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87화 (187/325)

제187화 물리 국가대표 (1)

인솔 교수와 조교는 딱히 친하진 않았으나 매우 신망 높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석천 교수는 손강우가 한국대에 들어갈 때부터 있던 장년층 교수이고 허준표 조교는 손강우가 박사과정일 때 석사과정에 있던 학생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다.

오랜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으나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는 없다.

강우는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했다.

“수학 국가대표인 강우입니다.”

“허허, 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그것도 올림피아드 대회 출전자라면 더욱! 고생했네.”

김석천 교수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MIT 분위기와 올림피아드 관련 내용을 이리저리 알려주고 있자니 저쪽에서 두 남녀가 다가왔다.

“강우?”

“랜디!”

랜디와 애나가 그를 축하해줬다.

이대로 헤어지면 아쉬울 것 같았는데 마침 적당한 때에 만났다.

랜디가 그의 어깨를 치며 칭찬했다.

“난 네가 그렇게 수학을 잘할 줄 몰랐어.”

“너도 만점이잖아?”

강우도 아낌없이 상대를 부추겼다.

두 사람은 명실상부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최고점을 받은 천재다. 그렇다 보니 서로를 보는 시각이 남달랐다.

강우는 랜디가 수학과 물리 양쪽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수학을 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애나에게서도 축하를 받던 강우는 그녀가 물리 올림피아드 출전자란 사실을 깨달았다.

“애나? 여기 우리나라 물리 대표들.”

강우는 최대우를 끌어들여 인사를 시켰다.

애나를 본 최대우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랜디도 훤칠하지만 특히 애나는 할리우드 영화를 찢고 나온 외모였기 때문이다. 이 둘이 함께 있으면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

“반가워.”

애나가 손을 내밀었고 최대우는 얼어붙어 버벅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락없이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다.

간신히 서로 소개하고 선전을 다짐했다.

“대우가 말이야, 물리 블로그를 운영하거든, 관심 있으면 가끔 구경해봐. 재미있어.”

한국어를 모르겠지만 그림과 수식을 보면 대충 통할 테니까. 수학이나 과학은 만국 공통어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젊은이들이 친목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 * *

차도도와 만나 저녁을 먹은 후 숙소로 향했다.

손차희와 윤수아까지 포함했으니 모두 네 사람이다. 아쉽게도 최대우는 MIT 기숙사에서 물리 대표단과 함께 묵어야 했다. 최대우는 물리 대회가 끝난 후에 합류할 것이다.

식사는 강우의 금메달과 손차희의 은메달을 축하해서 제법 풍성하게 차렸다. 1등인 강우보다 손차희가 더 열렬하게 축하를 받았다.

강우의 1등은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손차희가 상을 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손차희는 국가대표 상비군이 목표였었다.

호텔에서 모여 향후 일정을 계획했다.

“요셉 교수님이 조금 더 기다리라네. 헌팅턴사와 약속 잡기가 쉽지 않나 봐.”

차도도는 계속 요셉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급하게 미팅을 잡으려니 그럴 거예요. 그쪽도 일정이 있고 지금은 여름휴가 기간이라.”

이해하지만 무작정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자칫 이곳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면 곤란하다.

그래도 시험이 끝나서 홀가분했다.

“그리고…… 두 번째 논문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출간됐어. 요셉 교수에게 이 연구자가 누구냐는 문의가 꽤 많이 들어온다고 하더라.”

불과 며칠 사이에 상황이 진척됐다. 역시 논문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 것이 정공법이다. 이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핵융합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차도도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럼 마도환도 지금쯤 네이처를 봤으려나?’

마도환이 학술지를 살피면서 연구에 충실하다면 이름을 접했겠지만, 그 자식이 그럴 리는 없으니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

“세 번째 논문을 낼 의욕이 솟네요.”

강우의 말에 차도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넌 어째…… 완전 우물이구나.”

