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91화 (191/325)

제191화 헌팅턴사 (2)

순간 회의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강우도 무슨 계약서인지 몰랐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헌팅턴사가 무기력하게 밀릴 리가 없으니 저들도 안전장치를 해둘 셈이겠지.

“무엇입니까?”

요셉 교수가 대표로 물었다.

그레이엄이 요셉 교수에게 계약서를 밀었다.

“별다른 것 아닙니다. 계약서라기보단 서약서죠. 3년간 성실히 연구 활동에 임해달라는 뜻이죠.”

계약서에는 강우와 차도도가 신분이 바뀌더라도 연구 활동에 매진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조건은 요셉 교수와는 상관없고 그렇다고 차도도를 표적 삼은 것도 아니니 순전히 고등학생 신분인 강우 때문이다. 강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칫 연구가 중단될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는 장치다.

“법적인 효력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강제하는 효과가 있겠죠.”

프로젝트를 계약한 이상 성실 수행은 당연하다. 거기에 위약금도 없는 이런 계약서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없다.

일반적인 프로젝트는 연구인력을 연구 총책임자가 자체적으로 배치한다. 즉 강우가 졸업하면 다른 연구원으로 대체하면 된다.

다만 이 경우는 강우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서약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레이엄이 서약서를 펜으로 가리켰다.

“잘 보시면 다른 중요 조항도 있습니다.”

“흠, 프로젝트가 연장되거나…… 실용화 개발 단계로 들어갈 때는 헌팅턴이 우선협상권을 가진다? 이건 또 뭡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이것도 관례상으로 보자면 당연한 건데…….”

요셉 교수가 웃으며 차도도와 강우의 동의를 구했다.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얼핏 보면 불리한 조항이지만 나쁘지 않다. 그만큼 헌팅턴사에서 강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인증한 셈이니까.

연구 기간이 1년 늘면서 강우는 고등학교 졸업 후를 보장받게 됐다.

졸업 후에도 요셉과 차도도와 함께해야 하며 MIT 입학 또한 어렵지 않게 됐다. 1년 반이나 프로젝트가 남은 그를 요셉 교수는 MIT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그가 바라던 일이다. 여차하면 고곽천재 전부를 묶을 수도 있다. 120만 달러라면 적은 금액이 아니니까.

계약서를 앞에 두니 가슴이 뿌듯해진다.

손강우 시절 이 프로젝트를 계약하려고 절치부심했었다. 물론 당시의 계약 규모는 혼자였고 이보다 조금 더 컸지만 강우는 지금 이 계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마치 그 시절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이것으로 완벽하게 손강우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스슥-

강우는 매끄럽게 서명했다. 순간 익숙한 손강우 서명을 할뻔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 사람이 서명을 마치고 계약서와 서약서를 고든에게 전했다.

회의실에서 박수가 터지고 모두 일어나서 악수로 자축했다.

“상온핵융합 개발이 성공하기를!”

헌팅턴사와 강우 팀은 분명히 견해가 다르지만 이 연구가 인류의 문화를 바꿔놓을 중요한 과제임을 안다. 그렇기에 그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 * *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 발표일이 됐다.

형식은 수학과 마찬가지였다. 참가 인원의 8%에게 금메달을 수여하고 절반가량에 동메달을 수여한다. 최고 점수를 받은 학생에게 최우수상을 주는 것도 동일하다.

국가 순위는 비공식으로 발표하고 메달 순이다.

물리 국가대표 선수들과 행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강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한 무리의 학생을 발견했다.

중국 팀이고 그 선두에 리유창이 있었다.

녀석을 보는 순간 강우는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꿈은 잘 꿨냐?”

이 정도 영어는 통하겠지.

“이익!”

리유창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숨겼다. 개꿈이었나보다.

녀석의 행동을 보니 이 녀석이 물리 이론시험에서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 보인다. 생각 없이 강우를 따라 3시간 만에 나온 후에 아마도 뼈저리게 후회했겠지.

