윤수아도 평소의 활력을 잃었다.
최대우는 물리 국가대표 상비군에 들어간 후 내신시험보다 물리 공부를 우선했다. 기말고사 기간에도 물리 블로그 운영을 멈추지 않았고 덕분에 질문하러 온 전국의 수많은 중고등학생에게 찬사를 받았다.
유달리 부담이 없어서인지 적어도 강우의 시계는 빨리 흘렀다.
시험이 끝나고 R&E 보고서마저 제출하니 한 학기가 끝났다.
다행히 이번에도 교장 선생님이 국가대표 상비군에 속한 학생들에게 기숙사를 개방했다. 덕분에 강우와 최대우는 난민 신세를 면했다.
차도도와 신새벽이 아쉬워했는지 다행이라 여겼는지 아는 바 없다.
방학과 함께 여름학교, 정확하게는 최종선발전이 시작됐다.
한국대 수리과학관 건물 앞에서 강우는 자신만만하게 시선을 올렸다.
“다시 보니 좋구나!”
겨울학교 수업을 들었던 이 건물에 여름에도 다시 왔다. 1차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이 여름학교를 다니기에 인원수가 제법 많았다.
물론 강우는 최종선발전 소속이다. 최종시험을 통과한 학생은 12명이고 그 12명은 별도로 교육을 받는다. 12명 가운데 6명이 최종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남은 6명은 만일을 대비한 상비군이다.
“강우? 왔어?”
중앙고 안찬엽이다. 그 곁에는 어김없이 박일현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작년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이자 현 고등학교 수학 국가대표 에이스다. 올해도 이변이 없다면 당당히 국가대표에 뽑힐 사람들이다.
“당연히 와야죠.”
“자신감이 보기 좋아.”
안찬엽이 그의 어깨를 쿡 눌렀다.
“이제 여기에서 뭘 하는 거죠?”
“2주간 교육받고 최종선발전 치르고, 선발되면 일주일 후에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날아가지.”
빡빡한 일정이다. 국제 올림피아드를 대비한 최종마무리 수업을 2주간 한다고 보면 된다.
물론 발탁 가능성이 절반이기에 그 12명은 오늘부터 피 튀기는 경쟁을 펼쳐야 한다.
경쟁이 실력 향상을 유도하므로 불만은 없지만, 그 12명 가운데 고려 과학고 학생만 6명이나 되니 적잖게 신경이 쓰인다. 누군가는 떨어져야 하는 경쟁이다.
이 시험만큼은 강우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공부는 열심히 했어?”
“그럭저럭요.”
사실 강우는 공부할 여건이 그리 좋지 않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해치울 일이 쌓였기 때문이다. 고속전철 프로젝트를 수행한 지 1년이 되었기에 연구 완결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로 국내 저널에 논문 한 편을 실었으니 외부적으로도 성과가 나쁘지 않다.
이 완결 보고서를 그와 차도도 둘이서 마무리 작업 중이다. 아쉽지만 고속전철 분야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카이스트 한태규 교수와도 당분간은 다시 만날 일이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상온핵융합 두 번째 논문도 작성하고 있다. 뉴클리어 퓨전 저널에 실은 논문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후속탄을 준비했다. 이 논문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끝을 내어 요셉 교수에게 보내야 한다. 덕분에 시간이 쪼들리게 됐다.
그가 한국대에서 수학 올림피아드를 준비하는 동안 차도도는 이 논문을 완성하느라 정말 바빠졌다. 그도 한국대 수업이 끝나는 저녁에는 차도도 집에서 논문에 몰두해야 할 처지다.
그렇기에 정작 수학을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 그의 천재성이 부족한 시간을 보완해주겠지만.
“열심히 해. 함께 미국 가자!”
안찬엽과 박일현이 파이팅을 외쳤다.
강우는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바쁜 여름의 시작이다.
* * *
단 12명뿐이었기에 단출했다.
강우는 겨울학교에서 보았던 한국대 수학과 교수, 주한얼과 이성철을 다시 만났다. 예상대로 이 두 교수가 올림피아드를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는 젊은 이성철 교수가 인솔해서 간다나.
어차피 누구든 상관없다. 이성철 교수는 지난 겨울학교 마지막 시험에서 눈도장을 찍었던 인연이 있다. 이성철 교수도 그런 강우를 바로 알아보았기에 강우에게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어깨에 이 나라의 명예가 달려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10년 전에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가 초강세를 보였었는데 최근에는 그때와 비교해서 다소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모두 분발해서 올해는 과거의 영광을 찾아봅시다!”
이성철 교수가 모두에게 노력을 당부했다.
마무리 수업은 최근 3년간 국제 올림피아드에 나왔던 문제를 다시 훑어본 후 예상문제를 풀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시험을 치르고 최종 6인을 선정한다.
“작년 출제문제를 풀어봤겠죠? 정답을 맞히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이성철 교수가 문제를 읽고 설명을 시작했다.
강우는 졸음을 참고 수업을 들었다. 제대로 수업을 듣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점심때는 12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몰려나가 겨울학교 때처럼 학생식당에서 백반을 먹었다. 서로 안면을 익혀야 하는 첫날이라 최대우와 합류하려니 눈치가 보였다.
밥을 먹은 후 음료와 간식을 산 다음 잔디밭에 모여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가대표 6인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기에 주최 측에서도 점심시간을 길게 잡아주었다.
서로 눈치 보며 주춤하는 가운데 한 학생이 제일 먼저 소개했다.
“전 한라 과학고에서 왔습니다. 3학년이고 이름은 도남혁! 작년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 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강우는 도남혁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역시 메달리스트는 달랐다. 수학이 S가 아닌 A여서 실망했다.
- 도남혁, 수학 A, 물리 B, 화학 B, 생물 C, 지구과학 B.
이어서 다른 학생의 소개가 이어졌다.
고려 과학고 학생 6명과 중앙고 안찬엽의 재능을 이미 봤었기에 다른 학생을 주로 살폈다. 아쉽게도 수학 S는 없었고 대부분 A 아니면 B였다. 물리 재능도 특출한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상비군 소속 분포는 고려 과학고가 6명이고 중앙 과학고가 3명, 나머지는 학교가 다 달랐다.
여학생은 손차희가 유일했고 1학년 학생은 하은찬뿐이다.
이들 가운데 수학 재능이 S인 학생은 박일현, 안찬엽, 하은찬 셋이다. 순식간에 강우는 여기 모인 12명의 면면을 모두 확인했다.
박일현과 안찬엽의 탁월한 수학 실력은 이미 잘 알고 하은찬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이들 셋은 국가대표 발탁 안정권으로 예상했다.
남은 자리는 셋, 그 가운데 한 자리를 강우가 차지한다면 남은 두 자리를 놓고 나머지 학생들이 경쟁하는 구조였다. 과연 손차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강우가 본인을 소개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이 남달랐다. 당연히 같은 학교 학생들은 강우를 환영했고 다른 학교 학생들은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표정으로 강우를 흘겨봤다. 지난 겨울학교에서 사고 쳤던 덕분이다.
그 가운데 유독 특별하게 구는 학생이 있었다.
“강우? 이번에는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으면 한다.”
한라 과학고의 도남혁이 난데없이 경고했다. 고려 과학고 학생이 다수여서 저렇게 나오기 쉽지 않음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성격이 보통이 아닐 듯했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호의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