“우물요?”

“퍼도 퍼도 물이 마르지 않는 우물.”

한바탕 웃으면서 강우는 세 번째 논문은 헌팅턴사와의 프로젝트 계약 여부에 따라 내용을 달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나머지 고곽천재의 합류 여부도 정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물론 핵융합에 관심이 없다면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그냥 프로젝트만 해도 된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윤수아와 손차희는 관심을 보였다. 깊숙이 발을 담근 차도도는 빠져나가고 싶어도 불가능헸다.

“크크, 오늘부터 모두 인생을 저에게 저당 잡힌 겁니다.”

강우는 선언하자마자 차도도를 비롯한 세 여자에게 갈굼을 당했다.

밤이 이슥해진 시각 차도도가 방을 배정했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같은 방을 썼고 차도도와 강우는 각자 하나씩 방을 차지했다.

내일은 어디를 돌아다닐지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 * *

물리 대회 하루 전, 물리 한국 대표팀은 긴장과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최대우를 포함한 출전 선수 네 명과 담당 조교 허준표가 식당 한쪽 구석에 앉아 한숨을 내뱉었다.

“충수염이라고…… 긴급 수술 들어갔고, 거동하려면 이삼일 걸린다네.”

“충수염이 뭐죠?”

“맹장염.”

허준표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곳에 온 다음 날 박호재가 배가 아프다고 호소해서 인근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진료 결과 급성이어서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박호재의 옆에는 단장으로 왔던 김석천 교수가 붙었다. 조교보다 미국 사정에 더 밝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쨌든 하루를 난리 친 끝에 박호재는 무사히 치료를 받았으나 상황은 암담했다.

고려 과학고 3학년인 박호재는 작년 올림피아드 은메달 수상자이고 올해는 금메달을 목표로 한 녀석이다.

반드시 국가별로 5명이 출전할 필요는 없기에 4명 출전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아쉬움이 컸다. 박호재 본인도 안타깝지만 한국 대표팀도 마찬가지였다.

비공식이지만 물리에서는 국가 순위를 올림픽처럼 금메달 수로 정했기에 출전 선수가 많을수록 유리했다. 금메달에서 1명이 부족하면 국가 순위에서 대폭 밀리게 된다.

“어쩌겠니? 남은 우리라도 힘을 내서 최대한 순위를 올려봐야지.”

허준표가 학생들을 격려했다. 하지만 침울한 분위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네 학생은 서로 손을 모아 힘을 북돋웠다.

우울한 기분 속에 내일 대비 컨디션을 조절하려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대표팀 주장격인 고려 과학고 김창식이 갑자기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는 순간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최대우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한바탕 웃은 김창식이 허준표에게 물었다.

“저…… 조교님.”

“응?”

“출전 선수 교체는 가능한가요?”

“가능하지. 하지만 할 사람이 없잖아?”

이곳은 미국이고 급하게 교체할 선수도 없다. 상비군 5명은 한국에 있고 지금 비행기로 날아온다고 해도 시간 내 도착이 불가능하니까.

“한 사람 있는데요?”

말도 안 되는 의견에 허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아무나 내보낼 수는 없잖아?”

“그게…… 엊그제 이곳에서 만났던 수학 금메달리스트요, 강우라고…….”

“그 학생이 왜?”

“그 학생이 아직 여기 보스턴에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김창식이 최대우를 돌아봤다.

최대우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도 힘들지 않을까? 수학을 잘하면 물리도 웬만큼 하겠지만…… 그래도 학교 내신이 아니라 대학교 일반 물리에 능숙해야 해. 게다가 우리는 실험도 있어. 아무리 과학고여도 실험 경험은 대개 부족하니까. 거의 의미 없지 않을까?”

“그 학생이요…….”

김창식이 작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강우가 이론물리부에 놀러 왔다가 자신과 박호재를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무용담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강우가 내신 시험에서 물리를 모두 만점 받았다는 설명까지.

