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90화 (190/325)

제190화 헌팅턴사 (1)

그레이엄의 입가에 담긴 조소를 확인하면서 강우는 이들의 속셈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말 그대로 보험이다. 단돈 10만 달러를 투자해서 제대로 연구 성과를 뽑아내면 그야말로 대박 아닌가. 하지만 연구가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10만 달러는 회사 차원에서는 아주 적은 돈이기에 전혀 타격이 없다.

헌팅턴 측에서는 이 프로젝트가 성사되건 말건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배짱을 튕길 수 있다.

“10만 달러가 큰 금액이군요?”

강우는 다시 확인했다.

“그렇죠. 일개 고등학생과 선생님에게 연구비로 드리기엔 말입니다.”

그들의 말도 옳다. 상식적으로 고등학생에게 어떤 연구결과를 기대한단 말인가. 오늘 이렇게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는 그들의 분위기는 상식선에서 생각한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강우는 평범한 천재가 아니다. 그 금액으로는 프로젝트를 수락할 생각이 없다.

강우는 양 진영의 분위기를 살폈다.

주도권을 쥔 헌팅턴 쪽은 느긋했고 요셉 교수와 차도도 또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반전이 필요하다.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잠시 부사장님과 연구 책임자분과만 대화하고 싶습니다만?”

뜻밖의 제안이었을까?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고든과 그레이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잠시 나가서 휴식하시죠? 10분간 회의를 중단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헌팅턴 직원이 양해를 구했다.

차도도가 몸을 일으키며 강우에게 속삭였다.

“강우야, 어떻게 하려고?”

“별것 아니에요. 실력을 보여줘야죠. 믿지 않으니까.”

의문을 표하는 요셉을 차도도가 설득해서 데리고 나갔다. 헌팅턴사의 직원들도 우르르 사라지자 순식간에 회의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침묵을 깨트리고 고든이 입을 열었다.

“강 연구원. 말해 보게.”

강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한국의 마도환 교수와 체결한 프로젝트비가 100만 달러가 넘죠?”

“그렇네만.”

고든이 순순히 인정했다.

“헌팅턴에서는 마도환 교수가 상온핵융합의 기술적 난관을 깨트려주리라 기대하는 거고요?”

“그것도 맞네.”

“그 기술적 난관은 손강우 교수가 추진하던 촉매를 이용한 상온핵융합 방식이겠죠.”

고든과 그레이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술은 뮤온 촉매를 이용한 거고요.”

약간 당황하는 표정이 나왔으나 고든과 그레이엄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뮤온 촉매를 이용한 상온핵융합 기술은 예전부터 제시되었던 방법이죠. 하지만 에너지 효율 문제 때문에 벽에 부딪혀 있었고요. 손강우 교수가 타개할 가능성을 제시하려다가 죽었고 그 프로젝트를 마도환 교수가 이어받았죠. 아직 마도환 교수는 별다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고요. 헌팅턴에서는 막연한 기대감만…….”

“우리도 엄밀하게 조사해서 결정한 거네. 현재 가장 가능성 있는 인물이라고 봤으니까.”

“압니다. 그만큼 헌팅턴도 절실하니까요. 하지만…….”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저는 손강우 박사의 아이디어를 모두 물려받았고 뮤온 촉매를 통한 해결책 또한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마도환 교수도 주장했었네.”

“그럴 겁니다. 하지만 마도환 교수는 프로젝트 성사 후 반년이 지나도 어떤 진전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지요. 저는 당장 다음 달이면 뮤온 촉매와 관련된 논문을 학술지에 실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이미 관련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뜻입니다.”

“끙.”

고든이 신음을 터트렸다. 반면 그레이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반응이 상반되자 강우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레이엄이 빈정대는 투로 물었다.

“프로젝트 체결 후면 알겠죠.”

“같은 이야기를 마도환 교수도 했어. 그런데 아직도 액션이 없더군. 도대체 한국인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아무리 사고라지만 손강우 박사도 그렇고 마도환도 그렇고 모두 공수표야.”

손강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강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작은 힌트를 하나 드리죠. 뮤온 입자로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중수소 원자핵과 관련 있습니다.”

“중수소? 그거야 핵융합에서 당연한 것 아닌가?”

“잘 생각해보시죠. 항성 내부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강우의 자신만만한 눈빛에 그레이엄의 안색이 점점 변했다.

“하지만…….”

“더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독자적인 아이디어이자 상온핵융합을 현실화할 핵심내용이니까요. 당신이 상온핵융합을 연구한 사람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겁니다.”

그레이엄이 침묵에 잠기자 고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구자가 아닌 경영자인 고든은 그레이엄이 난관에 부딪혔음을 눈치챘다. 적어도 눈앞의 고등학생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은 확실했다.

어쩌면 이 고등학생은 일전의 마도환과 달리 진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논문이 실리면 저희 팀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겠죠. 당연히 관련 기업체에서도 시선을 돌리겠죠. 그때 프로젝트를 체결하려면 지금 제시한 연구비의 수십 배가 필요할 겁니다.”

고든은 강우의 뜻을 이해했다.

지금까지 이십여 년간 헌팅턴사가 이 연구에 투자한 연구비만 수천억 달러에 달한다. 자칫하면 백만 달러를 아끼려다 이십 년 연구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강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일 가능성이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백만 달러는 큰돈이 아니다. 자칫 소탐대실의 우려가 있다.

경영자이기에 고든은 손익 비용과 가능성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을 띠며 강우가 말을 추가했다.

“최근 한국 정부의 핵융합 투자 움직임을 아십니까?”

순간 고든과 그레이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예상이 맞았어!’

