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88화 (188/325)

제188화 물리 국가대표 (2)

이곳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강우는 물리 실험의 강자다.

손강우 시절 한국대 물리 실험 조교를 하면서 온갖 실험을 가르치고 실험 기자재를 손수 만들거나 고안하기도 했었다. 당연히 강우는 보통 고등학생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품고 있었다.

‘이 정도는 껌이지.’

그렇기에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 실험 문제 역시 그에게는 하품만 나올 수준이었다. 눈 감고 자면서 실험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출제자를 모욕하는 행위라 강우는 자제해야 했다.

그럭저럭 첫날 일정을 마치고 나오니 차도도가 대회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야!”

“쌤!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너 만나러.”

“관광은 잘했어요?”

“차희와 수아는 보스턴을 열심히 돌아다녔고 난 요셉 교수와 함께…….”

대충 차도도는 놀지 못했다는 뜻이다.

“근데 무슨 일인데요?”

“헌팅턴사와 약속이 잡혔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런데 차도도의 표정이 밝지 않다. 문제가 생긴 느낌이 확 든다.

“언제인데요?”

“내일 오후 4시.”

“다른 시간은요?”

“그게 어려운가 봐. 담당자가 다음날부터 휴가라서. 이것도 간신히 잡은 거라던데.”

보스턴에서 워싱턴 D.C.는 미국 전체에서 보면 같은 동네인 동부지역이다. 하지만 실제 거리는 무려 600km나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보다 멀다. 버스로는 10시간 걸리고 항공편이 있으나 비행시간만 2시간이다. 탑승 수속 시간과 공항을 오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곤란하게 됐다.

내일 오후 4시까지 도착하려면 물리 이론시험을 포기해야 한다.

“요셉 교수님은 물리 시험을 치지 말고 내일 아침 일찍 자동차로 떠나자고 하시던데.”

“비행기 편은 얼마나 걸려요?”

“보스턴 인근의 로건 공항에서 워싱턴의 마셜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비행시간 2시간에 이리저리 고려하면 최소 4시간은 잡아야 해.”

“여기에서 정오에 떠나면요?”

“빠듯하지. 다만 우리는 초행이잖아? 제대로 시간 내로 찾아가기 어렵다고 봐야지.”

내일 있을 물리 이론시험은 아침 9시부터 5시간을 치른다. 일정상 헌팅턴사 미팅에 참석하려면 물리 시험을 절대 치를 수 없다.

강우는 머릿속으로 여러 경우를 고민해봤다.

우선순위는 당연히 헌팅턴사와의 미팅이다. 이번에 미국으로 날아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최대우를 비롯한 한국 물리 대표팀의 바람을 저버리기도 마땅찮았다. 오늘 친 시험을 내일은 포기하겠다고 말하기엔 너무 무책임했다.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 동안이라도 시험을 치는 게 나을까?

“그럼 내일 12시에 바로 떠나요. 요셉 교수님은 이 동네 지리에 익숙하실 테니까 그분을 믿고요. 내일 제가 12시까지 풀다가 바로 나올 테니까 그때 요셉 교수가 픽업하면…….”

강우가 물리 시험을 계속하겠다는 의욕을 드러내자 차도도도 수긍했다.

“좋아, 내가 요셉 교수랑 잘 조율해볼게.”

그렇게 내일 일정을 결정했다.

덕분에 강우는 추가로 할 일이 많다. 내일 조금이라도 빨리 문제를 풀기 위해 오늘 하루라도 역대 출제된 물리 문제를 훑어보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경향에 익숙해지면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 * *

입원한 학생을 대신해서 강우는 최대우와 같은 방에 묵었다.

그는 올림피아드 대비 교재를 빌려 열심히 공부했다. 내일 시험을 함께 치러야 하는 최대우 또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둘이서 같은 공부를 합심해서 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강우야, 이 문제 말이야, 다른 방법으로 풀 수 있지 않아? 라그랑주 변분법을 활용하면…….”

“너 눈이 엄청 좋아졌네!”