이 녀석이 올해 최우수상 후보라는 소문을 얼핏 들었기에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마음속으로만.

한국 대표팀과 중국 대표팀이 대치하고 있자니 애나가 다가왔다.

“강우! 얼굴이 밝아 보이네?”

“상 받아야지.”

강우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애나가 까르르 웃었다.

“무슨 자신감이야?”

“너도 그렇지 않아?”

“나? 당연하지.”

남이 들으면 재수 없을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최대우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 시선을 의식한 애나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대우? 블로그 들어가 봤는데…… 재밌더라. 인사말도 썼어.”

“닉네임이?”

“goddess.”

“오! 여신!”

“앞으로 종종 접속할게.”

최대우의 안색이 돈벼락을 맞은 것처럼 환해졌다.

애나가 한국 대표팀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중국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특히 리유창은 노골적으로 강우를 부러운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강우는 녀석에게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뜻이 통하려나?

리유창이 갑자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젠장! 한 방 먹었다.

애나가 자기네 팀으로 돌아간 후 최대우가 찬사를 연발했다.

“존예다, 존예!”

“대우야. 언제는 걸그룹 누구랬지? 여신이라며?”

“벌써 바꿨어.”

이래서 남자의 마음은 갈대다.

시상식이 시작됐다.

물리 올림피아드 단장 대표가 올라와서 총평을 말했다. 영어 발음이 영 별로라서 알아듣기 난감하긴 했는데 대충 수고했다는 평이었다.

이어서 대회 최우수상을 호명했다.

“미국 대표 애나 스튜어드!”

“우와! 애나가 물리를 정말 잘하나 봐!”

최대우의 눈에서 하트가 더 짙어졌다.

솔직히 강우도 놀랐다. 애나가 재능이 S급이긴 했지만 물리에서 최고점을 달성할 줄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그녀의 친구인 랜디도 수학에서 최우수상을 받지 않았던가.

둘이 같은 사립학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정말 대단한 두 사람이다.

이어서 단장 대표가 계속 호명했다.

“우 강!, 대우 최!”

강우는 자신의 이름을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래도 우 강이라니!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대우가 상을 타다니! 뜻밖이었다. 최대우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성장했다.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S급 재능임이 확실했다.

“물리 최우수상은 실험과 이론 모두 만점을 받은 학생으로 총 세 사람입니다.”

그 세 사람이 모두 강우가 친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나가는 길에 그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녀석과 마주쳤다. 리유창이다.

강우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덕분에 상을 받게 됐어.”

“이익!”

녀석이 후다닥 손을 회수했다.

단상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마치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애나를 중간에 두고 서로 손을 잡고 하늘 위로 나란히 손을 올렸다. 학생들의 요란한 박수가 그들을 축하했다.

단상에서 인사하고 내려온 후 애나가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강우야! 넌 수학도 물리도 정말 잘하네. 어쩌면 랜디보다 잘할지도 모르겠어.”

“너도 대단해. 만점을 받을 줄은.”

“대우야! 너도 대단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자주 연락하고.”

최대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일부터 여드름이 더 짙어지겠군.

한국팀의 금메달은 모두 넷이었다. 고려 과학고 3학년인 김창식과 강우와 최대우 외에 중앙고의 남동훈이 금메달을 받았다.

강우는 그에게 금메달을 양보해 주었던 박호재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네가 잘 해줘서 다행이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엄청 욕 얻어먹었을걸?”

박호재는 아쉬움을 표하는 대신 강우를 축하했다.

긴 메달 수여식이 끝나고 물리 올림피아드 행사가 종료됐다.

홈페이지를 확인한 학생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으아아! 우리가 금 4개로 1등이야! 중국이 금 3개로 2등이고.”

