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헌팅턴사 (4)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꼿꼿하게 허리를 편 차도도를 강우는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눈이 정화된다. 그녀의 얼굴이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거의 매일 그녀를 보다시피 했고 이제는 눈을 감고도 그녀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데도 지금처럼 코앞에서 그녀를 세세히 살펴보니 감동이었다.
눈을 감으라니 정말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니.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강우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은 눈에 속눈썹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순백의 하얀 피부는 마치 아기처럼 고왔다. 티끌만큼의 결점도 없는 완벽한 그녀의 얼굴은 인형을 보는 듯했다. 조각처럼 뚜렷한 얼굴 윤곽이 마치 하늘의 선녀를 보는 기분이다.
강우는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으응?”
강우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차도도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거의 얼굴을 맞댈 듯이 근접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강우의 눈과 차도도의 눈이 마주쳤다.
“허억!”
순간 깜짝 놀란 강우는 금방 정신을 수습하고는 재차 말했다.
“눈 뜨지 말라고 했잖아요?”
“으응?”
다시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눈치를 보던 차도도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강우는 조심스럽게 두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에 댔다. 움찔하던 차도도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강우는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잡고 엄지로 살살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용기를 낸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썹을 살살 만졌다. 한동안 눈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이마와 콧등으로 옮겨갔다.
차도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웃고 있나?’
걱정과 달리 그녀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강우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마치 마음속에 간직했던 보물에 손을 대는 기분이다.
어느 순간 다시 차도도가 눈을 떴다.
다시 시선이 서로 만나자 강우는 당황했다.
차도도의 손이 올라오더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그를 당겼다.
풀썩-
강우는 차도도 앞쪽으로 엎어졌다.
“졸리지? 허브 티를 마시면 편안해져서 잠이 오거든.”
차도도가 자세를 틀면서 강우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강우는 차도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자세가 됐다.
“편하게…… 눈 감고…….”
강우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감았다. 차도도의 무릎을 베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평화가 찾아왔다.
눈앞에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차도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 있었다.
강우는 눈을 감았다.
“강우야…… 네가 나에게 주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난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나지막한 차도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받은 것이 훨씬 많았다. 학교생활에서 그녀를 의지했고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녀의 이름과 지위를 빌렸으니까. 그녀의 도움으로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고. 그 모든 일을 혼자 하려 했다면 아마 절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라고, 그가 얻은 게 더 많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잠이 쏟아져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많이 주는지 넌 모를 거야. 우리의 인연이 3년으로 늘어나서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이 나란 것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귀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녀의 손이 얼굴에 느껴졌다. 차도도가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이마와 눈과 코를 만지고 있었다.
조금 전과 완전히 뒤바뀐 상황. 그 편안함 때문인지 강우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미국에 온 후로 그를 짓누르던 긴장감과 의무감이 해제되고 심신이 편안해지면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물을 머금은 솜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점차 강우는 잠에 빠져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바로 차도도였다.
* * *
“헉!”
깜짝 놀란 강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호텔 침대 위였다.
순간 차도도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기억이 떠오른 강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어났어?”
반대편 침대에서 최대우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의 기억만 빼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꿈이었나?
어리둥절 주변을 둘러보는 그에게 최대우가 낄낄대며 웃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쌤 방에서 뻗었어?”
“응?”
“쓰러진 너를 쌤이랑 나랑 둘이서 옮기느라 엄청 고생했지.”
그가 잠이 들자 차도도가 최대우를 불러 이곳으로 옮긴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뭔가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에 강우는 호흡을 골랐다.
“별일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혹시 너 술 마셨냐?”
“술은 무슨. 쌤이 술을 주실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지.”
피식 웃더니 최대우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강우는 어젯밤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 손으로 차도도의 얼굴을 만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지금까지 그녀의 손을 잡은 일이 전부였는데 오늘 그 벽을 깬 느낌이다.
조금은 더 가까워진 기분, 어쩌다 손을 잡을 기회야 생기지만 얼굴에 손을 대는 것은 절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지금도 그녀의 부드러움이 손끝에 남아있다. 최대우가 애나와 악수한 후 손을 씻지 않겠다고 소리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벌써 옷을 갖춰 입은 차도도가 안을 들여다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였다.
“강우? 일어났어? 얼른 갈 준비 해야지.”
“허억!”
생각해보니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자 차도도가 킥킥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보통 때와 다르게 들렸다. 기분 탓인가.
* * *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입국 수속을 끝내고 공항 입국장으로 나왔다.
출국 때는 수학 대표팀과 함께였고 입국 때는 윤수아를 제외한 고곽천재와 함께였다. 입국장 풍경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입국하는 사람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북적였고 그 틈을 뚫고 강우는 트렁크를 끌면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최고지.”
강우의 탄성에 손차희가 비웃었다.
“언제는 MIT 공기가 좋다더니?”
“하버드 물이 좋다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티격태격하면서 강우는 북적이는 터미널을 바라봤다.