예전이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지적을 최대우가 한다. 그만큼 최대우의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이다.

강우는 열심히 문제를 풀면서 고개를 주억이는 최대우를 독려했다.

처음 고려 과학고에 입학했을 때 최대우는 단순히 물리에 관심 있는 학생일 뿐이었다. 그런 녀석이 흥미를 느끼고 블로그 문제풀이에 몰두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작년 교내 경시 때 우수상을 받으면서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물이 올랐다.

최근 올림피아드를 대비하면서 한국대에서 들은 수업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오늘 함께 공부하면서 평가한 최대우는 이전과 또 달랐다.

질문을 들어보면 상대의 수준이 파악되는 법이다. 최대우의 수준은 강우의 예상 이상이었다.

“너…… 창식 선배랑 어때?”

“응? 그냥 좋은 사이.”

“그거 말고. 실력이 누가 낫냐고! 올림피아드 준비하면서 시험도 치고 했을 거 아냐?”

“아! 막판엔 내 점수가 높았던 경우가 많았지.”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바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최대우를 보면서 강우를 혀를 내둘렀다.

역시 예상대로다. 아마 이번 대표팀에서 최고 성적은 최대우 차지일 것 같다. 물론 그와 안면이 없는 두 사람은 어떻게 추측할 방법이 없지만.

“강우야, 이 문제는…….”

“그래, 그것도 네 생각이 맞아.”

이제는 무슨 질문인지 입을 열기도 전에 알 것 같다. 오래전 강우도 한 번씩 경험했던 걸림돌이니까. 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줄 안다면 물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최대우는 한 단계 높은 경지로 올라선 거다.

휴대폰으로 톡이 날아왔다.

- 신새벽 쌤 : 강우? 요즘 꿀 떨어지나 보다? 연락도 없고. 놀러 다니느라 정신 못 차리지?

이런! 신새벽이다. 갑작스러운 물리 출전 때문에 연락을 안 했더니 오해했나?

- 강우 : ㅠ.ㅠ

- 신새벽 쌤 : 우는 척하지 마. 누군 논문 때문에 정신없는데 누군 놀러 다니고 이래서 인생은 불공평한 거야.

- 강우 : 쌤! 저도 공부 중이거든요.

- 신새벽 쌤 : 네가 공부해봐야…….

- 강우 : 쌤! 저 내일 시험 쳐요. 오늘도 쳤고.

- 신새벽 쌤 : 결승전이야?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아무래도 이해시키기 쉽지 않을 듯했다.

- 강우 : 쌤! 저 물리 올림피아드도 나가게 되어서 내일 시험 쳐야 해요.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해요.

- 신새벽 쌤 : 이 자식이!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 너 나중에 혼날 줄 알아!

삐쳤는지 추가로 톡이 날아오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신새벽과 다툴 때가 아니다. 얼른 이 교재를 다 봐야 한다.

강우는 두꺼운 교재를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책이라도 얇으면 좀 편했으려나? 다행히 이전에 다뤘던 문제가 많아 후딱 넘길 수 있었다.

그의 목표는 몇 문제를 푸느냐가 아니라 단 3시간 동안에 5시간이 걸려야 하는 문제를 최대한 빨리 많이 푸는 것이다.

최소한 국가대표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되니까. 적어도 박호재만큼은 점수를 받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강우는 눈을 부릅떴다.

* * *

중국 국가대표인 리유창은 3년째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에 출전했다.

그는 1학년 때부터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3학년인 이번에도 금메달이 유력시되는 인물이었다. 사실 금메달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 성적 수상을 노리고 있었다.

그에게 금메달은 손을 뒤집는 만큼이나 쉽다.

최근 3년간 그는 중국 국내에서 자신보다 물리 분야에서 더 뛰어난 천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유일한 적수라면 물리가 아닌 수학에서 찾아야 했다. 바로 수학 국가대표 주장인 왕레이다.

“금메달은 껌이지!”

리유창이 피식 조소를 머금었다. 올해 문제도 작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수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팀의 우승도 당연하다. 적어도 중국 에이스인 그가 있는 한.

