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92화 (192/325)

제192화 헌팅턴사 (3)

보스턴은 미국에서 오래된 도시다.

뉴욕이나 LA와 다른 분위기에서 시내를 돌아다녔다. 영국식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와 공원을 구경한 강우 일행은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스턴에서 보냈다.

저녁 식사 때 만찬으로 강우와 최대우, 손차희의 올림피아드 메달을 자축했다. 더불어 예정대로 진행된 프로젝트 체결을 모두가 환영했다.

“그럼 우리는 다음 학기부터 헌팅턴 프로젝트를 하는 거야?”

“카이스트 프로젝트가 끝나니 미국 회사가 대기하고 있었어!”

“MIT 요셉 교수도 같이하는 거지? 그러면 MIT랑 R&E를 하는 거야?”

들뜬 마음으로 고곽천재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강우는 그들의 환영에 감사하면서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기에 새로운 연구과제를 맞이하자 호기심을 키우며 도전할 줄 안다. 이들에게 프로젝트는 하나의 연구 놀이와 마찬가지다.

차도도가 전반적인 내용을 다시 설명했다.

총책임자는 요셉 교수이고 MIT와 헌팅턴이 프로젝트를 정식으로 체결했다. 며칠 내로 MIT에서 정식 공문을 고려 과학고에 보내 위탁연구를 추진할 것이다. 당연히 고려 과학고의 연구 책임자는 차도도이고 강우를 비롯하여 고곽천재는 연구원 신분으로 3년간 매달려야 한다.

“우린 1년 반 후면 졸업해야 하잖아요?”

손차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차도도가 바로 대답했다.

“너희는 졸업 후에도 선택권이 있어. 계속 프로젝트에 매달려도 되고 아니면 후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도 되고.”

그들이 졸업하고 후배가 물려받으면 그 후배는 남은 1년 반 동안 계속해서 연구를 수행하면 된다. 물론 서약서 때문에 차도도와 강우는 예외다. 이 과제에서 손을 뗄 수 없다.

“대학 입학 후에도 계속할 수 있어요?”

“물론이지.”

본인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으니 안색이 밝아졌다.

“그런데 120만 달러면 대체 매달 얼마씩 받는 거예요?”

가장 궁금했던 점을 윤수아가 결국 꺼냈다.

“요셉 교수님이랑 의견을 나눴는데 MIT에서 20만 달러를, 우리가 100만 달러를 가져가. 즉 연구 주체가 우리란 이야기지. 100만 달러 가운데 학교에 20만 달러 정도를 기부할 생각이고…….”

연구기관과 연구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연구비에는 간접비가 숨어 있다. 고려 과학고는 이런 프로젝트를 맡은 실적이 없기에 별도 규정이 없지만 차도도는 대략 20% 정도 선에서 학교발전기금으로 내놓을 생각이다.

남은 연구비는 80만 달러. 이 가운데 30만 달러 정도를 부대비용으로 잡아야 한다. 특별히 실험비용이 필요하진 않지만, 연구를 수행하다 보면 돈이 들어갈 곳이 있다. 게다가 나중에 MIT나 헌팅턴사를 다시 방문해야 하니까 항공편 비용도 책정해야 하고.

“우리는 공평하게 나누었어. 딱 5명분으로. 그럼 1인당 10만 달러거든. 대략 1년에 4천만 원 정도 받게 돼.”

학생이 아니더라도 상당히 큰돈이다. 고곽천재는 사실상 직장인과 같은 월급을 받게 됐다. 최소한 3년 동안. 지금까지 고려 과학고의 어떤 학생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간혹 R&E로 외부에서 연구비를 받기도 했으나 이만큼 큰 금액은 아니었다.

“그럼 쌤도 월급이 두 배로 뛰는 거네요?”

차도도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월급 두 배는 지금 이미 달성했다. 그동안 카이스트 과제와 프로야구단 과제를 수행하면서 월급만큼 더 벌어들였으니까.

“축하해야죠!”

손차희가 컵을 들었다. 물론 그녀의 컵에는 콜라가 담겼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 차도도도 술을 못 하기에 콜라로 대신했다.

챙!

잔을 부딪치고 그들은 의지를 모았다. 그들이 열심히 연구를 수행하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밖에 없다.

강우는 의욕을 보이는 동료를 바라보면서 이 팀이 영원히 함께하기를 바랐다.