드디어 돌아왔다. 손강우 시절 꽤 자주 해외를 돌아다녔는데도 이번 여행은 남달랐다. 올림피아드보다 헌팅턴의 부담이 심적으로 컸던 모양이다.
뒤를 돌아보니 차도도와 최대우가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최대우는 큰 덩치답게 차도도의 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착한 녀석.”
마중하는 사람들의 터널을 지나치고 있자니 갑자기 한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강우 학생?”
강우는 대답하지 않고 상대를 살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중앙 사이언스 잡지의 김승범 기자입니다. 잠시 시간 낼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강우는 이맛살을 팍 찌푸렸다.
“뭔데요?”
“이번에 수학 올림피아드와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다고 들었습니다.”
수학 올림피아드 대표팀은 일주일 전에 도착했고 물리 올림피아드 대표팀은 어제 도착했으니 그 소식이 이미 알려졌을 터였다.
게다가 수학에서는 국가 순위로 2위, 물리에서는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으니 신문에 작게나마 한 줄짜리 기사로 실렸다. 애초에 과학은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해 큰 기사로는 나가지 않았겠지만.
“그런데요?”
조금은 퉁명스럽게 강우가 상대를 쳐다봤다.
김승범 기자가 온화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관련 기사가 이미 나가긴 했습니다만, 대표단 보고에서 강우 군이 양쪽 모두 금메달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쪽 금이 드문 일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있었고 최근에는 중국에도 있었거든요.”
“압니다. 그런데 이번에 강우 군이…… 양쪽 모두에서 만점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면서요? 그런 일은 처음이라던데……. 그래서 어제 고려 과학고에 전화해봤습니다.”
“학교까지요?”
“강우 군이 언제 한국에 들어오나 알아봤죠. 그동안 강우 군의 학교 생활도…….”
열심히 강우를 붙잡고 설명하던 김승범이 강우 주변 사람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차도도와 만나자 생기가 돌았다.
“차도도 선생님이시죠?”
“네?”
“고려 과학고에서 프로젝트 이야기가 있던데요?”
차도도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이 기자가 차도도와 프로젝트까지 아는 것을 보면 뒷조사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강우 군의 천재성을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강우가 뭐라고 하기 전에 차도도가 먼저 말했다.
“여기에서 이러지 마시고 내일 낮에 학교로 방문하세요. 점심시간 이후에 말입니다.”
차도도는 기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강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강우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차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신새벽이다.
버스에 시달리며 학교까지 돌아갈 고민을 하던 차에 친절하게 데리러 온 신새벽이 고마웠다.
강우 일행을 발견한 신새벽이 손을 흔들었다.
“모두 무사히 도착했어? 얼른 타!”
신새벽이 어떻게 등장한 걸까? 살짝 찌푸려진 차도도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의뢰는 아니다. 최대우일 리도 없으니 범인은 신새벽 반 학생인 손차희다.
역시 손차희가 신새벽에게 꾸벅 인사했다.
“쌤! 고마워요!”
“이 정도 수고야, 자! 차 쌤은 뒤로 가고! 강우는 조수석에…….”
짐을 트렁크에 실으면서 신새벽이 독단적으로 자리를 배치했다.
차도도가 안면을 확 일그러트리더니 빽 소리쳤다.
“신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우 체격이면 뒷자리에 세 사람이 앉겠어요?”
순간 강우와 최대우의 안면이 확 굳었다. 최대우가 뒤에 타면 그 옆의 두 사람은 죽음이지. 최대우가 타면 모든 차가 티코나 모닝이 되니까.
“어, 어…… 내가 조수석에 탈게.”
최대우가 알아서 조수석으로 피했다.
신새벽의 눈총을 무시하고 강우는 뒷자리 중간, 차도도와 손차희 사이에 끼어 앉아야 했다. 신새벽 옆에 앉아도 좋지만 이렇게 두 여인 사이에 끼어 앉아도 나쁘지 않다.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눈총을 받고는 참았다.
차를 출발하면서 신새벽이 다시 축하했다.
“강우! 잘 했다며? 축하해!”
“쌤! 저는요?”
“그래, 너랑 대우도 축하! 오늘 쌤이 맛있는 거 사줄게.”
기내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배가 고프던 차였다. 맛있는 것을 먹자고 하니 대만족이다.
화창한 날씨에 도로는 쭉 뻗어있고 차는 드문드문 고속으로 달린다. 그런데 강우가 탄 차는 슬금슬금 기어간다.
그제야 강우는 신새벽의 운전 솜씨가 아직 초보란 사실을 깨달았다.
“쌤! 여기 고속도로인데요?”
“여기 제한속도가 몇이야?”
“100일 걸요?”
“위 말고 아래.”
강우는 기가 막혀 바로 입을 닫았다. 고속도로에서 속도 하한선을 찾는 사람을 처음 봤다. ‘오늘도 무사히’란 말이 눈앞에 떠올랐다.