남동훈이 강하게 동의했다.

“강우라면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어요!”

허준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긍했다.

“없는 것보다 낫겠지. 동메달이라도 건져주면 그나마 도움 되니까. 그럼 한번 연락해봐. 나도 주최 측에 선수 교체 가능한지 알아볼 테니까.”

분위기가 긍정으로 바뀌었다.

김창식이 최대우에게 말했다.

“대우야, 네 친구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봐. 내일 아침에 물리 대회에 출전 의향이 있는지도. 무조건 해야 한다고 우겨. 너도 강우 실력 잘 알잖아?”

김창식은 그동안 강우가 보여주었던 능력이라면 물리 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최대우의 믿음은 훨씬 강했다. 그는 강우가 참가할 수도 있다는 말에 신이 나서 휴대폰을 들었다.

* * *

“흐아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강우는 하품을 연발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국에서 몰려온 학생들이 체육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분명히 며칠 전에 봤던 풍경인데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수학을 하는 녀석들과 비교하면 더 활발한 분위기다.

“여기란 말이지?”

강우는 옆에 있는 최대우에게 물었다.

“오늘은 5시간 동안 실험을 해. 비중은 40%. 내일은 5시간 동안 이론 시험. 비중은 60%.”

물리도 수학처럼 이틀에 걸쳐 시험을 치지만 물리는 실험이 복병이다. 오늘은 실험 대회다.

최대우가 아는 내용을 모두 설명해주며 걱정했다.

“다른 학생들은 마지막에 실험을 준비했거든. 그래서 어느 정도 익숙한데…… 넌 실험이라곤 수업시간에 한 게 전부잖아? 걱정이네.”

그 실험마저 손차희가 대부분 수행하고 리포트를 썼다는 것까진 최대우도 차마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까지 강우는 실험에 거의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뭘 고민해? 하다 보면 다 하게 되는 거지.”

정작 강우는 천하태평이었다. 대신 출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심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강우였으니까.

물리 대회에 나서는 바람에 관광할 기회를 놓쳤으니 오히려 열불이 터졌다.

“차희랑 수아는 쌤이랑 재밌게 놀고 있을 건데…….”

“하아! 강우야, 지금은 그런 생각 말고 대회에 충실을…….”

최대우의 걱정이 계속됐다.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할 테니까. 아참! 말했다시피 만일 그사이에 헌팅턴사와 약속이 잡히면 난 시험 포기할 거니까 알지?”

지금 강우의 가장 큰 관심사는 헌팅턴사였다. 자칫 미팅 시간이 대회와 엉킬까 걱정이다.

“알았어. 그럼 수고해.”

최대우가 자신의 자리로 갔고 옆에 있던 김창식과 동료들도 강우에게 선전을 권하면서 흩어졌다.

호흡을 다잡고 있자니 익숙한 녀석이 보인다.

“어? 강우? 네가 여기 웬일이야?”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은 애나였다. 강우는 수학 대표이고 물리에는 출전하지 않는다고 했기에 이곳에서 만난 것이 무척 의외였던 모양이다.

“난 망했다니까. 선수 한 명이 아파서 땜빵용으로…….”

강우는 손짓과 발짓까지 더해가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애나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흐! 물리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해. 원래는 너도 물리를 더 좋아한댔잖아?”

“그렇긴 하지.”

“신의 계시인가 보네. 너랑 겨루게 되어 즐거워.”

강우는 애나를 째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애나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덕에 이틀간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네? 아참! 그 물리 블로그 들어가 봤는데 흥미롭더라. 거기에 글 남겨도 돼?”

“당연하지. 모르는 것 있으면 올려. 대신 답해줘도 되고. 어제 그 친구가 좋아할 거야.”

“앞으로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 있으면 거기다 질문 올려야겠다.”

애나가 손으로 인사하고는 자기 자리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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