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수학 국가대표 (2)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강우는 MIT 건물을 둘러보며 감격의 일성을 질렀다.
학교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 어쩌면 훗날 이곳에서 대학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층 정겹게 느껴졌다.
“자! 여러분들은 학교를 구경하다가 숙소로 가게. 난 단장 회의가 있어서…….”
이성철 교수가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교수님은 어디로 가시는데요?”
권유성의 질문에 이성철 교수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박일현이 그 대답을 대신했다.
“문제 내러 가시는 거야.”
“문제요?”
“여러 나라 수학자에게서 받은 문제를 단장 회의에서 고르거든. 그래서 시험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지.”
강우는 대충 출제하러 간다고 알아들었다. 아마도 추린 문제 중에서 6문제를 선택하고 번역과 표준 답안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나 보다.
인솔 조교가 그들을 옆에 있는 건물로 이끌었다.
“여기는 전시관이고…….”
뮤지엄(Museum)이라고 적힌 건물에는 MIT의 역사와 학생들의 연구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로봇, 인공지능, 홀로그래피 등을 보면서 강우는 MIT가 이공계임을 재확인했다.
“여기는 MIT의 대표적인 건물인 윌리엄 로저스 빌딩.”
조교가 데리고 들어간 웅장한 건물은 사람들로 붐볐다.
1층 로비에 들어선 강우는 사면의 벽을 장식한 커다란 문구를 발견했다.
- Education for a better world.
- Research for a better world.
- Passion for a better world.
- Innovation for a better world.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교육, 연구, 열정, 혁신!”
MIT를 상징하는 문구를 중얼대며 강우는 왠지 모를 뿌듯한 감동을 만끽했다. 그가 상온핵융합에 몰두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 문구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세상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강우는 상기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손차희가 눈에 띄었다. 그녀 또한 벽에 걸린 문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박일현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도 비슷했다. 모두 광장의 중간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이 문구가 전하는 의미를 되새겼다. 비록 그들은 일개 고등학생에 불과하지만 먼 훗날에는 더 나은 이 세상을 건설하는 주역이 될 것이다.
숙연한 기분에 잠겨 있자니 한 떼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그 숫자를 보니 6명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수학 올림피아드에 참석한 학생이 분명해 보였다. 외모로 봐서는 동양인인데 중국인인가 아니면 일본인인가?
그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안찬엽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헤이! 레이!”
몰려 있던 무리에서 한 녀석이 달려와서 안찬엽과 악수했다. 두 사람은 영어로 띄엄띄엄 인사했는데 대충 말을 들어보니 중국 학생인 듯했다.
“누구예요?”
강우의 질문에 박일현이 대신 대답했다.
“왕레이라고 중국 대표선수야. 작년에 금메달 받았지. 저 녀석도 3학년일걸?”
“흠, 왕레이.”
왕레이는 키가 크고 잘생긴 미남형이었다. 중국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나올 법한 외모였다.
그 순간 왕레이의 머리 위에 글자가 새겨졌고 강우는 눈을 부릅떴다. 놀랍게도 외국 학생의 재능도 확인할 수 있었다.
- 왕레이, 수학 S, 물리 A, 화학 B, 생물 C, 지구과학 B.
‘수학이 S야……. 대단하네.’
수학이 S이고 물리가 A이니 전형적으로 이과에 특화한 천재다. 역시 국제 올림피아드에는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작년에 참석해서 금메달을 받았고 3학년인데다 올해도 참석했다면 사실상 중국의 에이스라 봐야 했다.
“중국 팀에서 가장 뛰어난 유망주일 거야. 작년에 찬엽이랑 친하게 지냈는데 올해 또 만나네.”
역시 박일현이 바로 설명했다.
서로 인사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강우는 국제 올림피아드의 취지를 다시 되새겼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대항전으로 여기는 분위기지만 이 대회의 본질은 개인전이며 전 세계에서 공통 관심사를 가진 뛰어난 학생들이 만나는 교류의 장이다. 그렇기에 사실 이곳에서 국가 순위는 무의미했다.
안찬엽이 학생들을 불러 모은 후 소개했다.
“여긴 박일현, 작년에 봤으니 잘 알 테고, 여긴 권유성…….”
한 명씩 호명하면서 소개하고 중국 팀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서 왕레이가 자기 팀 학생들을 소개했다.
덕분에 강우는 그때마다 그들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개개인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중국 팀 6명 가운데 수학이 S인 학생은 2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A였다. S가 두 개인 학생은 없었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 학생의 재능을 확인한 강우는 S급 재능이 얼마나 드문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중국 인구를 고려하면 얼마나 희귀한지 실감 난다. 국제 대회에 출전한 학생 중에도 S가 아닌 학생이 대부분이다.
현재 한국 대표팀에는 수학이 S인 학생이 모두 셋이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안찬엽, 박일현, 하은찬이 수학에서 S급이다.
“올해도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다!”
왕레이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중국은 역대로 수학 올림피아드 강국이다. 대회를 시작한 초기에는 동유럽 국가가 강세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아시아로 넘어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은 그 위세가 대단했다. 최근에는 적어도 두 해에 한 번은 우승을 차지했으니까.
작년에도 중국이 우승했던 모양이다.
“하하! 그렇게는 안 되지. 우리가 있거든.”
안찬엽이 곧바로 도발했고 왕레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한국팀에는 너랑 박일현 둘뿐 아닌가?”
“최종선발전 최우수선수는 다른 학생이었어. 강우야! 눌러줘라.”
안찬엽이 강우를 데려와서 왕레이에게 인사시켰다.
당연히 중국말을 하지 못하는 강우는 영어로 짧게 인사했다.
“헬로.”