예전 손강우 시절에는 절대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이었다.

* * *

호텔에서 강우는 자연스럽게 최대우와 방을 썼다.

손차희와 윤수아가 같은 방을 썼고 차도도는 홀로 방을 썼다.

“수아는 내일 아버지를 만나러 간데.”

최대우가 노트북으로 열심히 블로그를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어디 계시지?”

“뉴욕 근처인가 봐.”

뉴욕이면 이곳에서 워싱턴보다도 가깝다. 버스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거리다.

강우는 예전에 윤수아의 아버지와 오빠가 미국에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멀리 미국까지 왔으니 당연히 부모님 얼굴을 보고 가야겠지.

내일 한국행 비행기는 윤수아를 제외하고 나머지만 탄다.

“근데 넌 뭐하니?”

아까부터 노트북을 들여다보면서 실실 쪼개고 있는 최대우가 수상쩍다.

최대우가 후다닥 놀란 표정을 짓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애나가 오늘도 블로그에 왔다 갔어.”

“며칠 전에도 왔다더니 애나도 참 부지런하네.”

“오늘은 질문을 던져두고 갔거든? 여신(goddess)이란 닉네임으로.”

강우도 머리를 맞대고 노트북을 들여다봤다.

애나는 일반적인 문제를 묻지 않았다. 물리학에 접근하는 자세와 공부법에 관한 질문. 정답이 없는 다소 추상적인 내용이고 정확히는 최대우나 강우의 물리 공부법을 묻고 있었다.

“대답해줘야겠지?”

“그래야겠지?”

미국 친구를 한 명쯤은 사귀어 두면 나쁘지 않으니까. 특히 그 대상이 예쁜 애나라면.

“영어로 답해야겠지?”

“한글로 쓰면 걔가 알아먹겠니?”

“나도 닉네임을 영어로 바꿔야지. 아내가 알아먹게.”

졸지에 최대우의 닉네임이 시리우스(sirius)가 됐다. 시리우스는 하늘에서 태양 빼고 가장 밝은 별이다.

킥킥대고 웃으며 강우는 관심을 껐다. 아무래도 최대우 저 자식의 노트북 바탕화면이 조만간 애나 사진으로 바뀔 것 같다.

자신의 침대로 돌아간 강우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을 때였다.

- 신새벽 쌤 : 강우야!

- 강우 : 왜요?

신새벽에게서 톡이 날아왔다.

- 신새벽 쌤 : 너 말이야, 얼른얼른 보고 안 해? 네 소식을 꼭 타인에게서 들어야 하니?

생각해보니 물리 올림피아드 결과를 아직 보내지 않았다.

강우는 재빨리 결과를 보고했다. 금메달에 만점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것까지.

- 신새벽 쌤 : 우와, 내 새끼! 잘했어!

갑자기 신새벽의 아들이 된 기분이다. 옆에 있었으면 머리를 쓰다듬었으려나?

- 강우 : 선물 주시는 거예요?

- 신새벽 쌤 : 그래, 돌아오면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 강우 : 네, 고마워요. 근데 쌤! 논문은 좀 들여다봤어요?

- 신새벽 쌤 : 으악!

- 강우 : 놀았구만?

- 신새벽 쌤 : 강우야! 그게 말이야, 내가 밤낮없이 너를 응원하느라…….

강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어쨌든 재밌는 선생님이다.

- 강우 : 어이, 신새벽 학생! 빨랑빨랑 열심히 안 하나?

- 신새벽 쌤 : 헉! 강우야 잘자! 좋은 꿈(이모티콘)!

톡을 마친 강우는 건너편 최대우를 확인했다. 여전히 블로그에 빠져 영작하느라 허우적거리고 있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차도도에게 톡을 보냈다.

- 강우 : 쌤! 찾아가도 돼요?

- 차도도 쌤 : 응? 뭔 일 있어? 오렴.

강우는 차도도의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시험이 끝나 긴장이 풀려 잠이 올 법한데도 시차 때문인지 눈이 말똥말똥하다.

노크하자 차도도가 반갑게 맞이했다.

차도도의 룸에 들어서자 기분이 묘했다. 이곳이 호텔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아파트에서 잔 적도 있으니 이처럼 야밤에 둘만 있는 시간이 처음은 아니다. 장소 탓이다. 미국이어서 괜히 가슴이 설렜다.