한국대표는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우승했다. 강우에게 당했던 리유창은 은메달을 받았다. 만일 강우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리유창은 금을 받았을 테고 중국은 남은 하나의 메달이 은이었기에 우승은 중국 차지였을 것이다.

작년 우승국인 중국을 따돌렸기에 그 기쁨이 배가 됐다.

행사장을 나왔을 때 문 앞에 리유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아는 얼굴이라고 강우는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의 목에 걸린 금메달과 리유창의 목에 걸린 은메달이 서로 대조됐다.

강우의 앞에서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강우는 거부하지 않고 악수했다.

“네가 중국 팀 에이스라며? 갑자기 미안해지네.”

“아니, 내가 주제넘었던 탓이지. 2년 연속 금을 받아서 올해 너무 기고만장했었어. 내년에 다시 겨루면 좋을 텐데…… 기회가 없네.”

분이 풀렸는지 리유창이 부드럽게 나왔다.

과학에 관심 있는, 그것도 물리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굳이 반목할 필요가 있을까.

강우은 리유창과 이메일을 교환했다. 그리고 최대우의 블로그를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국에서 대학 갈 거야?”

“아니, 유학 가려고.”

“어디?”

“MIT나 버클리.”

리유창은 미국 유학을 생각하나 보다. 요즘은 세계 어디에서나 중국 유학생이 많으니 특별하진 않다.

“어쩌면 훗날 또 만날지도 모르겠네.”

강우는 리유창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굳이 두 사람이 같은 대학교로 유학하지 않더라도 물리학계를 떠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오늘의 헤어짐이 아쉽지 않다.

리유창을 보내고 강우는 동료를 찾았다.

그와 최대우는 이곳에서 하루 더 지내고 다른 친구들은 오늘 한국으로 돌아간다.

강우는 김창식, 남동훈과 악수했다.

비록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했지만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무사히 물리 올림피아드를 치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자주 만나자!”

남동훈과는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MIT의 잔디밭에서 최대우와 단둘이 남아 차도도를 기다렸다.

최대우가 연신 자신의 손을 살피고 있었다.

“너 뭐 하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녀석의 안색이 조금 붉어져 있으니.

“너, 지금 애나 생각하니?”

“어? 귀신이네! 난 오늘부터 손 안 씻을 거야.”

“그건 뭔 소리야?”

“이 손으로 애나 손을 잡았잖아?”

아! 답이 없는 녀석. 앞으로 애나를 또 만날 일이 있으려나? 블로그에 자주 들린다고 했으니 어쩌면 인연이 이어질지도 모르지만. 애나가 물리학계를 벗어나지 않고 최대우도 계속 물리학을 연구한다면 언젠가 또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상상하며 실실 웃음을 쪼개고 있자니 차도도와 손차희, 윤수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앞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강우와 최대우는 금메달을 척 내보였다.

“금!”

“우와! 대우야! 대단해!”

“대우 축하해!”

모두가 최대우를 축하하면서도 강우에겐 시큰둥했다.

“어? 난 왜 축하 안 해줘요?”

“네가 못 따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차도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수학 최우수상! 물리 최우수상! 이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요!”

“응, 쉬워. 너한테는.”

차도도와 친구들의 반응에 강우의 마음도 차게 식었다. 젠장, 이게 뭐야.

“내가 다시는 올림피아드에 출전 하나 봐라!”

강우는 2학년이라 내년에 한 번 더 기회가 있다. 물론 내년에 출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네년에 또 나갈 생각이었어?”

당연하다는 듯 손차희가 물었다.

“아니! 절대 안 나가. 축하도 못 받는데…… 내년에는 후배들한테 길이나 열어줘야지.”

괜히 신경질이 나서 하는 말은 아니다. 정말 강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내신에서 다른 학생을 위해 몸을 사리듯 올림피아드에서도 세계적인 과학자로 피어날 후배를 위해 그가 양보하기로.

올해 한 번으로도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에는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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