“헬로! 아! 이 학생이? 몇 학년인데?”
“2학년.”
그를 살피면서 대충 왕레이가 뭐라고 지껄였다. 일행에게 하는 말이다.
당연히 강우는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충 느낌으로는 2학년인데 대단하다, 어떻게 3학년 둘을 이겼냐는 정도로 이해했다.
안찬엽과 왕레이가 웃으면서 서로 날을 세우더니 내일 건투를 빈다며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안찬엽이 모두에게 당부했다.
“작년에는 우리가 졌으니까 올해는 반드시 이기자. 국가별 순위 매기는 방식은 알지? 메달 수가 아니고 점수 합산이야.”
해마다 수학 올림피아드에는 대략 100개국이 참여한다. 나라별 최대 참가자 수는 6명이고 전체 인원은 300명가량 된다.
금메달은 한 명이 아닌 전체 참가자의 10% 정도에 수여한다. 대회당 금메달이 대략 30명가량이다. 평균 이상의 성적을 얻으면 동메달을 받기에 메달을 따기는 어렵지 않다.
국가 순위는 참가 학생의 총점으로 계산하고 메달 수보다 특별히 잘한 학생이 있거나 특별히 떨어지는 학생이 없어야 유리하다.
강우는 국가대표의 면면을 다시 확인했다. 박일현과 안찬엽은 작년에 금메달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실력자다. 올해도 작년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은찬과 손차희가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분발해준다면 중국보다 못하지 않으리란 예상이 들었다. 그가 확인한 중국 대표팀의 재능이 그리 높지 않았으니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올해 승리는 우리 거다!”
권유성의 외침에 모두가 파이팅을 외쳤다.
* * *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강우는 산책을 나섰다.
여름이라 낮이 길어 아직도 밖이 밝았다.
기숙사에는 올림피아드에 참가한 세계 각국의 국가대표 학생들과 방학 때에도 학교를 떠나지 않은 이 학교 학부생과 대학원생, 타지에서 온 교환학생 등이 뒤섞여 꽤 북적댔다.
기숙사 지역은 평화로웠다. 산책하기 좋도록 잔디밭 사이로 길이 나 있고 주변에는 벤치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어 주거단지 같은 분위기였다.
“동네 공원 느낌이네.”
홀로 두리번거리는 강우의 눈에 벤치에 엎드려 열심히 공부하는 한 학생이 들어왔다. 금발 머리의 전형적인 영국계 백인 남학생이다.
공부하는 자세만으로도 강우는 이 남학생이 보통이 아니란 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접근한 강우의 눈에 남학생이 들여다보고 있는 책이 들어왔다.
조합. 수학책이자 올림피아드의 주요 출제 과목이다.
남학생은 책을 펼쳐놓고 문제를 노려보다가 손가락으로 책을 더듬으며 암산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우는 조용히 옆으로 가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경우의 수가 복잡한 조합 문제다. 예전에 정명욱 선생님에게서 빌려 본 책이어서 그에게는 익숙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남학생이 시선을 들었다.
“올림피아드 참가하러 왔어?”
또렷한 발음의 영어로 물어왔다. 당연히 강우도 영어로 답했다.
“응.”
“어느 나라에서 왔는데?”
“한국.”
“아, 한국!”
나라 이름은 알지만 더는 모르는 표정이다. 당연히 한국을 방문한 적도 없겠지. 강우는 상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난 강우라 해. 고등학교 2학년.”
“난 랜디 멀더. 나도 고등학교 2학년이야.”
녀석의 손을 잡으며 강우는 랜디의 머리 위에 새겨지는 재능을 확인했다.
순간 강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랜디 멀더, 수학 S, 물리 S, 화학 B, 생물 C, 지구과학 B.
무려 S가 두 개다. 그것도 수학과 물리.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S가 두 개인 녀석은 최대우가 유일했다. 하지만 최대우의 S는 물리와 지구과학이니 엄밀하게 따지면 랜디의 재능이 월등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만난 인물 가운데 최고의 재능이라 할만했다.
“대단하네.”
“응?”
“아, 아냐.”
혼잣말로 중얼거린 한국어에 랜디가 묻자 강우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이거 풀 줄 알아?”
녀석이 책을 내밀며 그에게 질문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수학 문제를 묻다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 하긴 천재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람 간의 문제에 다소 무감각하다고 했으니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닌가?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해줘야 한다. 강우는 녀석의 S급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이 문제는 앞에 나온 문제…… 그래, 이 문제. 이걸 조금 비틀어 놓은 거야. 접근 방식을 바꿔야지. 먼저 세 가지 경우에 있어서…….”
강우는 간략하게 핵심을 설명했다.
랜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질문했다.
질문하는 내용을 보면 상대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강우는 랜디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간파했다. 물론 조합에서만이니 기하나 대수 등에서도 실력자일지는 모른다.
어쨌든 수학과 물리가 S급이라는 점 때문에 확실하게 기억했다. 아마 올림피아드에서도 십중팔구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강우의 설명에 랜디의 안색이 금방 환해졌다.
“오! 접근 방식이 독특해. 대단한데? 올림피아드는 이번이 처음이야?”
“응, 난 처음. 넌?”
“난 두 번째. 작년에 처음 출전해서 금메달을 땄었어.”
역시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것도 재미있기에 수학 공부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자니 저쪽에서 어떤 여학생이 다가왔다.
“랜디!”
이 녀석과 아는 사람인가?
다가온 여학생을 본 순간 강우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랜디와 마찬가지로 금발이 화사한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파란 눈동자에 슬림한 몸매가 눈길을 끌었다.
여학생을 보는 순간 강우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배우를 떠올렸다.
강우와 랜디를 번갈아 살피던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랜디!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