차도도의 옷차림은 평범했다.

여름이라 얇은 소재이긴 하지만 비교적 단정한 긴치마형 잠옷이다. 가끔 그녀의 아파트에서 본 적이 있는 패션이다.

물론 강우는 체육복을 잠옷으로 입었다.

“무슨 일인데?”

“그냥 심심해서…….”

“아하! 시차 때문에 잠이 안 오나 보네.”

차도도가 그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스위트룸이 아니어서 호텔 룸은 넓지 않다. 창가로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고 입구에 작은 소파 하나가 전부다.

“허브 티 타줄게. 마시면 잠이 잘 온다더라.”

차도도는 커피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어디에서 구했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티백을 꺼냈다.

강우는 소파와 침대를 고민하다가 침대에 앉아 창밖을 쳐다봤다.

밖은 어두컴컴했고 저 멀리 고성처럼 보이는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2백 년은 족히 된 성당이라 했던가.

“프로젝트가 정말 잘 해결됐어. 걱정 많이 했었는데. 덕분에 우리는…… 앞으로 3년은 더 얼굴을 볼 수 있겠어.”

차도도의 얼굴에서 강우는 기쁨을 발견했다.

그도 같은 감정이었다. 그녀와 3년을 더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물론 그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3년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함께 있게 되겠지만.

“그때 부사장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었니?”

차도도가 완성된 허브 티를 강우에게 건넸다. 여름이라고 티에 얼음을 넣어 차갑게 식혔다. 그 꼼꼼함에 절로 눈길이 간다.

강우는 간략하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차도도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두 사람이 마시는 허브 티의 향기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쌤? 요셉 교수랑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요셉과 만날 일이 자주 없기에 그가 없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분명히 다른 이야기가 오갔으리란 추측이다.

차도도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신이네.”

“뭐라고 하던가요?”

“아! 나보고 미국으로 유학 올 계획 있냐고.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자신 밑에 들어오면…… 프로젝트가 있으니 학비와 체류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차도도는 무려 유명 대학교인 MIT의 석박사과정에 입학 권유를 받았다. 이것은 헌팅턴 프로젝트에 더해 순전히 차도도를 요셉 교수가 높이 평가한 덕분이다.

“그래서 가실 건가요?”

“에이, 내가 뭘…….”

차도도의 재력을 고려하면 학비와 체류비는 사실상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은 강우가 알기로는 집안 사정이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다시 연구자의 위치로 뛰어들 생각이 있는 걸까.

그녀의 대답에서는 어느 쪽의 가능성도 찾을 수 없었다. 반대로 차도도가 물었다.

“강우 넌? 넌 이전부터 유학 가겠다고 했으니까…… MIT도 관심 있는 거야? 이번에 보니까 어때?”

“글쎄요. 학교는 넓고 좋던데.”

“옆 동네 하버드를 구경한 차희와 수아는 하버드가 더 마음에 드나 보던데?”

대학 입학을 위해 토플이나 SAT를 준비해야 하지만 연구논문 실적이 확실하게 있으면 하버드이든 MIT이든 어렵지 않다.

“쌤이랑 같이 가면 어떨까요?”

뜻밖의 제안이었을까. 차도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점차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는 무슨. 같이 가봐야 우린 사정이 다르잖아? 넌 학부생으로 가는 거고 난 대학원생으로 가는 거고. 만날 일도 없지.”

그렇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미끼를 던져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강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쌤, 제가 이번에 수학과 물리 모두 최우수상을 받았잖아요?”

“응, 그렇지.”

“그게…… 양쪽 금메달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데요. 하지만 둘 다 만점인 경우는 처음이래요.”

이것은 강우의 뛰어난 천재성을 증명한다.

“역시 넌 대단해.”

“그래서…… 축하 선물 없어요?”

“응? 선물?”

차도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금방 수습한 그녀가 강우에게 물었다.

“선물 줄게. 뭐로 줄까?”

“지금 이 자리에서…….”

“어?”

입을 벌린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쌤! 잠시 눈 감아봐요.”

“왜?”

“선물 준다면서요?”

눈을 깜박이면서 눈치를 보던 차도도가 조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움직이지 말고요.”

차도도의 얼굴색이 조금 붉어진 느낌이다.

강우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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