사실 이 부분은 강우가 넘겨짚은 것이다. 마도환이 헌팅턴사와 프로젝트를 체결한 후 벌일 행동을 추측해본 결과다. 마도환의 부친은 과학기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니 마도환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마도환은 헌팅턴사가 인정한 기술 연구를 한국도 서둘러야 한다고 정부에 로비를 벌였을 테고 정부는 핵융합 관련 연구에 자금을 투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한국에도 핵융합을 연구하는 대한핵융합센터나 원자력연구소 같은 연구기관이 널려 있다. 이런 기관과 연합해서 국가지원 프로젝트를 추진하지 않을 마도환이 아니다.

이런 예측은 강우가 마도환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고든과 그레이엄의 표정을 보니 한국의 이런 움직임을 알고 있음이 확실했다.

“오늘 헌팅턴사가 제시한 금액이라면 저는 한국 정부와 프로젝트를 체결할 겁니다. 정부 프로젝트에서 10만 달러야 표시도 안 나겠죠. 헌팅턴에서는 오늘이 가장 싸게 프로젝트를 체결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고든은 혼란에 빠졌다.

강우는 그들의 의문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한국 정부라면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연구비를 투자할까? 저들은 한국인이 아니니 답을 낼 수 없다.

“이십 년 연구를 물거품으로 만드느냐 아니냐의 문제겠지요.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할 말은 끝났습니다.”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회의실 바깥 복도에서 차도도와 요셉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강우 학생이 무슨 생각일까요?”

요셉은 안절부절못한 상태였다. 강우가 아무리 천재여도 이제 고등학생이니 당연히 믿고 맡길 수 없다.

차도도는 불안감을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저는 강우의 의도를 대충 알 것 같네요.”

“뭔가요?”

“강우는 자신의 능력을 두 사람에게 증명하고 있을 거예요.”

“능력은 이미 다 꺼내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제출한 두 편의 논문. 지금 당장에는 새로운 것이 없을 텐데요.”

“강우를…… 아직 제대로 모르시는군요.”

차도도는 자신만이 강우의 본질을 제대로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요셉에게 차도도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강우는 헌팅턴의 두 사람에게 차기 논문 내용을 이야기할 거예요. 교수님은 지금까지 강우가 낸 두 논문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물론 놀랍긴 하지만 그건 고등학생이기 때문이죠? 강우가 일반 연구원이었다면 그렇게 주목받을 논문은 아니잖아요? 그 이유는 그 논문에 실린 연구와 아이디어가 예전에 다른 연구자, 이를테면…… 음 그 손강우 박사가 쓴 논문과 큰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렇죠?”

차도도가 요셉의 내심을 꿰뚫었다. 마치 요셉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요셉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는 강우는 아직 뛰어난 고등학생에 머물러 있었다. 강우를 권위 있는 연구자로 받아들이기에는 심적으로 편치 않았다.

“강우는 이미 세 번째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 내용은 뮤온 촉매의 역할과 활용방법이고요. 상온핵융합 기술에서 하나의 벽을 돌파하는 제안이죠. 어떤 사람은 뮤온 촉매를 사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강우는 그 속에서 해법을 찾았어요.”

요셉은 할 말을 잃었다.

강우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 그의 상상을 넘어섰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바로 눈앞의 차도도였다.

비록 강우가 차도도를 추켜세웠어도 요셉은 지금까지 차도도를 강우의 대리인으로만 생각했다. 강우가 어리기에 법적으로 강우의 컨트롤을 담당하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도도의 이해도가 무척 깊었다. 마치 전문적으로 핵융합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요셉은 일순간 혼란스러웠다.

‘이 여자가 옆에서 함께 연구하고 있기에 강우가 그렇게 빨리 논문을 낼 수 있었구나.’

요셉은 강우의 비밀을 일부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차도도가 남은 커피를 비웠다.

“아마 헌팅턴의 그 두 사람도 지금 혼란스러울 거예요. 강우의 새로운 면을 봤으니까. 고민이 깊어지겠죠.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할 건지. 물론 강우는…… 부담 없을 거예요. 헌팅턴이 아니면 다른 곳과 하면 되니까요. 강우는 이미 관련 기술을 개발할 능력이 있거든요.”

단언하는 차도도의 얼굴에는 뿌듯한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그렇군요.”

요셉도 인정했다. 그는 앞으로 강우뿐만 아니라 이 여자도 눈여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시 회의실에 관계자가 모였다.

예상과 달리 표정이 굳은 고든과 그레이엄을 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편안한 강우를 보았을 때 승자가 누구인지를 쉽게 알아챘다.

그레이엄이 계약서를 꺼냈다.

“헌팅턴사는 상온핵융합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습니다. 요셉 교수 및 한국의 차도도 팀과 프로젝트를 체결하기로 말입니다. 총 연구 기간은 3년이고…….”

처음 계획과 달리 1년이 늘었다.

“총금액은 120만 달러입니다.”

연구비는 무려 12배가 증가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요셉 교수가 눈을 부릅뜨고 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세부 내용은 그동안 조율했던 사항과 동일합니다. 연구 총 책임자는 MIT 물리학과 교수인 요셉 박사님이시고 요셉 교수님은 한국의 고려 과학고 차도도 팀과 연구를 수행하시면 됩니다.”

“하하! 거참…….”

긴장이 풀린 요셉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부사장 고든이 요셉부터 차도도, 강우에 이르기까지 악수하며 프로젝트 체결을 축하했다.

그레이엄이 계약서를 전달하면서 덧붙였다.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다만…… 죄송하게도 금액이 커진 만큼 추가로 서명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레이엄이 또 다른 계약서를 꺼내어 흔들었다.

역시 헌팅턴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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