자신 있게 주위를 둘러보던 리유창은 찜찜한 표정으로 옆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 보는 동양인 녀석인데 유독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녀석이 있었다.

“강우라고 했던가…….”

한국 국가대표인 듯했다. 그런데 다른 한국 선수들이 유달리 저 녀석을 감싸고 돌았다. 이런저런 질문을 퍼붓는 것부터 수상했다.

질문자 중엔 한국 팀 주장이자, 작년에 친교를 맺었던 김창식마저 있었다.

궁금증이 폭발했지만, 누구인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관심을 껐겠지만 정작 더 신경을 긁는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대표인 여학생이 강우와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한참 동안 물리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리유창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만 봐도 두 사람이 무척 친밀해 보였다.

그는 그 미국 여학생이 누군지 안다.

애나 스튜어드. 미국팀의 에이스이고 작년에 금메달을 땄다. 심지어 대회 최우수상까지 받았던 여자였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애나를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애나는 특별했다. 그 외모가 아름다워 묘사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녀는 마치 영화의 미녀 배우를 보는 기분을 주었으니까.

그래서 작년에 말을 걸었다가 바로 퇴짜를 맞았었다.

리유창은 지금도 그 흑역사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슬픔이 애나와 반갑게 이야기하는 강우를 더욱 미워하게 했다.

“너? 물리 잘하냐? 한국 팀 물리 실력은 변변찮은데?”

문제를 받기 직전에 리유창은 옆자리의 강우에게 영어로 시비를 걸었다.

그를 힐끔 보는 녀석의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도 어째 긴장한 기색이 아니다.

“넌 누군데?”

유창한 영어가 돌아왔다. 이제 더더욱 질 수 없다.

“나? 리유창. 중국 에이스! 올해 최우수상은 내 꺼야. 금메달은 말할 것도 없고.”

“호오. 그래? 물리 쫌 하나 보다?”

약간은 빈정대는 감탄이 들렸다. 리유창은 저 아래에서 솟구치는 울분을 삼켰다. 저런 녀석에게 할리우드 여신이 옆에 붙다니!

“당연하지. 너 따위는 내 상대가 안 돼.”

일단 도발해봤다. 녀석의 표정이 조금 바뀌자 그는 만족스러웠다.

순간 그 녀석이 비웃는 듯 쳐다보더니 반격했다.

“중국 에이스? 네가? 나랑 누가 더 빨리 푸는지 시합할래?”

“뭐래? 날 무시해?”

영어라서 서로 의사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지만, 저 녀석이 그를 무시하는 기색만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게다가 빨리 풀기 시합이라니? 빨리 푸는 것보다 정확하게 푸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하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이번에 최우수상을 노리는 에이스니까. 속도! 정확성! 모두 2등 하면 서럽지.

안면을 찌푸리는 순간 녀석이 재차 말했다.

“너도 물리 잘한다면 알걸? 어차피 모르는 문제를 붙잡고 있어 봐야 풀릴 리 없잖아?”

“아아! 이 자식! 좋다! 한판 붙자!”

“난 3시간 컷이다! 넌?”

3시간이란 소리를 듣는 순간 리유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빨라도 5시간짜리를 3시간이라니!

“3시간 딱 되는 순간 무조건 나간다! 오케이?”

실실 쪼개는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리유창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좋다! 3시간 컷! 붙어보자!”

비웃음을 날리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강우라는 한국인 녀석이 그에게 메모지를 건넸다.

- 견자(犬子).

중국말로 개새끼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리유창은 3시간 후 저 녀석이 질질 짜면서 후회하리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자신은 3시간이면 완벽하게 풀고 승리하리라. 예전과 비슷한 수준의 문제라면, 그동안 공부한 노력을 생각하면 3시간 이내에 끊을 수도 있으니까.

드디어 시험이 시작됐다.

옆을 힐끔 살핀 리유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자식 초반부터 무리하는군.”

하지만 질 수 없다. 리유창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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